<살며 생각하며>운명의 진정한 주인은 우연


진회숙 음악평론가
인간이라는 존재 우연의 산물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도 없어
우연 아닌 필연의 관점서 보면
신념과 도그마의 노예가 될 뿐
나를 대단한 존재로 생각 않아
그래서 충분히 자유롭고 행복
어느 날, 의사 뒤퐁 씨가 환자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아 황급히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배관공 뒤부아 씨는 옆집 지붕을 수리하려던 참이었다. 의사 뒤퐁 씨가 그 집 앞을 지나가는 순간, 배관공 뒤부아 씨가 들고 있던 망치를 실수로 떨어뜨렸다. 떨어지는 망치의 궤적이 마침 그 밑을 지나던 뒤퐁 씨의 동선(動線)과 한 지점에서 일치했다. 결국, 의사 뒤퐁 씨는 머리를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오래전 프랑스의 분자생물학자 자크 모노(1910∼1976)가 쓴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에서 읽은 이야기다. 모노는 이른바 ‘절대적인 우연’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일어난 의사 뒤퐁 씨의 비극을 예로 들었다. 이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까? 당연한 인과응보라고 할까? 만약 뒤퐁 씨가 뒤부아 씨에게 평소에 나쁜 일을 했다면 이런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뒤퐁 씨가 환자의 호출을 받고 그날 아침 그 시간에 그 밑을 지나간 것과, 뒤부아 씨가 그날 아침 그 시간에 옆집 지붕을 수리하다 실수로 망치를 떨어뜨리게 된 일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다. 서로 독립적이고 개별적인 행동이 우연히 한 장소에서 겹치면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우연의 일치’라는 말밖에는 달리 이 비극을 설명할 길이 없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우연이 빚어낸 수없이 많은 사건 사고를 접한다. 우연히 횡단보도를 건너다 하필이면 바로 그 시간에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음주운전 차량에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출장 중 우연히 묵은 호텔에 하필이면 그날 화재가 발생해 목숨을 잃기도 한다. 세상을 살면서 이런 비극적인 우연은 너무나 많이 일어난다. 그렇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수많은 우연 속에 대책 없이 방치돼 있는 존재다.
모노는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에서 유인원에서부터 인간에 이르는 진화의 장대한 동력의 주역이 ‘우연’이라고 했다.
“오직 우연이야말로 생명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새로움과 모든 창조의 유일한 원천이다. 순전한 우연, 오직 우연, 절대적이지만 생물적인 것에 불과한 이 자유, 이것이 진화라는 경이적인 건축물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다.”
평소에 막연하게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뭐라고 할까. 무언가 시야가 확 트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무런 목적도, 인과관계도 없는 무색무취의 우연이라는 요소가 인간을 비롯한 세상 모든 생물이 진화하는 동인(動因)이라는 사실이 즐겁고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같이 거창하진 않더라도, 자기가 어떤 필연적인 이유로 이 세상에 태어나고 존재한다고 믿으려 한다. 안 그러면 너무 허무하니까. 그래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우연의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시공을 초월한 어느 곳에 우연의 법칙이 작동하지 않는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고 믿으려 한다. 어쩌면 세상의 모든 종교, 대부분의 철학은 이런 우연성을 부인하려는 필사적 노력의 일환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모노는 이 엄청난 노력을 단번에 제압하는 주장을 폈다. 그의 주장이 과학적 근거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분야이니 말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책을 읽고 나서 삶에 대한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해 왔는데,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 더 좁혀서 말하면 나라는 존재가 순전히 우연의 산물이라니! 신의 섭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연히 생겨서 이 세상에 온 것이라니, 이 얼마나 신선한 충격인가.
나라는 존재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는 무한한 자유와 해방감을 느꼈다. 내가 만약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고, 그리하여 내 존재의 이유가 신의 섭리를 세상에 알리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면, 혹은 존재의 허무함이 두려워 스스로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 태어났다고 믿는다면, 살면서 맞게 되는 모든 일을 우연이 아닌 필연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그 불행과 행복의 원인과 결과를 찾으려고 애쓴다면, 나는 어떤 신념과 도그마의 노예가 되어 끊임없이 나 자신의 자유를 통제하고 억압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생물 진화의 동력이 우연에 불과할 뿐이라고 알려준 모노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그의 책을 읽은 이후 나는 인간의 삶과 세상에 대해 하나의 생물 이상의 기대를 하지 않게 되었다. 기대하지 않으니 실망할 것도 없다. 신이나 역사에 빚진 것도 없으니 갚을 것도 없다. 왜 사느냐 하는 존재론적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왜 사느냐고? 이 세상에 하나의 생물로 태어났으니까 살지. 이 말을 듣고 나를 염세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인간이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더 자유롭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 세상에 우연히 떨어진 존재에 불과한 나는 지금 충분히 자유롭고, 충분히 행복하다.
[ 문화닷컴 | 네이버 뉴스 채널 구독 | 모바일 웹 | 슬기로운 문화생활 ]
[Copyrightⓒmunhwa.com '대한민국 오후를 여는 유일석간 문화일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구독신청:02)3701-5555 / 모바일 웹:m.munhwa.com)]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내와 자녀 해외로 보내고… ‘기러기 아빠’ 방심한 불륜
- 이용식, 뇌경색 후 실명…“하늘서도 딸바보 할게” 눈물
- “文 임기말 측근 챙기려 공공기관 59명 알박기 인사”
- 도올 김용옥 “대선 패배는 文 탓, 문빠 정치가 진보 망쳐” 분노
- 국힘, 상종가 안철수 총리 견제 속 반기문·박용만·한덕수 거론
- 지하철서 ‘휴대전화’로 60대 머리 내려친 20대 구속
- 손흥민 결승골… 한국, 11년 만에 이란 꺾고 조 1위 도약
- [단독] 尹, 초대 국무총리 내달 10일쯤 지명할듯
- 이혜성, 전현무와 결별 후 머리 싹둑 “인생은 쓰다”
- ‘애로부부’ 아내 “남편이 OO에서만 깔짝깔짝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