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미팅 자판기’ ‘음주측정 자판기’ 등 이색 자판기도 유행
최근 암호화폐 등 결제 방식도 다양해져
쇠퇴의 길로 사라지는 듯 했던 ‘자판기’(자동판매기)가 다시 돌아오고 있습니다. 비용을 줄이면서도 고객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으로 자판기를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죠. 커피와 음료수, 과자만 나오는 기계 정도로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시대가 변하면서 구급외약품부터 즉석식품, 중고명품까지 다양한 자판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자판기의 진화를 알아봤습니다.
편의점이 내몰았던 자판기의 복귀
자판기 운영은 1980~90년대에 전성기를 누렸지만, 커피 전문점이나 편의점 등이 생기면서 점차 쇠퇴해가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자판기 시장이 급속도로 커지고 있습니다. 시장 조사 기관인 리서치앤마켓은 스마트 자판기의 글로벌 시장 규모가 2027년에 170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습니다.
자판기가 새로운 전성시대를 맞이한 데는 코로나19 영향이 큽니다. 비대면·비접촉이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자리잡으면서 자판기 수요가 늘어난 것입니다. 젊은층 가운데는 감염을 우려해 비대면을 선호하는 것도 있지만, 사람을 만나서 주문하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젊은층을 중심으로 자판기에 대한 호감도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인건비 부담도 한몫 합니다. 2022년 최저임금은 9160원인데, 주휴수당을 포함하면 사실상 1만원이 넘는 셈입니다. 코로나19로 매출이 줄어든 상황에서 인건비 부담이 커지자 자영업자들이 속속 무인화에 나서면서 자판기 활용도가 많아진 것이죠. 무인 시스템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자판기입니다. 자판기는 인건비 부담을 줄이고, 관리가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기술 발달도 다양한 자판기가 개발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저장·보관 기술의 발달로 가공식품뿐 아니라 신선식품 등으로 품목이 확대된 것이죠. 결제 방식도 신용카드뿐 아니라 핸드페이(손바닥 정맥 결제) 등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외국에는 암호화폐로 결제할 수 있는 자판기도 나왔습니다.
자판기 도입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한때 자판기의 대척점에 있었던 편의점 업계입니다. 이마트24는 국내 최초로 자판기를 이용한 무인 편의점을 운영 중입니다. 2021년 말부터 주류자판기를 도입한 편의점도 있습니다. 편의점 CU가 운영하는 무인 주류 자판기는 소주, 맥주, 전통주, 와인 등 모든 주류를 판매합니다. 간편 본인확인 서비스 앱의 모바일 운전면허증 QR코드를 통해 성인인증을 한 후 이용하는 방식입니다.
자판기 특성상 유통기한이 길거나 아예 없는 제품이 많았지만, 최근 유통기한이 짧은 신선 식품과 냉장·냉동 간편식을 취급하는 자판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육 자판기와 즉석식품 자판기를 들 수 있습니다. 그동안 즉석식품의 경우 식품위생법에 따라 매장에서 직접 소비자에게 팔거나, 배달·포장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규제 실증 특례 사업을 통해 시범적으로 즉석식품도 자판기를 통해 팔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즉석식품 자판기는 주로 공유오피스 등에 설치돼 있습니다. 식품에 전자태그를 부착해 식품 정보와 유통기한을 관리한다고 합니다. 또 온도 센서가 설치돼 있어 자판기 스스로 적정 온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신선식품 플랫폼 ‘프레시스토어’는 편의점에서 정육 자판기를 선보였는데, 한우 등심과 돼지 삼겹살 등 고기를 뽑아 먹을 수 있는 자판기입니다.
이색 자판기도 거리 곳곳에 설치돼 있습니다. 화장품 마스크와 마스크 자판기, 꽃·샐러드·아이스크림·피자·셔츠 자판기 등입니다. 최근에는 중고거래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중고거래 자판기’도 나왔습니다.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상품을 자판기 안에 넣어 두면, 투명 관으로 된 자판기 안에서 진열부터 판매까지 이뤄지는 식입니다. 중고제품을 자판기 안에 넣으려면 몇 가지 까다로운 절차를 통과해야 합니다. 중고거래 앱에 제품을 올리고, 사람들의 관심을 의미하는 ‘하트’가 세 개 이상 붙는 등의 조건입니다.
2022년 2월 롯데백화점과 현대아울렛 일부 지점에선 명품만 취급하는 중고명품 자판기도 등장했습니다. 중고명품을 사고 파는 일이 흔한 일상이 되면서, 고객들이 자신이 쓰던 명품을 오프라인에서도 믿고 편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입니다.
이외에도 약국 역할을 하는 ‘구급약(의약외품) 자판기’도 나왔습니다. 자판기 안에는 KF94마스크와 소독약, 상처 연고, 반창고, 손 소독제, 생리대까지 생활 밀착형 제품이 구비돼 있습니다. 2021년 망향휴게소를 시작으로 전국 고속도로 50여곳에 설치돼 있습니다.
1990년대에는 ‘미팅 자판기’도 나와
이런 기상천외한 자판기는 예전에도 있었다고 합니다. 1980~90년대에는 ‘자판기 전성시대’라고 할 정도로 갖가지 아이디어 자판기가 쏟아졌죠. 구두닦이 자판기와 동전을 넣고 빨대를 불면 자신의 음주상태를 미리 측정해볼 수 있는 자판기, 이성의 신상명세서를 파는 ‘미팅 자판기’도 있었습니다. 이외에도 계란후라이 자판기, 기계에 부착된 카메라에 사진을 찍으면 그림이 출력되는 캐리커쳐 자판기, 달고나 자판기 등이 있습니다.
테이프가 유행했던 그 시절 ‘테이프 자판기’도 있었습니다. 자판기에 원하는 곡을 고르면 테이프에 녹음돼 나오는 것이죠. 심지어 노래와 사진을 넣을 수 있는 ‘음반 자판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기계에 돈을 넣고 마이크로 노래를 부르면 자동으로 녹음이 돼 CD가 나옵니다.
2000년 초반에는 휴대폰 사용이 대중화하면서 휴대폰 충전 자판기가 퍼져 나갔습니다. 노래방이 유행하던 시기에는 분위기를 돋을 수 있는 전자드럼 자판기와 물방울연출 자판기도 등장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판기는 1973년에 등장한 피임기구 자판기로 알려졌습니다. 출산율을 낮추기 위해 정부 정책에 따라 도입된 자판기입니다. 이후 1977년 롯데산업이 서울 지하철 1호선에 커피 자판기를 설치하면서 본격적으로 자판기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최초 자판기는?
그럼 자판기는 언제 처음 등장했을까요? 자판기의 역사는 고대 이집트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기원전 215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한 사원에는 ‘주화를 넣으면 성수가 나오는 장치’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판기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접시에 돈을 올리면 일정한 양의 물이 나오는 장치입니다. 동전의 무게에 따라 지렛대가 기울어지면서 물통의 구멍이 열려 물이 흘러나오고, 동전이 통으로 빠져나가면 밸브가 닫히면서 물이 나오지 않는 원리입니다.
글 jobsN 박혜원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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