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건축물의 계획안이 공개되자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이 건축물은 다름 아닌 에펠탑이었죠.

에펠탑은 약 130년 전
귀스타브 에펠이 설계한 건축물입니다.

에펠탑은 만들어지던 당시 파리의 시민들이
좋아하던 건축물이 아니었는데요.

철을 주요 재료로 사용한 에펠탑이
파리의 아름다운 석조 건축물들과 어울리지 않다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파리의 시민들은 에펠탑에 대한
혐오감을 가감없이 밝혔는데요.

에펠탑을 보지 않기 위해
파리에서 에펠탑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인
에펠탑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겼다고도 하죠.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130여년이 흐른 지금 에펠탑은 파리의 랜드마크로서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데요.

흉물이라 평가받던 에펠탑은 어떻게 파리의 상징이 되었을까요?


에펠이 만든 것은 에펠탑만이 아닙니다.
그는 수많은 건축물들을 계획하고 만들었는데요.
대표적으로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의 내부구조도 에펠의 발상에서 출발했죠.

19세기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들엔
에펠의 손길이 닿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건축에 관심이 있던 건 아니었죠.

어릴적 에펠은
석탄 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어머니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어린시절 에펠은 학교 수업보다는
학교 밖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삼촌인 모렐라 에펠 덕분인데요.

삼촌은 화학에 재능이 있었고,
관련 공장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였습니다.

귀스타브 에펠은 삼촌을 따라다니며
새로운 기술들을 접하게 됩니다.

삼촌과 함께한 시간을 통해
에펠은 화학과 수학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몇년 뒤 에펠은 파리의 중앙공예학교에 입학하며
여러 실용학문을 배우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 당시에 크나큰 두각을 드러내진 못했습니다.

1855년 그런 그의 생을 바꿔놓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죠.

대학을 갓졸업한 22살의 에펠은
만국박람회에서 한 건축물을 만나게 됩니다.
알렉상드로 바로라는 건축가가 만든
‘산업의 궁전’이었죠.

그때까지 유럽은 석재를 쌓아올려 만든
건축물들이 주를 이뤘는데요.

돌로 만드는 만큼
이 공법으로는 넓은 내부 공간을 만들 수 없었고
공사 기간도 상당히 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산업의 궁전’은 달랐습니다.
바로는 ‘철’을 주요재료로 사용했는데요.

열을 가해 쉽게 변용할 수 있는 철 덕분에
바로는 이 건축물을 아주 빠르게, 또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어낼 수 있었죠.

에펠은 그 순간 철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재료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후 에펠은 철로 만든 구조물을 설계하기로 마음먹죠.
이를 위해 자신이 일할 회사를 찾으러 다녔는데요.

이 때 에펠은 인생의 스승
샤를 누보를 만나게 됩니다.
샤를 누보는 당시 철골 구조 설계 분야에서
크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에펠은 그의 밑으로 들어가 건축과 설계를 배우기 시작하는데요.
특히나 당시 주목받지 못하던 ‘다리’
다시 말해 교량 건축에 빠졌죠.

에펠은 누보와 함께 철골 교량을 설계하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에펠은 엄청난 노력파였는데요.

누보의 공장 근처에 방을 구해
매일 지칠줄 모르며 밤 늦게까지 일하기도 했죠.

그는 매순간 철에 대해 고민하며
새로운 상상을 펼쳤고, 이것을 펼칠 기회를 엿봤습니다.

그의 첫 작업은 보르도 근교의 22M짜리
철교를 건설하는 일이었는데요.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내며
건축계에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에펠의 도전적인 철골 사용법을 보며
그를 '철의 마법사'라 부르는 사람들도 생겨났죠.

자신감을 얻은 에펠은 스승 샤를 누보를 떠나
자신의 이름을 딴 회사를 설립합니다.

그의 회사가 생긴 만큼 그는 더욱더
자신만의 철에 대한 감각을 담아낼 수 있는 일에 몰두했는데요.

에펠과 그의 회사는 프랑스 뿐 아니라 다양한 국가에
철교와 건축물을 의뢰받아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포루투갈에 지어진 마리아 피아교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1877년
포르투갈은 자국내의 넓은 강을 건널
다리의 설계안을 모집했는데요.

그 강은 유속이 빠르고
강바닥은 약해 교각이 지지되기 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강이 너무 넓었기 때문에
다리를 지지하는 기둥의 간격은 160m나 되어야 했는데요.

당시 존재하던 어떤 다리보다도
긴 간격이 요구되는 다리였습니다.

에펠은 이 문제를 철골과 아치를 활용해 해결했는데요.

이 공법 덕에 다리는 튼튼할 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의 제시한 계획안에 비해
공사비도 1/3수준으로 낮아졌습니다.

이 기술은 당대에는 생소했던 방식이었는데요.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며 철의 마법사 에펠의 명성이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마리아 피아교로 명성을 얻게 된 에펠은
가라비 고가교를 설계하기도 했습니다.
이 다리는 강 수면에서 120m 높이에 건설된 다리인데요.

당시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리였습니다.
이번에도 그는 그만의 철골 건축기술을 활용해
성공적으로 다리를 완성시켰죠.

이렇게 완성된 가라비 고가교는
에펠의 다리 중 가장 우아한 작품이라 평가받습니다.

구조적으로 효율적일 뿐 아니라
미적으로도 자연과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죠.

철을 다루는 에펠의 뛰어난 능력은
그를 건축가일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 보이게 만들었습니다.

1886년 에펠에겐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프랑스는 또 한번의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하는데요.

전세계 사람들이 몰려드는 만큼 프랑스는
자국의 기술력을 뽐내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20년간 파리에 서 있을
300m 높이의 건축물을 계획했죠.

당대 선진국들은 경쟁적으로 높은 건물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300M라는 높이는 전세계 어디에도 없는 높이였죠.

이 불가능해보이는 미션에 도전한 것은
에펠이었습니다.
그는 철골 교량을 설계하던 노하우를 적극 활용해
건축계획을 제시했죠.

철은 석재보다 가벼우면서도
강도가 높기 때문에 아주 높은 건축물을 만들기
적합하다는 것을 어필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진 4개의 다리는
아치로 연결되어 있으며,
1층, 2층, 3층.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는 형태로 계획했는데요.

이는 높은 건축물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지을 수 있도록
계산한 결과였습니다.
당시 이 300m 건축물에 지원한 설계안만 700건이 넘는데요.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에펠의 계획안을 선정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대중들의 관심을 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에펠탑의 디자인에 공감하지 못했고
수많은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특히 300명의 예술가는
에펠탑 건설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기도 했는데요.

공장 굴뚝처럼 추하게 생긴 에펠탑이
노틀담 성당, 개선문, 루브르 박물관 등

역사적 건축물들을 짓뭉갤 것이라 보았습니다.
에펠을 힘들게 한 것은 여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공사비 문제마저 그를 압박해왔는데요.
프랑스 정부가 지급 가능한 비용은 150만 프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에펠이 설계한 도면은 무려
750만 프랑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됐죠.
이때 에펠은 사업가적인 면모를 선보입니다.

부족한 공사비를 에펠이 직접 해결하는 대신
입장료와 운영 수익, 탑에 대한 상표권 등을 얻었죠.

우여곡절 끝에 에펠탑의 공사가 시작되었고
조금씩 높이를 높여갔습니다.

에펠탑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자,
에펠탑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없던 구조의
세상에 없던 크기의 건축물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매료되기 시작했죠.

특히나 사람들이 흉물이 될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에펠탑은 나름의 미학을 갖추고 있었는데요.

에펠탑의 미학이 집대성된 부분은 1층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네 다리가 아름다운 아치로 연결된 모습
그 위로는 장식요소들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은 에펠탑 인근 광장을 거닐며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에펠탑을 관람할 수 있었죠.
또한 300m라는 높은 높이에서 내려다본
파리 시내의 전경은 사람들에게 연일 화제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유명 인사들도 에펠탑을 방문해
감상을 남기기도 했는데요.
인상파 화가 폴 고갱은
“에펠은 새로운 장식 미술을 창조해냈다”

발명가 토마스 에디슨은
“에펠의 영광은 위대한 발상과 용기 있는 실행에 있다”고 말했죠.

약 6개월의 만국박람회 기간 동안
매일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에펠탑에 올랐습니다.

많은 사람이 에펠탑을 방문한 덕에
에펠은 투자한 공사비 대부분을 금방 회수할 수 있었죠.
이후 19년이 넘는 기간동안
에펠탑을 운영하며 큰 수익을 얻기도 했습니다.

원래는 설계 공모 당시 만국박람회를 위한 에펠탑은
20년 후 철거하기로 되어있었는데요.

만국박람회 이후에도 많은 이들이 에펠탑을 사랑했기 때문에
1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업의 궁전’으로 철에 대한 영감을 얻었던 에펠이
이제는 만국박람회의 상징이 된 ‘에펠탑’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후로도 에펠은 자유의 여신상 내부를 비롯해
다양한 건축물을 만들고 또 여러 구조를 연구했습니다.

그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건축 방식은
많은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의 철학과 미학을 담아
세상에 없던 결과물들을 내놓았죠.
그 결과 여전히 그의 건축물들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특히나 그가 남긴 에펠탑은
현재 파리, 또 프랑스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되어
현재까지도 세상에서 손꼽히는 관광명소가 되었는데요.

자신만의 철학으로 완성된
거대한 철 구조물로부터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떠오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