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하는 중년 남자] 은수저는 서랍에서 놀고 일은 쇠수저가 다 하는 법

한현우 문화전문기자 2022. 5. 7. 03:0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 가장 비싼 식기는 프랑스산 은숟가락이다. 20년 전 결혼 선물로 받은 것인데 보통의 숟가락보다는 크고, 납작한 국자보다는 작다. 숟가락이긴 한데 구멍이 숭숭 뚫려있어 국물을 뜰 수 없다. 아이스크림을 푸는 숟가락이라고 했다. 이 식기를 만든 회사는 1830년에 창업했다.

이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힘주어 푸다 보면 은이 물렁해서 잘 휘어진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그냥 스테인리스 숟가락을 쓰게 된다. 귀하신 프랑스산 은식기가 엉뚱한 주인 만나 서랍 속에서 한국산 수저들과 뒹군다. 그런데 구글에 검색해 보니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아이스 스푼이었다. 얼음 뜨는 숟가락이라니, 19세기 프랑스다운 제품이다.

은수저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쓰는 물건이다. 시간이 지나면 시커멓게 산화된다. 그럴 때는 베이킹 소다나 치약, 립스틱으로 닦아서 다시 광을 낸다. 세 가지 방법을 모두 써봤는데 립스틱 효과가 가장 좋았다. 이런 방법은 녹을 미세하게 깎아내는 것이어서 식기에 상처가 나게 마련이다. 냄비에 물과 은수저를 담고 알루미늄 포일과 소금을 넣고 끓이면 상처 없이 녹을 없앨 수 있다고 한다.

아내가 결혼할 때 가져온 은수저 세트는 아예 포장 그대로 찬장 속에 있다. 가끔 꺼내 보면 역시 거뭇거뭇 녹이 슬어있다. 안 봤으면 모를까, 봤으니 또 치약을 들고 와야 한다. 안 쓰는 립스틱을 찾아보지만 이미 은수저 닦느라 다 써버렸다.

여행지에서 기념품으로 사온 식기나 조리 도구들은 대개 서랍 속에서 잠잔다. 예쁘거나 신기해서 산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몽 깎는 칼이나 아보카도 깎는 칼 같은 것들이다. 몇 번 써봤지만 그냥 과도를 쓰게 된다. 앙증맞은 포크나 티스푼 세트들도 이사할 때나 한 번씩 열어보게 된다. 요리 유튜버들이 긴 핀셋으로 고기를 굽는 걸 따라해 보려고 긴 핀셋을 샀는데 내겐 역시 2000원짜리 다이소 집게만 못하다.

생각해 보면 비싸고 좋은 식기들은 죄다 서랍 속에 있고 식탁과 싱크대를 오가는 것들은 스테인리스 숟가락, 나무 젓가락, 평범하게 생긴 식칼과 과도, 튼튼한 국자 같은 것들이다. 예쁜 것들은 그냥 예쁨 담당이고 일하는 것들은 모두 평범하고 무난한 것들이다.

오늘도 치약을 짜서 은수저를 닦았다. 은수저 닦기 같은 단순 작업을 하고 있노라면 이 집에 살림하러 잡혀와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든다. 오늘은 은수저로 밥을 먹어야겠다. 밥 먹고 나서 보드카 한잔 마실 땐 프랑스산 은숟가락으로 얼음도 떠넣어야겠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