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은 이날이 기점

유창엽 2022. 4. 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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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겨레가 독립을 외치며 들고 일어난 3·1운동은 국내외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임정 수립은 독립정신을 집약해 우리 민족이 주권국민임을 표현하고 독립운동을 능률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 따르면 3·1운동 전후로 국내외에선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나 전단지 형태의 임정 4곳은 얼마 못가서 소멸했습니다.

정부는 상하이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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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온 겨레가 독립을 외치며 들고 일어난 3·1운동은 국내외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임정 수립은 독립정신을 집약해 우리 민족이 주권국민임을 표현하고 독립운동을 능률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에 따르면 3·1운동 전후로 국내외에선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됐으나 전단지 형태의 임정 4곳은 얼마 못가서 소멸했습니다.

실질적 조직기반을 갖춘 나머지 3개는 한성정부(한성임시정부, 4월 23일, 서울)와 대한국민의회(노령임시정부, 3월 17일, 블라디보스토크), 대한민국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 4월 11일, 상하이)였는데요.

이들 3개 임정 대표자는 대표성 확보 등을 위해 통합을 추진했습니다.

통합은 한성임시정부 정통성을 이어받고 그 내각을 승계하는 한편 정부 위치는 활동하기 편한 상하이에 두고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하며 노령임시정부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이로써 1919년 9월 11일 통합임정이 탄생했는데요.

정부는 상하이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기념일로 정해 기념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1989년 12월 수립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했는데요. 수립기념일은 2018년까지는 4월 13일이었으나 2019년 4월 11일로 변경됐습니다. 이는 역사학계에서 발견한 추가 자료와 학계 의견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임정은 국무원(행정), 의정원(입법), 법원(사법)의 삼권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정으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파괴공작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었는데요.

임정은 상하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 동포사회에 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특히 초기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군 단체에 일임하고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했습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 후 베르사유 강화체제에 의한 국제적 안정기조를 고집하는 열강의 냉대와 일제의 국내조직 파괴, 상하이와 만주, 연해주 등에 산재한 동포사회간 교통·통신 장벽 등으로 계획대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여기에다 민주공화정부 운영 기술이 미숙해 국민적 지지기반이 붕괴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임정 외곽에선 해결책 마련을 위한 국민대표회(1923)를 소집하는 등 애를 썼으나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 의거로 활로를 찾게 됐으나 일제의 반격으로 임정은 13년만에 상하이를 떠나게 됐습니다. 1937년 일어난 중일전쟁도 임정에 영향을 미쳤는데요.

임정은 1932년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동한 뒤 전장(1935)·창사(1937)·광둥(1938)·류저우(1938)·치장(1939)·충칭(1940)으로 차례로 옮겨다녀야 했습니다.

치장으로 옮긴 뒤부터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정상적 운영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이어 충칭 시기(1940∼1945)에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장 주목할만 한 이 시기의 성과로는 광복군을 창설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인도·버마(현 미얀마) 전선에 참전했던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또 주로 중국 정부를 통로로 외교를 강화해 카이로선언(1943)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아냈습니다.

광복군은 미국 특수부대인 OSS(CIA 전신, 전략정보국)와 합작해 국내로 진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원자폭탄을 투하하면서 일본이 패배를 선언,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유창엽 기자 이지원 크리에이터

yct942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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