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생각 다른, 불편한 텍스트 읽는 연습 필요"..리터러시 연구자 조병영 교수 인터뷰[김스피의 딥터뷰]
※해당 인터뷰는 인문교양 뉴스레터 ‘인스피아’(링크) 6월 15일에 발송된 뉴스레터의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한편의 레터를 통해 깊고 넓은 읽을거리를 보내드리는 인스피아를 구독해주세요.
‘리터러시’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나요?
가끔 잊을 만하면 ‘요즘 애들’의 리터러시 부족 문제가 이슈가 되곤 합니다. 예를 들면 최근 SNS에선 ‘성함’ ‘연세’가 어떻게 되느냐는 물음에, 멀뚱하니 대화가 끊겼다는 짤방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사흘과 나흘’ 혹은 ‘(코로나) 양성/음성’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다든지 하는 기사도 그간 뜨거운 관심을 받아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기사가 뜨면 댓글창은 금세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어!’ 라는 혀차는 소리로 가득해지곤 합니다.

물론 어떤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아는 건 필요합니다. 만약 뜻을 잘못 안다면 서로 영 엉뚱한 말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무운[武運]을 빕니다.” “어째서 악담을 하시죠?”)
다만 사실 이런 한자어나 낯선 순우리말 단어가 무슨 뜻인지를 아는 것은 리터러시에서 작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왜냐면 리터러시는 ‘정보를 받아들여서 그걸 나의 삶에 맞게 활용하는’ 능력이기 때문이죠.
리터러시는 가짜뉴스, 저급 정보가 넘쳐나 뭐가 뭔지 알기 어려운 우리 시대에 한층 중요한데요. 어떤 정보가 믿을만한 것인지(“이건 가짜 틱톡이군”), 어떤 정보를 얻기 위해 어디에 접속해야 하는지(위키피디아 등) 등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그렇게 얻어낸 정보를 골라내고 소화해 내 것으로 만드는 것 역시 중요하겠죠. 이렇게 볼 때 리터러시라는 말이 알쏭달쏭해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살면서 무얼 보고, 판단하고, 말하고 행동할 것인가와 연결되어있는 - 삶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아가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이하 읽는 인간)의 저자 조병영 한양대 교수는 젠더, 정치 등의 이슈에서 첨예하게 갈라져 서로 소통하지 않는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가능성으로서의 리터러시를 궁리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리터러시는 우리가 믿을만한 정보를 맥락을 따져 읽는 능력을 뜻하고, 이에 우리가 서로 다른 입장을 넘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더 자세한 이야기를 구하고 싶은 마음에 조병영 교수의 연구실을 지난 9일 찾았습니다.
■‘잘 살기’ 위한 리터러시
김=우선 <읽는 인간>에서 말씀하신 내용 중 “시민이 되기 위한 리터러시”에 대한 개념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는데요. 즉, 리터러시가 단지 개인이 ‘똑똑해지고 땡’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중요한 가치라는 것이었죠. 우리나라에서도 그간 리터러시에 대한 프로그램이나 기사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리터러시 관련 기사는 항상 ‘사흘’로 시작하곤 합니다. 그래서 사실 교수님이 ‘시민이 되기 위한 리터러시’라는 개념을 소개했을 때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는데요.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리터러시 하면 ‘사흘’ 같은 개념 위주로 접근을 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조=아마 ‘사흘’같은 단어로 시작하는 게 자극적이라 그렇게 많이 접근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어떻게 사흘이라는 단어를 모를 수 있어?”로 시작하는 게 꽤 눈길을 끌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런 접근은 어떤 단어를 모른다는, 상당히 기능적인 이야기에 머무르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우리 사회의 리터러시에 대한 이해 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흘’ 에서 시작해서 더 깊은 논의로 가면 되는데, 문제는 우리 사회에선 항상 그 수준에서 이야기가 반복되는 거 같습니다.
이 때문에 리터러시에 대해 정작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못하게 되는 거죠. 어쩌면 “요즘 애들은 ‘사흘’ 모른다”가 더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퍼져있는 ‘한국인은 똑똑하다’는 환상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올림피아 1등하고, 시험 잘보고 이래서 머리가 좋다 등이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똑똑하다는 것은 신화이자 근거가 충분치 않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김=실제로 한국인들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은 기니까요.
조=그저 오래 앉아있을 뿐이죠. 정해져 있는 방식으로 ‘오래’ 한다는 것이 곧 똑똑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런데 이건 당연히 어린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니예요. 2030 아니, 4050도 마찬가집니다. 이 세대들이 막상 본인들도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리터러시를 온전히 갖추고 있지 않으면서, 요새 애들 어려운 단어 잘 모르니까 책 읽혀야 된다 이런 이야길 하고 있는거예요.
가령 리터러시가 책으로만 따질 것은 아니지만, 심지어 성인들이 책도 더 안읽습니다. 문체부 2021년 독서 실태 조사에 따르면 교과서, 참고서 등 제외하고 1년에 책 1권 이상 읽은 비율이 10대는 92%, 20대 청년은 약 78%, 그런데 이게 40대 이상으로 가면 50%정도밖에 안돼요.
김=말씀하신 것처럼, 확실히 아이들 뿐 아니라 성인들도 디지털 시대에 필요한 리터러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저는 그렇기 때문에 ‘리터러시’가 뭘 뜻하는지는 잘 몰라도, 이에 대한 갈증이 있는 성인들이 최근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학교에서 ‘100점 맞기 위한 주입식 공부’해서, 좋은 학교 가서, 사회에 나왔는데 삶에 있어 중요한 질문들, 내가 평소에 어떤 글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내 삶과 우리 사회가 더 나아지기 위해선 어떤 궁리를 해야하는가?라는 것을 체험해본 적이 없는 거예요. 나도 무언가를 읽고 진지하게 궁리해보고 싶은데, 핸드폰을 켜면 자극적인 혐오발언, 낚시기사, 짤방같은 것 밖에 없고. 이 때문에 막연히 더 나은 무언가를 읽고 싶다는 생각은 있는데 구체적으로 리터러시를 위해 무얼 해야하는지는 머릿속에 잘 통합이 안되는 느낌인거죠.
그런 사람들에게 리터러시란 무엇이고, 왜 우리 삶에 필요한지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조=리터러시에 대해선 여러 학문적 관점들이 있지만, 영어사전에 찾아보면 두개 뜻이 나오는데요. 첫째 ‘읽고 쓸 수 있는 능력’ 둘째 ‘어떤 특정 영역의 지식 또는 전문성’입니다.
이중에 첫번째 정의가 우리가 통상 ‘문해력’이라고 이야기하는 의미이고요. 둘째는 예를 들면 컴퓨터에 대한 지식처럼 특정 분야에 대한 ‘소양’의 의미에 가까울 것 같습니다. 중요한 건 이 두가지 의미가 결코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일단 첫째 정의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영어로 “The Ability to read and write”라고 쓰여있고, 그 뒤에 목적어가 없어요. 즉 굉장히 많은 것들을 읽고 쓰는 것을 의미해요. 꼭 종이책 뿐 아니라 이미지, 웹사이트, 영상, 포스터, 칠판에 그리는 판서 등의 모든 텍스트(어떤 의미를 표상하는 구조체)가 될 수 있는 거죠. 예전엔 문자 언어가 중심이었지만, 요새는 문자 뿐 아니라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이 되고 있어요. 이런 것들을 제대로 읽어내고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리고 제가 아까 그 두가지 정의가 연결된다고 했는데요. 그것이 무슨 의미냐면, 전문가가 된다는 건 그 분야에서 정말 잘 읽고 잘쓰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거든요. 어떤 분야의 앎을 구성하고 지식을 갖게 되는 과정을 통해 전문가가 되는 것이죠.
김=‘컴퓨터의 전문가’라고 하면 ‘컴퓨터 리터러시’가 있는 사람이어야 하겠네요.
조=네. 어떤 분야에 대해 지식, 전문성을 갖기 위해서는 잘 읽고 잘 쓰고 잘 표현하고 잘 소통할 수 있어야 돼요. 컴퓨터에 대한 지식도 있고 컴퓨터에 대한 전문성도 있지만, 컴퓨터에 대해서 생각하고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컴퓨터 전문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은 그 분야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 소통을 해야 하고, 만약 그가 대중과도 소통할 수 있다면 정말 전문가이고요.
우리가 보통 어떤 전문가를 보면, ‘저 사람은 딱 저것만 공부해서 전문가가 됐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사실 그 분은 그 수준에 오르기까지 딱 그것만 본게 아니라, 그 분야에서 굉장히 많은 텍스트들을 섭렵했을 겁니다. 전공서적, 학술논문, 관련 데이터는 물론, 책이든 신문기사든 뉴스레터든, 뭐든 자신의 지식과 감각, 시야를 넓혀주는 텍스트들을 수없이 많이 읽고 그 의미들을 다루려고 아주 노력을 많이 했을 거예요.
그 텍스트들을 이해하고 통합하고 연결하고, 그것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더욱 온전한 의미와 앎으로 구축해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해야 내가 일을 할 수 있잖아요. 만약 리터러시를 단순히 어떤 단어를 알고 문자를 읽어내는 ‘문해력’으로만 설명하면 의미가 상당히 좁아지는 거죠.
김=즉, 리터러시가 크게 ‘문해력’과 ‘소양’의 개념으로 정의가 되는데, 그것이 서로 통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라는 것도 사실 본질은 그 분야의 텍스트를 잘 다루는, 리터러시가 있는 사람이고요.
한편 꼭 전문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리터러시가 우리의 일상에 굉장히 밀접한 개념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읽는 인간> 서문에서 정의하신 내용 중에 ‘생각하고 읽고 쓰고 판단하는 능력’을 리터러시라고 하신 부분이있는데요. 제가 그 대목을 곱씹어 생각해보니까 그냥 ‘삶’인거예요. 사실 제가 인터뷰하려고 오늘 지하철 타고 오면서 잠깐 폰으로 짤방이랑 기사같은 걸 봤는데요. 그 짧은 순간에도 읽고 그것에 대해 생각을 하고, 만약 거기에 ‘아주 재미있네요’라고 댓글을 달았으면 이런 것도 리터러시의 정의에서 텍스트를 읽고 쓰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맞습니다. 좋은 예를 말씀하셨는데, 리터러시란 언제든 텍스트로 매개되는 것입니다. 이 경우는 짤방이 텍스트가 되잖아요. 그 텍스트를 통해서 내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떤 판단을 하게 되고 뭔가를 표현하고 그러면서 댓글을 달게 되고 그러면서 다른 댓글들도 보고요. 이제 그렇게 텍스트를 통해서 매게 되는 어떤 생각, 소통, 판단, 이해, 표현 등 일련의 일들이 리터러시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거죠.
김=리터러시가 우리 삶과 친숙한 개념이군요. 그런데 그런 읽고 쓰는 일상적 활동을 잘 하는 것, 즉 좋은 리터러시를 갖는 게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조=좋은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입니다. 즉 좋은 시민으로 살기 위해, 좋은 생활인으로 살기 위해, 좋은 전문가로 살기 위해서죠.
김=그것들이 서로 연결이 되나요?
조=다를 수도 있고 연결이 될수도 있죠. 가령 김스피님은 시민이기도 하고 생활인이기도 하고 전문가(직업인)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여러 역할들을 가지고 있거든요. 예를 들어 생활인으로서는 전셋집을 구하기 위해 계약서를 읽는 것처럼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죠.
시민으로서는, 우리기 선거할 때 사람을 잘 뽑기 위해, 즉 정치적 의사결정을 잘 하기 위해서 정치인들에 대한 정보, 기사, 허위정보, 정책 등의 텍스트를 잘 읽고 써야 하죠. 시민들이 그저 앉아서 구경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무 정치를 대신할 정치인을 뽑는 것을 통해 정치 행위를 하는 존재니까요.
전문가로서는 김스피님도 지금 인터뷰하면서 엄청 열심히 글을 쓰고 계시잖아요. 인터뷰를 위해 미리 책도 읽으셨고.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도 뭔가를 읽고 쓰는 일은 항상 하거든요. (꼭 글쓰는 직업이 아니라도)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일상적으로, 또 여러가지 방식으로 수많은 텍스트를 다양한 환경에서 읽고 쓰는 일들을 하고 있으시죠. 이처럼 텍스트를 읽고 쓰는 일이라는 게 생각보다 우리 삶에 현대사회에서 한 사람으로서 살아감에 있어서 굉장히 자주하는 것들이예요.
김=조금 엉뚱한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 부분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우리 사회 리터러시의 의미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이쯤에서 한 가지 조금 다른 맥락의 질문을 드려볼까 합니다.
그간 제가 리터러시 관련해서 자료조사를 하다 보니까, 투자 관련 블로그나 유튜브 같은 곳에서 간혹 ‘부동산 리터러시’ ‘비트코인 리터러시’ 등과 같은 단어를 보았어요. 금융 리터러시의 경우에도, 오직 개인이 돈을 벌기 위한 정보라는 맥락에서만 강조가 되곤 하고요. 이런 사용에 대해서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 역시 리터러시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조=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NO입니다. 단어를 갖다 붙인거죠. 리터러시의 사전적 의미에서 두 번째(‘어떤 특정 영역의 지식 또는 전문성’) 의미만 차용한 걸로 보이는데요. 이런 말들에선 ‘특정 지식을 아는 것’의 의미만 있는 것입니다. 투자를 하고 구매를 하고, 어떤 걸 조심해야하고, 상승장 하락장이 무엇인지 알고 이런 일련의 지식들을 아는 것, 즉 지식의 의미로만 쓰인 것이죠. 이런 일련의 행동에는 ‘읽고 쓴다’는 개념이 전혀 들어있지 않습니다.
리터러시는 지식이 아니고 실천(Practice)입니다. 만약 부동산 리터러시가 정말 리터러시가 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냐면, 내가 단순히 어떤 부동산 ‘지식을 알아서’ 투자해서 돈을 번다에서 그쳐선 안됩니다.
부동산이라는 ‘주제영역’에 있어서 그 안에서 어떤 이해 관계들이 충돌하고, 어떤 지점에서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고 동시에 누구에겐 손해가 돌아가며 이런 일련의 일들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이고, 어떻게 우리의 삶이 부동산에 엮여들어가는지를 볼 수 있는 능력이 리터러시입니다. 부동산 관련 자료를 읽고, 생각하고,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하는 거죠.
돈을 버는 맥락에서 부동산 리터러시를 언급하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 실천을 하라고 하지 않아요. 제가 말하는 리터러시랑 완전히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터러시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김=방금 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걸 듣고 곰곰 생각하다보니까, 부동산 투자를 하기 위해 리터러시를 언급하는 경우엔, 자기가 그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벗어나서 사안을 보려는 시도가 없다는 게 핵심인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사회적 맥락 속에서 정보를 보는 게 아니라, 단지 정보만 보게 되는 게 결정적인 차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그렇죠. 제가 농담으로 어디서 길 못 찾으면 교통 리터러시가 없다고 말하기도 하는데(웃음) 예전엔 부동산 지식, 부동산 정보, 부동산 전문가, 이렇게 얘기하던걸 리터러시라는 단어가 유행하니까 ‘부동산 리터러시’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뭔가 리터러시 붙이면 좀더 깊게 이해하는 것 같고, 뭔가 동사로서의 ‘앎, 안다’의 이런 느낌들이 있는 거죠.
김=미묘하게 본질적인 이미지를 차용하려 한 것 같습니다.
조=그렇죠. 시세가 어떻다 이게 아니라 원리를 이해해라 이런 느낌? 그렇게 가져다 쓰는 거죠.
■뉴스레터 독자의 탄생과 책임감 있는 독자
김=그간 인스피아 뉴스레터에서 다뤘던 주제들 가운데 혐오, 탈진실 등 시민적인 주제들이 많았습니다. 딱히 실용적인 도움이나 돈이 되지 않는 정보인데도 이런 정보를 적극적으로 얻으려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근래 국내 뉴스레터 분야의 성장은 여러 함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시사, 교양 차원에서 본다면 자신이 직접 읽는 것을 컨트롤하는 동시에 좀더 나은 삶,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려는 진지하고 적극적인 독자 층의 부상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살기 팍팍하고 피곤해도 나와 무관할 수 있는 남들의 이야기, 사회를 위하는 이야기, 기사들을 읽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으신 거죠. 보통 20대 하면 ‘사흘 모른다!’ ‘글 안읽고 유튜브만 본다’ 이런 식으로 얘기돼왔지만 MZ세대 가운데 인기가 높은 시사 뉴스레터(뉴닉)의 캐치프레이즈는 ‘우리가 시간이 없지 세상에 관심이 없냐’이기도 하고요.
이처럼 최근 젊은층 가운데 이처럼 자신이 직접 믿을만한 정보원을 적극적으로 취사선택하고, 다양한 분야의 관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뉴스레터의 구독자들이 늘고 있는 상황에 대해, 리터러시 측면에서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조=전 일단 굉장히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디지털 사회 리터러시 얘기할 때, 중요하게 얘기해온 부분이 ‘더 이상 주어진 텍스트 읽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직접 자신의 필요와 요구, 가치 등의 기준에 따라 텍스트를 찾아서 자기 삶에 도움이 되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텍스트를 찾고 연결하는 태도가 필요한데, 이런 차원에서 뉴스레터 유행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상 디지털 시대 ‘정보의 홍수’ 이런 얘길 많이들 하잖아요. 하지만 정말로 쓸만한 양질의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한, ‘정보 결핍’ 시대입니다. 정보가 많지만, 그 중에 쓰레기 같은 것들도 너무 많고, 가짜도 많고, 그저 시선만 잡아당기는 저질의 정보들도 너무 많아요. 눈길을 끌어놓고선 정작 열어보니 아무 것도 없다거나. 오히려 디지털에 익숙한 일부 젊은 세대들은 이런 정보 결핍감을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동시에 정말 필요한 정보를 찾는 일이 만만치 않다는 것도 알고 있죠. 사람이 누구나 기본적으로 좋은 생각을 하고 싶고, 좋은 지식을 갖고 싶고, 남들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요. ‘과연 정보 결핍 시대에 그게 가능할까?’하는 의문이 있는 것 같아요. 왜냐면 항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인터넷에서 보는 자료들이 다 정치적으로 편향돼있거나, 혐오 발언, 크고작은 이데올로기적 편파 발언 등 다 그런 것들 뿐이니까요.
뉴스레터 서비스는 일종의 구독 서비스고, 내가 직접 어떤 주제를 설정해서 그것이 내게 보내지는 것이잖아요. (양질의 정보를 보고 싶다는 수요가) 서비스 플랫폼의 가능성(affordance)하고 합쳐지면서 ‘잘 만나는’ 케이스라는 생각이 들고, 이런 것은 기존엔 없던 좀 새로운 종류의 리터러시 현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이야기를 조금 해볼게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제가 미국을 잘 모르잖아요. 거기서 태어나지 않았고, 문화적인 것도 잘 모르고. 근데 제가 거기서 리터러시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고 9년 교수 생활을 하다 왔는데, 거기서 예비교사들을 가르치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제가 첫번째 느끼는 결핍감이. 내가 미국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것이었거든요. 미국 아이들, 사회, 문화, 연구에 대해서 내가 거기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에 경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걱정이 있었습니다. 직접 경험한 것과 아닌 것은 완전히 다르거든요.
그때 제가 했던 방법들이 뉴욕타임즈, 뉴요커, 워싱턴포스트 등 주요 신뢰할 수 있는 뉴스, 매거진들을 많이 구독했어요. 메일링 신청하면 그날 있었던 주요 사건 등에 대한 이메일을 보내주거든요.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됐어요. 헤드라인 보는것만으로도 어떤 일들이 문제가 되고 이슈가 되는구나 하는 것들이 이해가 됐고. 내가 공부하는 교육의 분야, 리터러시 읽기, 아이들 관련 것들 소식을 클릭해서 읽었고요. 나중에 뉴스레터에서 봤던 기사, 내용 등을 실제로 학술대회 강연같은거 할 때 많이 사용해요.
리서치 페이퍼에 대한 이야기할 때도 물론 본문에서 데이터를 얘기하고 분석적, 과학적으로 얘기하지만 처음 이 주제에 대해 사람들한테 얘기할 때, 즉 이 문제(논문)가 왜 문제가 되는지에 대해 사람들한테 설명을 할 때는 미디어의 기사 내용을 많이 활용했죠. 그런 것을 통해 “내가 하는 연구가 그냥 실험실에서 하는 연구가 아니다. 세상과 연결된 문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사람들이 뉴스레터를 그렇게 많이 활용을 했으면 좋겠어요.

김=‘정보 결핍’의 시대,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통로로서의 뉴스레터라는 매체의 가능성 및 장점에 대해 짚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뉴스레터의 운영자이자 라이터로서 약간 평소에 고민이 있었던 부분에 대한 질문을 드리려고 합니다. 뉴스레터가 ‘전달’의 수단으로서는 의미가 있지만, ‘소통’의 수단으로서는 한계가 있지 않나 하는 부분인데요. 뉴스레터라는 장르, 형식 자체에 대해선 다들 ‘오오 인터넷 시대의 뉴미디어, 뉴컬처’라고 생각해서 언론사든 미디어 스타트업이든 많이들 뛰어드는데, 알고보면 본질은 행운의 편지 보내는거나 마찬가지랄까요(웃음). 아까도 교수님이 뉴스레터에 대한 피드백 어떻게 오냐고 여쭤보셨는데 피드백 보내는 분들은 정말 찐독자분들이시고, 저는 매주 읽을거리를 준다는 생각으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사회적으로 첨예한 문제에 대한 회차의 경우엔 어떤 분들이 ‘너무 잘 읽었다. 하지만 내가 현실에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정말 속상하다. 주변의 누구와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이런 세상이 바뀔 수 있을까?’라는 내용으로 장문의 피드백을 보내시면 저 역시 마음이 좀 답답하고 슬퍼지기도 해요. 이런 부분은 분명 일방적으로 ‘읽는 것’만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이런 형식의 매체는 한계가 있지 않나. 사회 문제에 대한 성찰이 어떻게든 소통과 토론, 행동으로 연결 되지 않는다면, 단지 내가‘3분 교양’ 채우는 만족감으로 보는 걸로 끝나면 허무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조=3분 교양에 대한 만족감으로 읽는 것,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김=교수님이 책에서도 굉장히 비판적으로 말씀하셨잖아요. ‘가짜 읽기’라고 해서 그런식으로 축약해 놓은 고전 읽고서 아는 척하는 것에 대한 비판.
조=사실은 그런 독자층들이 꽤 될거예요. 우리 사회가 상당히 학력사회잖아요. 그러다보니 지식인들이 상당히 우대를 받아요. 흔히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들이 무시당한다 어쩐다 하지만 사실 우리나라는 굉장히 지식인이 우대받는 사회예요. 일반인들이 ‘멋진 사람들은 저정도는 알아야되는데’하고 생각하면서, 속물교양처럼 구독하면 마음이 편해서 구독하고. 그래서 일단 의무감에서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보고 넘기고. 제대로 읽는 게 아니죠.
사실 이런 서비스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유익함은, (단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접근 통로를 제공해준다는 것이예요. 세상에 이런 것들이 있고, 이런 텍스트가 있다. 다만 그 통로로 걸어 들어가야 되는 사람은 결국 독자다라는 거죠. 스스로.
김=방금 말씀도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중에 제가 따로 질문을 드리려고 했는데, 연결되는 이야기니까 지금 함께 여쭈어볼게요. 제가 <읽는 인간>을 읽으면서 굉장히 좋았던 부분이 우리 사회에 리터러시가 없는 이유로 세 가지를 드셨는데, 그중 ‘질문하지 않는 시험사회’ ‘대화하지 않는 회의사회’ 그리고 마지막으로 ‘책임지지 않는 방임 사회’를 드셨어요. 앞의 두가지는 사실 워낙 많이 나왔던 이야기라서 흘려보낼 수 있는 것인데, 마지막의 ‘책임감’ 얘길 하신 부분에서 머리에 굉장히 큰 느낌표가 떠올랐습니다.
아직 책을 읽어보시지 않은 분들을 위해 짧게 설명하자면, 리터러시가 없는 것에 대해 무조건 교사, 학교 탓만 할 게 아니라 학생(본인)의 책임감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는 부분이었는데요. 결국 읽고 쓰는 것은 누가 한도끝도 없이 떠먹여주고 모든 일에 대신 책임져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해야한다는 것이었죠. 이것이 곧 리터러시의 본질과도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조=맞아요. 그부분이 중요합니다. 뭔가 선택하고 읽는다는 행위는 결국 자기가 하는거거든요. 그런데 마치 우리는 누가 해줘야하는 것처럼 행동하곤 해요. 누가 가르쳐줘야 하고. 그렇게 안해주는 사회는 ‘나쁜’ 사회다 이런식으로. 애들이 학원다니는거 우려 많이하는데, 사실 사교육 자체가 나쁜 건 아니죠. 다만 사교육 안에서 아이들이 굉장히 타인에 의해서 조율되는 삶에 익숙해진다는 것이 정말 문제입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도 굉장히 부유한 나라인데, 거의 모든 계층의 아이들이 이런 삶에 너무 익숙해져있습니다. 학원가면 시간표 작성해주고 다해주죠. 애들은 거기 가서 앉아있기만 하면 돼요. 그런데 뭘 배운다는 것은, 즉 뭘 배우고 알아가고 실천하고 하는건 결국 자기가 해야 하는 거 거든요.
학교가 필요한 이유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스스로 공부하는 법’ 알 수 없으니까 그 습관을 들여주기 위해섭니다. 처음엔 선생님이 도와주고 친구들과 함께 하다가, 나중엔 결국 아이가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자기의 생각, 판단에 대해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법을 익힐 수 있도록 보조해주는 게 학교입니다. 학교가 그런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아이들이 학교보다 학원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학교도 입시 문제 등으로 인해 제대로 이런 ‘스스로 앎’에 대한 배움의 기회를 주지 못하고 있죠.
다만 이런 ‘읽고 쓰는 일에 있어서의 무책임’은 비단 학교 울타리 안의 문제만은 아니예요.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뭔가 읽고 쓰는 ‘일’에 대해 자기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 사회에요. 비난은 많이하죠. ‘왜 저 사람은 저 따위로 읽고 쓰냐’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스스로에 대해서는 얼마나 우리가 스스로 책임지는가. 돌아보고 반성하는가. 가령 쉬운 예로 카톡방에 가면 가짜뉴스 굉장히 많은데, 그거 드러나면 허위정보 만든사람 비난하고 법적 문제 될수도 있죠. 그런데 유포자도 문제예요. 가짜뉴스인지 아닌지 알았든 몰랐든 간에 SNS에서 퍼뜨리는 사람은 아무 책임이 없는건가. 이 사람들도 그 거짓 정보에 일조를 하는 겁니다.
김=요즘은 꼭 나이드신 분들 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젠더 문제 등에 있어서도 대학가에서도 굉장히 심각한 문제라고 우려를 하는데요. 언론사에서도 점차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하고(혹은 아예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거나), 극단적인 커뮤니티에서만 서로 다른 쪽을 보고 있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아예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조=안타깝고 아쉬운 일이죠. 대화가 단절된 사회입니다. 첨예한 이슈에 대해 극단의 포지션을 갖게되면 그걸 웬만해선 안바꾸죠. ‘읽는다’는 행위가 단순히 정보를 취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닌 이유는, 읽는 것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던 생각이 바뀌기 때문인데요. 이런 읽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제가 예전에 한번 지역교육청에 가서 교사들 상대로 강연을 했는데, 어떤 교사분의 경험을 들었어요. 그 지역에서 제일 공부잘하는 아이들만 모이는 특목고의 한 여자선생님이 수업에서 양성평등 관련된 글을 읽혔대요. 공부잘하는 애들만 모아놓은 학교니까 학생들이 정말 똑똑했겠죠. 이 글에서 글쓴이의 주장이 뭐고 근거가 뭐고 등의 분석을 오죽 잘 했겠어요. 그렇게 해서 수업이 잘 진행됐대요. 그런데 그렇게 수업이 잘 끝나고 나서 애들 몇이 찾아와서 선생님한테 물었다는거예요. “그런데 선생님 페미예요? 왜 이런 걸 우리한테 읽혀요?”
지금 우리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읽기가 바로 딱 그런 거예요. ‘글의 중심 내용 뭐지? 요약해. 맞은거야 틀린거야? 이게 정답.’ 이런걸 가르치지만 근본적으로 아이들이 텍스트를 접하고서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은 가르치지 않는 거죠.
이미 이 아이들도 학교 바깥에서 다양한 디지털 공간에서, 너무도 많은 텍스트를 접하고 있는데 학교는 그런 일상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써야하는지 등의 리터러시는 전혀 가르치고 있지 않아요. 유해한 텍스트를 그대로 좋지 않은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고요. 그런데 그런 것들을 학교에서 교육을 못하죠. 학부모들이 가만 있지 않으니까요. 물론 개인적으로, 또 협업하여 그런 시도를 조금씩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만, 일반적인 교실의 현상이랄까요.

김=그래도 그런 텍스트를 학교에서 읽히는 게 필요하죠?
조=당연히 필요하죠. 그런데 그런걸 다루면 교사들이 학부모한테 정치한다고 비난당하거나 징계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특정 내용과 이념, 가치만을 내세우는 극단적인 방식은 위험할 수 있는데, 다만 ‘다양한 관점들이 있다’라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확실히 달라지거든요. 내가 아는것, 내가 믿고 있는것, 직접 내가 경험한 것 이외에 내가 모르는 것, 나의 믿음과 다른 것,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있다. 나와 다른 이들에게도 그들만의 생각, 그들 나름의 관점이 있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달라질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 학교에선 텍스트 읽기를 그냥 하나의 ‘문제풀이’처럼 가르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아이들이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라는 걸 머리로는 알아요. 그냥 그렇게 생각만하고 실제로 자기 삶에선 전혀 적용을 못하는거예요. 어른들도 이건 똑같아요. “사람은 각자 다양하지”라고 해놓고서 그걸 어떻게 서로 이해할 생각은 안하고 각자 다 집단적으로 자기 얘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김=말씀을 듣고 있으니까, 정말 이 양극화된 갈등 사회에선 리터러시가 거의 유일한 희망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리터러시가 결국 타인과 소통할 준비, 자세라고 볼 수 있으니까요.
조=제가 리터러시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면 사람들이 “그래서 리터러시 왜 필요하냐?”라고 묻기도 해요. 내가 굳이 안해도 전문가들이 하고. 법 관련된 건 변호사가 하면 되는데 왜 내가 그런 내용들을 알아야 되냐라고 묻는데, 어쨌든 삶이라는 게 최종판단은 자기가 하는거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선택에 대해 개인에게 무한책임이 있다는 게 아니라 자기 삶에 관한 일들을 최종 판단할땐 적어도 자기가 어느정도 책임감있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정확하게 읽고 분석적으로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필요할 겁니다.
무작정 비난하면서 읽는 게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면서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리터러시죠.
김=학교가 바뀌는 것도 참 힘든 문제일 것 같습니다만, 학교는 적어도 공간이 있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고 그걸 위해 보장된 교과가 있는데. 성인같은 경우는 별도의 교과나 가르치는 사람, 배울 수 있는 시공간적 여유 등이 없어서 더 문제일 것 같긴 합니다. 시민으로서의 리터러시가 중요하다면 성인의 경우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조=사실 성인 대상으로 그러한 체계적인 교육기관이 만들어지긴 어려울거예요. 그리고 누가 또 학교 다니고 싶어하겠어요. 굳이 내가 왜?라는 생각이 들겠죠. 그런 측면에서 저는 성인 대상의 체계적이고 시스템화된 ‘리터러시 교육’보다는, 사회 전반적으로 일종의 시민적 각성, 무엇을 어떻게 읽고 살아가고 있는가 등에 대한 전반적인 사회적 인식이 더 높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소단위 공동체에서 할 수 있는건 꽤 많다고 봐요. 지역에도 도서관 같은 게 있고요. 요새는 동네책방 등에서 책 읽기 모임도 많은데 그런 것들이 대체로 ‘책을 읽는 모임’이렇게 돼있죠. 지식, 교양 위주인데, 그런 책 읽기 모임이 좀 더 확장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책의 내용을 단순히 감상하는 게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 조금 더 깊게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 고민할 수있는 기회가 있다면 좋겠고요.
한편 ‘부모 교육’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부모들의 행동, 리터러시가 아이들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미치거든요. 보통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부모님들은 ‘어떻게 아이들 공부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 애가 글 어떻게하면 잘 읽을 수 있을까요’를 물어보시곤 합니다. 다만 제가 강연에서 계속 강조하는 게 있어요. 부모님부터 잘 읽는 사람이 되고, 리터러시 잘 실천하는 사람이 되면 된다는 것이죠. 예를 들면 매일 SNS에 글을 쓰거나 할 때 한번 더 생각하고 쓰시라고. 한번 멈춰서 내가 뭘 읽고 있는지 생각해보고, 내가 지금 뭘 클릭하고 뭘 퍼트리고있는지 인식하는 것부터 습관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일은 처음엔 어려워요. 지금은 우리가 ‘나에게 스스로 질문’하는 게 힘든 상태죠. 의식적으로 질문하는걸 꾸준히 해나가고 그런것들을, 자동화-습관화된 방식으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디지털 네이티브는 무조건 옳은가?
김=과거 교수님이 피츠버그의 중학교에서 학생들 상대로 역사 리터러시 수업을 진행하셨을 때, 거기서 서로 반 친구들끼리 대화하는 규칙에 대해 설명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그 규칙 중에서도‘정중하게’ ‘적합하게’ 대화하라는 수식어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현실에서 얼굴을 마주보는 대화에서는 가능할 것 같은데, 사실 저희가 앞서 이야기했던 혐오, 극단적 발언 등 대부분이 인터넷 공론장에서의 일이 아닐까 싶거든요. 서로 익명인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공론장에서도 리터러시 있는 대화라는 게 가능할까요?
조=사실 “그것이 가능할까?”라고 물어보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갑자기 하루아침에 지금의 상황이 완전히 바뀌진 않을 겁니다. 다만 굉장히 어두운 정치 상황에서도 하루아침에 사회가 뒤집어지진 않더라도 어떤 작은 움직임이 시작이 되고 확산이 되어서, 아주 조금씩 더 나은 방향으로 사회가 나아갈 수 있잖아요. 그렇듯 소셜미디어 소통도 누군가가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하면 그런 소통이 인터넷에서 가능할 수도 있겠죠. 물론 쉽지 않은 일이긴 합니다. 그 대목에서 ‘정중하게, 예의갖춘’ 대화를 해야한다는 건 사실 말 그대로 ‘비속어 쓰지 말자, 감정 해치지 말자’ 이런 정도의 의미를 넘어섭니다.
김=이건 조금 큰 이야긴 것 같긴 하지만, 어쩌면 인터넷 공간이어서 현실에선 ‘멀쩡한’ 사람이 그렇게 되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조=전혀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가상 공간에서 자기 현실공간 아이덴티티(정체성)가 전혀 노출이 안되거나 전혀 연결 안돼있다고 착각을 많이들 하는데요. 현실 자아와 인터넷 공간에서의 자아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처럼 그렇게 딱 잘라 나뉘지 않아요. 현실의 사람이 ‘사이버 공간이라는 맥락’에서 다른 정체성 만들어가는건데, 그것이 바로 현실 정체성이 투영된 결과이자 그 안의 맥락에 맞게 만들어진 정체성인 것입니다. 현실 정체성의 욕망, 욕구, 정체성, 편견, 편향, 어떤 비합리적인 이성같은 게 나타나는 겁니다. 현실에선 천사고 사이버 공간에선 악마고 그런 것이 아니예요.
김=실제로 오프라인으로도 인터넷 공간에서의 혐오 등이 흘러나오기도 하고요.
조=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디지털 네이티브’라고 해서 그들의 인터넷 공간에서의 경험이나 행동 양식이 모두 ‘찐’이고 ‘옳은’ 게 아니다.
사이버공간에서의 대화는 정말 교육이 많이 필요한데, 현재 20대는 그런 부분에 대한 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예요. 1020는 어려서부터 스마트폰 기계 갖고 살아온 세대인데 학교에서 전혀 그런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워낙 빨리 일어난 변화다보니 현재진행형의 상황이 학교 교과로 들어올 여유가 없었고 세상은 이미 너무 빨리 바뀌어버린 겁니다.

사이버 문화가 ‘있다(be)’고 해서 그 자체로 옳은 게 아니예요. 지금의 사이버 소셜 공간의 문화 앞에서 거기서 우리는 분명하게 질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거야?”
지금 우리의 사이버 공간에서 하고 있는, 많은 부작용을 낳고 있는 문화들이 과연 사이버 문화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있냐는 말이죠. ‘아 디지털 공간에선 원래 그래. 그렇게 하는데야’하면서 사람들이 그저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옹호하려는 측면이 있습니다. 마치 유토피아처럼요. 그런데 중요한 건, 거기에도 모럴이라는 것은 있다는 것입니다. 사이버 시대라고 해서 가상 공간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게 아니예요. 실제로 현실세계 사람들이 연결된 게 가상공간이죠. 이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착각을 하는거죠.
우리가 디지털로 소통, 연애, 일 다 하지만 인간은 현실 세계, 여기 있는 거거든요. 그런 부분들이 간과되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뉴리터러시’ 수업을 하는데요. 인터넷 공간에서 다양한 텍스트를 읽고 쓰고 대화하고 소통하는 방식에 대한 분석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학생들이 생각보다 잘 모르더라구요.
김=본인들이 ‘숨 쉬는 것처럼’ 하는 일들 아닌가요?
조=어디가서 뭘하는 등의 기술적 측면은 너무 잘알아요. 그런데 인터넷 공간에서 근데 읽고 쓰는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정말 잘 모르더라고요. 예를 들면 뭔가 어떤 뉴스, 포스팅을 봤을 때 ‘좀 이상하다. 가짜아냐?’ 이 정도론 판단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왜 문제가 되는거지?’ ‘이걸 어떻게 우리가 바라봐야되는거지?’ 어떤 관점에서 뜯어봐야하는지, 그리고 그 게시물이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피해 혹은 이득이 가는거지 등에 대해서는 잘 안 물어요. 정말 똑똑한 아이들이지만 그런 생각을 진지하게 해본 경험이 부족하죠. 학생들이 수업을 듣고선 되게 재밌어합니다. 늘 하던건데 이렇게 보니까 다르게 보인다고 하면서.
우리가 흔히 디지털 네이티브란 말을 하죠. 분명 지금 학생들이 네이티브죠. 하지만 네이티브가 모든 걸 정당하게, 알맞게 하는 게 아닙니다. 디지털 네이티브들이 기술적으로 탁월하고, 문화적으로 ‘찐’이고, 디지털 공간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발휘하고 그럴 수 있죠. 그러나 그들이 하는 모든 행동들이 합리적인 건 아닙니다. 디지털 네이티브도 (제대로 인터넷 공간을 이용하기 위해선) 배워야 합니다.
저는 예전부터 디지털 리터러시는 디지털 없이 가르칠 수 있다고 자주 이야기를 해요. 리터러시의 근본이라는건 내가 텍스트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의 문제거든요. 어떻게 읽고 이해하고 생산하는가, 즉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 문젠데 그것은 디지털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텍스트의 종류가 다르고, 텍스트 접하는 맥락이 다른 것일 뿐이죠. 텍스트를 받아들이는 속도, 양, 상황 등은 다르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아요.
이런 리터러시의 본질들을 놓치면 디지털 시대의 제대로 된 리터러시를 계발하는 것이 어렵다고 봐요. 무조건 이런 문제가 책을 읽어서 해결된다 이런 얘길 하는게 아니고. 근본적으로 우리 세상이 반영되고 투영되어있는 이 (디지털 공간의 다양한) 텍스트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난 이 텍스트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내가 혐오 발언 올라온 SNS 포스팅 보고서 아무생각없이 클릭하거나 넘기는 것 아니고 그 앞에서 나는 어떤사람인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인의 한줄 문해력 : ‘여성가족부 폐지’와 이대남 사이
김=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혀 없고 자극적인 ‘짧은’ ‘사이다’ 주장들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소통하기 위한 말이라기보다는, 서로 공격하고 혐오하기 위한 말에 가깝달까요. 이는 꼭 대중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인들이 나서서 선동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조=지난 대선에서 한 후보가 ‘여성가족부 폐지’ 일곱자를 페북에 올렸잖아요. 저는 그걸 보고 “정치인의 한줄 문해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근거나 논리 없이, 굉장히 자극적인 방식으로 선동하는 형태의 문제적 텍스트입니다. 그런데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런 명백한 발언에 끌려요. ‘명쾌하네. 좋네. 쿨하네’ 이렇게요.
정치인의 한줄 발언은 무례한 대화 방식입니다. 대화를 할 때 ‘예의있게, 정중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에티켓이나 존칭 얘기보다도 어떤 얘길 할땐 거기에 합당한 근거, 이유 들어 얘기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이예요. 때로 상사가 일을 막무가내로 시킬때 무례, 부당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합당한 이유 근거가 없기 때문이거든요.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어요. 근거가 희박하거나 자기 주장의 근거 자체를 아예 제공하지 않으려는 무책임하고 무례한 태도,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치인의 태도로서는 문제적입니다.

김=정치인이 안좋은 시그널을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조=굉장히 안좋은 시그널이죠. 미국이 트럼프 대통령 되면서 굉장히 폭력적이고 혐오적인 사회가 되었는데요.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그렇게 하는데 나라고 못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그럴 거 같지만 마찬가집니다. 이건 특정 정당 지지의 문제가 아니고, 리터러시 관점에서 봤을때 대단히 무례하고 리더가 해서는 안되는 방식의 소통입니다. 한줄 정도의 깊이. 한줄 정도의 이해. 한줄 정도의 시선을 끌고. 한줄 정도의 가치와 한줄 정도의 고민을 가지고서.
이제 우리는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그 사회를 바꿀 것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불확정성uncertainty 사회-뭐가 합리적인지, 타당한지 판별하기 어려운- 사회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그 불확정성을 어떻게 조정해갈 수 있을 것인가? 저는 일반 시민들이 그걸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정치인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읽고 쓰는지를 시민들이 보여줘야 되는 거죠.
하지만 그런 비판을 하기 싫은 사람들은 점차 정치 무관심자(무비판자acritical)가 되어가고 있어요. 피곤하거든요. 나한테 도움도 안되고 싸움만 나니까. 그러니까 결과적으론 ‘관심 있는’ 사람들끼리만 남아서 싸우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런 분들은 대화를 하기 위한 리터러시가 부족하거나, 이념과 지향이라는 치우친 ‘콘텐츠’만 있죠. 자신의 이념을 표현하고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리터러시의 방법론(methodology)이 없는 것이예요. 그래서 결과적으론 대화의 상황이 한층 척박해지고 ‘한줄 발언’만이 통하고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김=‘한줄 혐오’가 넘쳐나는 사회에서 대화만이 거의 유일한 희망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대화의 현실적인 가능성에 대해선 약간 의문이 있는데요. 예전에 혐오 관련 회차에서 한 독자분이 이런 피드백을 주신 적이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프다. 이렇게 글을 읽고 우리끼리는 공감해도, 당장 인터넷 커뮤니티에만 가봐도 한줄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사람들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라고 생각하면 힘이 빠지고 막막하다’고요. 만약 제가 아무리 제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어도 상대가 항상 귀를 막고 있다면 아예 대화가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즉 요약하자면, 리터러시가 있는 사람이 아무리 늘어난다고 해도 그들이 리터러시가 없는 사람들을 바꿀 수 있을까, 그들과 대화를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입니다.
조=사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대화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방법으로 경험하지 않는 이상 사람이 바뀌지는 않기 때문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소박한 인류애를 발휘해라’라는 식으로 말하곤 하는데, 물론 이상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통해 바뀔 수 있는 부분은 분명히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 가지고 그 만한 행동을 하게 된 것엔 반드시 자기 나름의 사정이 있거든요. 자기만의 특정한 경험이 있고 그런 이야기가 가치 있고, 그런 생각이 자신의 삶에 전략적으로 도움이 된다는 판단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기서 ‘저 사람 왜 저래?’라고 화를 내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안되는 겁니다. 나도 화만 더 나고, 더 갈등이 생기고요. 그러니까 상대의 그런 생각과 주장들을 분석해줄 수 있는 능력들이 필요한거죠. 나 스스로 상대와 그들의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기제, 내가 그들을 이해하는 방식이겠죠. 일단은 이해가 돼야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찾아갈 수 있으니까요.
또한 학교 교육도 현실의 삶과 연결된 교육이어야겠죠. 보통 우리가 학교 교과과정에서 읽는 글들이라는게 학교 바깥에서는 절대 안읽을 것 같은 글들인데요, 물론 고전 읽기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일상에서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텍스트들을 학교 안에서 보면서, 리터러시 연습을 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책 제목(<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에서 리터러시를 경험하라고 했는데, 전 리터러시는 경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해보지 않으면 정말 몰라요. 어 읽었더니 이렇게 되네 왜 안되지? 하면서 직접 자기가 경험을 해봐야된다는 거죠. 그 경험을 도와주는게 시민교육하는 사람, 멘토, 친구입니다.
김=어떤 식으로 그런 ‘경험’을 해볼 수 있을까요?
조=저는 불편하더라도 불편한 텍스트를 읽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도저히 화가 나고 무슨 소리하는지 뻔히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논리들은 무엇일까에 대한 것들을 따져보는 것이죠.
스스로 우리가 아주 많은 논리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우리 논리도 굉장히 얄팍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글에서 허점을 찾기 위해 빨간펜을 들고 읽는 게 아니라, 해당 글이 나와는 다른 관점의 주장이더라도 최대한 깊게, 분석적으로 읽어보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상대를 깊이 이해하려고 하면, 그것들이 결과적으론 나를 이해하는데도 상당히 도움이 돼요.
저는 리터러시가 궁극적으로는 자기를 이해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람들이 사실은 살면서 그렇게 크게 바뀌지 않아요. 각자가 살아온 경험이 별로 안바뀌기 때문이죠. 적극적으로 스스로 외부로 나아가지 않는이상 거의 비슷한 바운더리에서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 만나 일천한 경험을 가지고 살 수밖에 밖에 없는데요. 그런 경험들을 넓혀가기 위해 좋은 것은, 읽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모든 걸 다경험할 수는 없잖아요. 뉴스레터의 경우에도 나와 다른 것을 접하고, 아 내가 몰랐던 세상이 있구나 이런 것을 알게 되고 어떤 부분에선 좀 더 자세히 들어가서 읽어보고 하는 과정에서 이해의 경험이 시작되는 것이죠.
김=아무 텍스트 없이 독방같은 곳에서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과, 어떤 텍스트를 기반으로 읽으면서 생각하는 것은 확실히 다를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90년대 미국 정치 상황에 대한 글이 나와 전혀 동떨어져있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 시공간이라는 맥락에서 그 텍스트를 읽는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가며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조=그렇죠. 왜냐면 책을 읽는 과정은 책의 정보를 머릿속으로 단순히 스캐닝해서 밀어 넣는 과정이 아닙니다. 능동적인 독자는 텍스트를 읽을 때 반드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활용합니다. 내가 책과 글을 읽는 순간. 나의 경험과 지식이 거기에 끌려 들어가는 것이죠. ‘나라면 저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는데’ ‘난 한번도 못 겪어봤는데’ 등과 같은 생각이지요.
텍스트를 읽는 것이 단순히 정보를 얻는 게 아니라 결국 나에 대한 성찰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서 바뀌는 겁니다. 내가 읽는 것도, 내가 읽는 방법도, 그리고 나도 우리도.
■맺음말
비단 ‘리터러시’라는 낯선 개념에 대한 이해를 넘어, 이 시대의 중요한 화두들에 대해 두루 영감이 되는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던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교수님이 독서에 대해 하셨던 말씀이 굉장히 마음에 남았습니다. 아래 조금 정리해서 옮겨봅니다.
“아기들은 책이 신기해요. 아기들을 보세요. 글씨도 잘 모르는 아기가 옹알옹알하면서 책을 너무 즐겁게 넘겨 봐요. 책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아주 신기한 물건이예요. 예를 들어 이 머그컵을 보면 그냥 ‘컵이구나’하고 마는데, 무슨 글씨가 막 그려져있는 책은 엄마가 들고 펼쳐 볼 때마다 ‘우물우물’ ‘중얼중얼’하는 거예요. 아기들은 그게 너무 신기하죠.
제게는 본질적인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어릴 땐 책을 이렇게 즐겁게 읽었는데, 어떻게 우리가 자라면서 책을 싫어하게 되었을까? 이건 결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공동체가, 학교가 수십년간 꾸준히 책은 재미없는 거라고 꾸준히 가르친 결과예요.”
종이책 뿐 아니라 많은 텍스트들이 그렇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그림과 글, 영상은 단순한 데이터 이상으로 우리 사회의 단면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잘 읽어내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 안에서 깊은 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몰랐던 것을 아는 재미를 빼놓을 순 없겠죠.
마지막으로 제가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오늘의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가 ‘실제로’ 리터러시를 습관화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에 대해서 여쭈어보았는데요.
주체적인 읽기를 위한 세 가지 좋은 팁이 있습니다. 잘라서 책상 앞에 붙여두거나 책장 근처에 옮겨 적어서 붙여두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를 정리해서 말씀드리는 것으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부록. 리터러시를 위한 읽기의 3가지 팁 by.조병영 교수]]
1)‘비포’와 ‘애프터’를 적어보자(배움을 위한 능동적 읽기)
어떤 책이나 텍스트를 읽기 전에 내가 그것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배경지식이나 나의 생각 등(내가 예전에 이 주제에 대해 어떤 글을 읽어봤나? 무슨 말 들어봤지?)을 미리 적어보고, 읽은 뒤의 감상을 다시 적은 뒤 둘을 비교해보세요. 생각보다 꽤 큰 차이가 난답니다. 적극적으로 읽는 것이 곧 나를 바꾸는 과정이라고 할 때, 스스로의 의식 변화 과정을 실험해보는 것이죠.
예를 들어 저는 수업 첫 시간에 ‘리터러시’에 대해 몇가지 질문을 주고 OX를 하게 한 뒤, 한 학기 수업이 끝나고 똑같은 질문에 대해 OX를 하게 하는데요. 대부분의 응답이 바뀌니까 학생들이 굉장히 놀랍니다. 이렇게 스스로가 바뀌는 것을 경험하고 의식할 때 그 지식은 오래갈 수 있지요. 이 질문법은 주로 책처럼 완결성이 높은 텍스트를 읽을 때 도움이 되는 방법입니다.
2)있는 목소리, 없는 목소리를 살펴보자(다양성을 위한 비판적 읽기)
글을 읽을 때 던질 수 있는 두가지 질문입니다. 첫째, “이 글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둘째, “이 글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첫째의 경우 어떤 사람의 목소리일 수도 있고, 단체나 집단의 주장일 수도 있지요. 보수 신문에선 우파의 목소리가 들리는 식으로요. 그런 목소리를 파악하며 읽어보고요. 둘째는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배제되어있는가를 살펴보는 겁니다. 예를 들어 ‘이대남 관련 칼럼’에서 과연 여기서 말하는 이대남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어디있지? 그리고 이대녀의 목소리는 어디있지? 등을 의식적으로 궁리하고 살펴보는 거예요.
우리가 학교에서 주로 어떤 텍스트의 ‘핵심 주장’을 파악하는 연습을 하지만, 그만큼 ‘텍스트가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목소리를 찾는 연습이 중요하거든요. 치우침 없이 텍스트를 읽기 위한 비판적 질문입니다.
3)연필을 꽂아두고 읽자(텍스트의 쓸모를 궁리하기)
읽는 것은 읽는 걸로 끝나지 않아요. 그걸로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소통도 하고, 싸우고, 투표도 하죠. “나는 이 텍스트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면 글을 능동적으로 읽게 됩니다. 저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심지어 소설을 읽을 때도 연필을 책에 꽂아두고 읽는데요. 언제든 밑줄을 긋거나 메모할 준비가 되어있는거죠. 보통 쓸모라고 하면 굉장히 실용적인 것만 생각하는데, 하다못해 “이 이야기가 재밌다. 친구에게 얘기해줘야겠네!”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엄연한 ‘쓸모’입니다. 텍스트를 읽으면서 텍스트의 바깥 - 삶을 생각한다는거죠.
결국 우리가 뭔갈 읽는 것도 ‘잘 살기’ 위해선데, 텍스트가 어떤 방식이든 나의 생각이나 일, 관계 형성 등에 쓸모가 있어야 하거든요. 그걸로 돈을 버는 게 쓸모가 아니라 내게 어떤 가치를 가져다주는가에 대한 것이죠.
김지원 기자 deepdeep@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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