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이토록 쓸쓸한 추앙사회

전수진 입력 2022. 5. 25. 00:20 수정 2022. 5. 25.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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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이달의 단어를 꼽는다면 단연 ‘추앙(推仰)’ 아닐는지. 사전적 정의는 “높이 받들어 우러러보다”인 이 동사가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다음 명대사 때문에 난리다.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 ‘추앙’이란 동사가 쓸쓸한 건 혼자만의 느낌일지. 추앙이라는 행위는 거리감을 전제로 해서다. 추앙을 하고 받는 존재는 서로 높낮이가 다르다. 나보다 높은 곳에 있는 이를 낮은 곳에서 올려다보는 것이니까. 상대를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고야 말겠다는 뜨거운 치열함보다 온도가 낮다. 나는 아래에, 그는 위에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미지근한 체념도 한 스푼 녹아있다.

당신들의 해방을 빕니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중 한 장면. [사진 스튜디오피닉스·초록뱀미디어·SLL]

그런데, 이 쓸쓸함이 기분 나쁜 것만은 아니다. 외려 차분해서 산뜻하기도 하다. 이 드라마가 한국 대중문화 역사상 특수한 지점을 확보하는 게 이 산뜻함 아닐까. 운명의 상대를 만나 출생의 비밀을 극복하고, 미안해도 사랑하며, 결혼에 골인하지만 시한부로 눈물바다가 되던, 뜨겁기만 하던 콘텐트와 이 드라마는 다른 문법을 내민다. 이 다른 문법은 달라진 한국 사회, 흔히들 ‘MZ’라고 편하게 칭하는 이들의 달라진 감성 그 자체다. 고도 경제성장과 격동의 민주화를 일궈냈음에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는 세대의 후예로 어쩌다 태어난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대사들이 차고 넘친다. 사내 동호회 가입 권유에 “못 하겠어요, 힘들어요”라거나,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라는 대사가 그렇다. 옛 애인 대출금을 갚느라 곧 만기인 본인 적금을 깨는 주인공에게 은행 직원이 “힘내세요”라는 장면의 연출된 이물감은 또 어떤지. “힘내세요”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위로랍시고 한다면 당신은 꼰대다. 왜냐고 물으신다면, 국민 캐릭터 펭수의 답을 빌려온다. “힘이 안 나는데 어떻게 힘을 내요?” 이게 요즘 세대의 ‘찐’ 현실이다. 굳이 조언도 위로도 하지 말 것. 그게 매일의 삶이 ‘소몰이’처럼 힘들다는 지금 세대, 아니, 한국 사회 모두를 위한 위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설가 김영하가 최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렇게 말했다. “절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본인 모토를 설명하면서다. “매일 최선을 다하다가 (중략) 아프면 회복할 수 없다. (중략) 오늘 100을 할 수 있으면 70만 하자.” 한때 “이게 최선입니까?”를 외쳤던 한국사회, 많이 달라졌다. 작품의 깊이가 남다른 젊은 작가 최은영 소설가의 신작 제목은 『애쓰지 않아도』다. 혀를 끌끌 차는 대신,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내일도 소몰이하느라 애쓸 당신, 아니 우리 모두를, 추앙합니다.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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