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심리학(15) 우리에겐 정말 대화가 필요해
-소통 가족과 불통 가족의 차이
이호선의 <가족의 심리학> (15) 우리에겐 정말 대화가 필요해
[정신의학신문: 서대문 봄 정신건강의학과 이호선 정신과 전문의]
2022년 1월부터 2월까지 서울 정동극장에서 막을 올렸던 연극 한 편이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제목은 ‘가족이란 이름의 부족’이다. 구성원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대단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언어에 집착하는 학술 비평가이고, 어머니 베스는 추리소설 작가이며, 형 다니엘은 언어를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고, 누나 루스는 오페라 가수 지망생이다. 반면 막내 빌리는 선천적 청각장애인이고 그가 사랑에 빠진 여인 실비아는 청력을 잃어가는 수화 통역사다. 가족 모두 언어를 다루거나 언어와 관련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나누는 대화는 가장 비언어적이다. 가족들이 빌리의 언어인 수화를 배우지 않는 것도 아이로니컬한 일이다. 크리스토퍼는 폐쇄적인 지식인이다. 자기 생각이 무조건 옳다고 강요하며 독설도 거침없이 내뱉는다. 가정을 지배하는 추장 같다.
1막에는 식탁이 등장한다. 가족이 모여 대화를 나눈다. 대화의 장이 펼쳐졌지만, 오가는 건 무수한 말뿐이다. 서로를 찌르는 가시 돋친 말들이다. 경청은 없다. 이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불편하다. 편안함이 사라진 식탁에는 살벌함만 감돌기 때문이다. 대화는 점점 논쟁의 늪 속으로 빨려든다. 누구는 빠져나오려 애를 쓰고 누구는 더 끌어들이려 용을 쓴다. 가족의 대화에 낄 수 없는 빌리는 철저하게 소외된다. 가족 간 언어의 장벽은 한없이 높다.
2막에서는 소수자였던 빌리가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이제 자신에게는 가족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보청기를 뺀다. 순간 가족의 목소리가 줄어들면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난다. 빌리는 가족이 아닌 실비아와의 사랑을 통해 언어를 회복하고 소외를 극복했다. 빌리는 가족에게 수화를 사용하라고 하면서 수화로만 말한다. 언어의 바깥에 있던 사람이 언어의 안쪽으로 들어오고, 언어의 안쪽에 있던 사람이 언어의 바깥으로 나가는 반전이 이루어진다.
영국 작가 니나 레인이 쓴 이 작품은 2010년 영국에서 초연이 이루어졌다. 그녀는 청각장애인 부부의 삶을 다룬 한 다큐멘터리에서 이들 부부가 “곧 태어날 아이가 청각장애인이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서 가족이란 그 구성원들의 믿음과 문화와 언어를 그대로 전수하고 공유하고자 하는 하나의 부족이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소속감을 주면서 규칙을 따를 수밖에 없는 가장 작은 단위의 부족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소통 부재의 가족을 부족이라는 집단적 특성에 투영시켜 우리가 정말 상대방 말을 듣고 있는지, 내가 사용하는 언어가 소통의 언어인지 불통의 언어인지, 진정한 소통이란 대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많은 사람이 가족끼리 더 자주 대화를 나누고 서로 이해하며 긴밀히 소통하기를 원한다.
“우리 가족에겐 정말 대화가 필요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가족은 너무 대화가 잘돼서 대화 시간을 더 늘릴 필요가 없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화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내용, 즉 질이 문제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 사이에 원활한 대화가 이루어지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상담과 치료를 위해 정신건강의학과를 방문하는 사람 중에는 가족 간에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얼굴만 봐도 분노가 치밀거나 아예 대화의 담을 쌓은 채 우울증, 무기력증, 불면증 등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 그 반대의 경우로 전문의를 찾는 사람은 거의 본 적이 없다.
가족 구성원 사이의 소통이 왜 이렇게 힘든 걸까?
너무 편하고 가까운 사이다 보니 상대방이 나를 먼저 이해해주고 내 말을 들어주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부모니까 무슨 말을 해도 받아주겠지, 내 자식이니까 아무 말이나 해도 이해하겠지, 남편이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속내를 들여다보겠지, 아내니까 내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겠지, 이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해이고 착각이다. 이것은 소통이 아니라 소통 장애(Communicative Noise)를 일으킨다.
가족은 부족이 아니다. 부족에는 위계질서가 있다. 족장 이하 서열에 따라 역할이 부여된다. 이것이 유지되어야 부족이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은 수평적 관계여야 한다. 부모와 자녀, 남편과 아내, 형제자매 사이에 질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수평적 관계 속의 질서다. 명령과 복종이 수반되는 수직적 질서가 아니다. 같은 위치에서 눈과 마음의 높이를 수평적으로 맞춘 다음 대화해야 한다. 부족의 대화와 가족의 대화가 다른 점은 이것이다.
공감(Empathy)은 다른 사람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해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거나 그렇게 느끼는 기분을 의미한다.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다. 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봐야 진정한 공감이 이루어질 수 있다. ‘함께 느끼고 함께 아파한다.’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한다.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공감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대방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눈과 마음의 높이를 맞출 수가 있다.
어떻게 하면 공감할 수 있는 능력, 즉 공감력을 높이거나 키울 수 있을까?
가족 치료의 어머니로 불리는 미국의 심리학자 버지니아 사티어는 가족을 치료할 수 있다면 세계를 치료할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의 닮은 점 위에서 어울리고, 서로의 다른 점 위에서 성장한다.”
자신과 타인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공감의 출발이라는 이야기다. ‘나와 다르네?’ 하고 배척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은 저렇구나.’ 하면서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공감의 시작이다. 가족 간에도 똑같다. 피를 나눈 관계이자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라 해도 나와 타인은 다르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닮은 점이 발견되면 공감하면서 더 잘 어울리고, 다른 점이 발견되면 그걸 받아들이고 공감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내가 성장한다.
위 연극에는 두 가족이 소개된다. 빌리의 가족과 실비아의 가족이다.
빌리의 가족은 전형적인 불통 가족이다. 모두가 많이 배운 지식인들이지만, 모이면 자기 말만 할 뿐이다. 이들은 자신의 언어로만 소통하려 하고 나를 이해하려면 상대방이 내 언어 체계로 들어오라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나만 알아달라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가족이다.
아버지 크리스토퍼는 막내아들 빌리가 청각장애인인데도 불구하고 소수자로 키우기 싫다는 이유로 장애인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아들보다는 자신의 체면과 사회적 이목을 먼저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수화를 배워 아들과 소통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아들에게 독순술을 가르쳐 자신의 말을 이해시키려 했다.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다.
자각을 통해 강요된 침묵을 깨뜨린 빌리가 수화로 외친다.
“우리 가족보다 실비아의 가족이 더 진짜 같아요. 집을 떠나겠어요.”
그러자 어머니 베스가 말한다.
“널 이해해.”
그 순간 자막에는 “널 이해 못 하겠어.”라는 글자가 새겨진다. 이들 가족의 대화법이자 드러난 언어와 마음속에 숨겨진 언어 사이의 불일치다. 가족의 대화는 매번 이런 식이다.
언어를 주제로 논문을 쓰는 형 다니엘은 이렇게 말한다.
“이 집에서 자식들에게 주는 건 가학적인 사랑뿐이지.”
오페라 가수 지망생인 누나 루스 또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가족을 위해 귀찮은 일은 절대 안 해. 우린 다 이기적인 자아도취자들이 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