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간 지킨 약속, 송나라 귀신 된 신하들

중국 송나라 때를 배경으로 한 소설 〈수호지〉에는 특이한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그 이름은 시진. 양산박의 지도자가 되는 송강 등 호걸들이 시진에게 신세를 지는데, 이는 범죄자가 그의 저택에 숨어도 관리들이 감히 쳐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야. 시씨 가문은 송나라 태조가 “반역의 죄가 아닌 한 죄를 묻지 않는다”라는 단서철권(丹書鐵券)을 부여한 집안이었거든.
한국에서 인기 높았던 타이완 드라마 〈판관 포청천〉에서 포청천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법대로 처벌하며 정의를 구현하기로 유명했지. 그조차 살인과 강간을 일삼는 시씨 가문의 악당을 처벌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이야기가 나와. 위에 말한 시씨 집안의 특권 때문이야. 대관절 이 가문은 어떻게 이런 대우를 받은 것일까.
시씨 가문은 송나라 이전의 5대10국 시대에 후주(後周) 황실의 후예였어. 후주 왕조에서 어린 황제 시종훈이 즉위하자 휘하의 절도사였던 조광윤은 반란을 일으켜 어린 황제로부터 황제 자리를 양보(선양)받아 제위에 오른다. 960년 송(宋) 왕조의 시작이지.
중국 역사에서 자기 자리를 빼앗긴 황제의 여생이 다복했던 예는 극히 드물다. 그런데 송 태조 조광윤은 이 전례를 뛰어넘는 조치를 취한다. 그는 후대 황제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사항을 돌에 새겨 궁중 깊숙이 두었어. 이른바 ‘석각유훈(石刻遺訓)’. 이 유훈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후주의 황족이었던 시씨에 대한 보복을 금지하고 항상 우대하라. 그리고 신하들의 충언을 유심히 듣고, 설령 황제의 뜻과 다르다고 함부로 벌하고 죽이지 말라.” 이 원칙하에서 후주의 황족 시씨들은 안전하면서도 긍지에 넘치는 세월을 보낼 수 있었던 거야.
선비를 우대하고 황제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함부로 처벌하지 말라는 유훈도 꽤 충실히 지켜졌어. 당나라가 각 지방의 병권을 쥔 절도사들의 발호로 망했고, 송나라를 세우기 전에 조광윤 자신이 후주의 절도사였던 만큼 조광윤은 무관들을 견제하고 과거제도를 통해 선발된 사대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문치주의를 확립했다. 이는 송나라 역사 내내 이어졌지. 사대부를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도 나름 잘 지켜졌다. 중국 왕조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피비린내 나는 숙청은 송나라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어. 개혁 정치가 왕안석이 ‘신법(新法)’을 실시하며 개혁 드라이브를 걸고, 신법당과 구법당이 격렬한 권력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도 좌천되거나 벼슬에서 밀려났을 뿐 목숨까지 빼앗기는 사태는 드물었으니까.
물론 부작용도 컸다. 문치주의를 표방한 송나라는 그만큼 국방력이 약화돼 이웃 나라에 막대한 공물을 바치며 평화를 구걸하는 일이 잦았어. 끝내 금나라에 북중국을 빼앗기고 황제가 사로잡혀 끌려가는 일(정강의 변)도 겪게 돼. 이후 송나라는 양쯔강 이남으로 밀려나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역사에서 ‘남송’이라 부르는 나라가 이곳이지. 이 난리판에서 눈에 띄는 장면 하나. 황제가 금나라에 잡혀 만주로 끌려가는 아수라장에서도 시씨 가문만은 살뜰히 챙겨 피신하도록 도왔다는 것.
몽골과 마지막 승부를 벌인 ‘애산 전투’
머지않아 남송은 금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적수와 맞닥뜨리게 된다. 바로 몽골제국(원나라)이었지. 바그다드에서 고려까지 세계를 휩쓴 몽골은 남송을 향해 쏟아져 내려온다. 남송과 몽골의 전쟁은 1235년부터 1279년까지 무려 44년 동안 벌어진다. 세계 최강의 몽골 기병대 등을 남송은 놀라운 저력으로 버텨낸다. 하지만 대세는 점차 기울고 있었지.
1276년 원나라 군대는 마침내 남송의 수도 임안에 육박했고 어린 황제(공제)는 항복했어. 송나라 충신들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고 어린 황족들과 함께 몸을 피한다. 그러나 부랴부랴 세운 어린 황제(단종)가 피난 생활의 고초를 견디지 못하고 죽자 사람들은 절망에 빠진다. 이때 재상 육수부는 이렇게 외치며 용기를 북돋지. “옛 사람들은 일여(一旅·약 500명) 일성(一成·사방 10리의 땅)만 있으면 중흥에 성공했다. 문무백관이 있고 사졸들이 수만 명인데 이게 어찌 나라가 아니겠는가.” 1278년 4월 송나라의 충신들은 일곱 살 난 조병을 황제로 모시고 오늘날 마카오 근처에 있는 애산이라는 곳에 집결한다. 이 애산 전투를 앞두고 매우 감동적인 역사적 장면이 벌어지지. 대대로 송나라 황실의 보호를 받았던 시씨 가문 사람들이 이 절망적인 전투에 참여하고자 모여든 거야. “송나라 300년의 은혜를 갚겠습니다.”
남송 의병들의 의기는 드높았지만 전세가 기울어진 싸움이었지. 구름처럼 몰려드는 원나라 함대 앞에서 남송의 저항군들은 전 함대에 진흙을 뒤집어씌우고 서로를 꽁꽁 묶는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에서 방통이 화공(火攻)을 성공시키기 위해 조조를 꼬드겨 함대를 서로 얽어매게 만든, 이른바 연환계(連環計)처럼 말이야. 그렇게 배를 묶는다는 것은 거대한 불쏘시개를 만드는 격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누구도 몸을 빼서 도망갈 수 없다는 뜻이었어. 배에 바른 진흙은 불화살을 조금이라도 막아 저항의 시간을 늘리려는 용도였지. 그야말로 결사의 각오였다.
마침내 원나라 군대가 공격을 개시하고 불꽃같은 전투가 벌어졌다. 남송의 최고위층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혼연일치가 돼 싸우는 가운데 남송의 마지막 황제 역시 배 위에 있었다. 곧 마지막 재상으로 기록될 육수부는 관복을 갖춰 입고 황제에게 유교 경전 강의를 했다고 해. 원나라 군이 황제를 포위하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육수부는 어린 황제를 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애산에 모인 남송의 황족, 귀족, 시씨 가문 사람들, 그리고 몽골의 지배를 거부한 군인과 백성들은 꿋꿋하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한다. 전투가 끝난 뒤 물에 떠오른 시신만 10만여 구였다고 전해지지. 세계 역사에 수많은 승리와 패배가 있었지만 애산 전투만큼 장렬한 종말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사대부들이 최후까지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은 송 황실이 300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으며 송대 문관 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 그 자체였다 (〈중국 과거 문화사〉 진정 지음).”
후세 사람들은 “살아서 송나라의 신하였으니 죽어서는 송나라의 귀신이 되겠다(송나라 장군 범천순)”라고 외치며 싸웠던 송나라 사람들의 일편단심, 그리고 애산에서의 최후를 기린다. 하지만 아빠는 그들의 충성심보다 몰락하는 송나라가 어떻게 그리 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의기를 끌어 모을 수 있었는지에 더 관심이 간다. 동서고금 어디에서건 권력을 둘러싼 역사는 배신과 음모로 넘쳐나지. 철석같았던 다짐이 종잇장만도 못하게 산산이 찢겨 흩어지는 일 역시 예사로 일어났다. 하지만 장장 300여 년간 절대 권력의 황실이 조상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켜낸 나라였기에, 죽으니 사니 해도 이것만은 지키겠다는 다짐을 유지한 나라였기에, 송나라의 충신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항전으로 송나라가 보여준 신뢰에 응답했던 것이 아닐까. 문득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정부가 “이것만은 지키겠다”라고 내밀었던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그 약속은 얼마나 성실히 지켜졌을까. 그리고 우리는 얼마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을까.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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