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한 장처럼' 이해인 "사랑은 기쁨보다 슬픔 속에 은밀히 숨어 있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이제 사랑할 시간도, 기도할 시간도 많이 남아 있지 않구나. 막 우울해지려고 하는 찰라, 갑자기 창밖에서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 기쁘게 살아있다, 고.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오늘 하루 더 많이 사랑해야겠다. 그는 손으로 베일을 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오랜만에/ 거울 앞에 서니// 마음은 아직/ 열일곱 살인데/ 얼굴엔 주름 가득한/ 70대의 한 수녀가 서 있네// 머리를 빗질하다 보니/ 평생 무거운 수건 속에/ 감추어져 살아온/ 검은 머리카락도/ 하얗게 변해서/ 떨어지며 하는 말/ 이젠 정말/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아요/ 기도할 시간이 길지 않아요// 나도 이미/ 알고 있다고/ 깨우쳐주어 고맙다고/ 웃으며 대답한다// 오늘도 이렇게/ 기쁘게 살아 있다고/ 창밖에는 새들이/ 명랑하게/ 노래를 하고!/ 나를 부르고!”(「거울 앞에서」 전문)
여전히 마음이 젊고 꿈과 열정도 많지만, 그럼에도 현실적으로 다가온 노년의 심신과 상태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조곤조곤한 설명이다.
“머리 수건이 비뚤어지면 안 되니까 거울 앞에서 머리 수건을 쓰지요. 70대에 들어서면서 흰머리가 난 제 모습이 보일 때, 인생을 정말 오래 살았구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 마음은 아직 젊은데, 현실적으로 노년을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많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시인이자 수녀인 이해인 작가가 「거울 앞에서」를 여는 시로 해서 시와 편지글을 모은 책 『꽃잎 한 장처럼』(샘터)를 최근 펴냈다. 책에는 새로 쓴 시들과 최근 2년여 일간지 등에 실린 시 편지글, 기념시와 일기 등이 담겼다. 올해 희수인 만 77세를 맞는 이 작가는 책 제목처럼 온기와 향기를 품은 글들로 힘든 이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보낸다.
그의 시는 1980년대 이후 수십 년간 남녀노소나 지식수준, 직업 등과 상관없이 수많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아왔고, 교과서에도 적지 않은 시가 수록됐다. 그의 시에 대해, 문학평론가 권영민 서울대 교수는 해설 「이해인의 시세계」에서 “고통의 시대를 살았던 모든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새로운 삶에의 의지를 심어주면서 엄청나게 많은 독자들을 끌어 모으게 된다”고 평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대중의 사랑받아온 이해인 작가의 시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그와 그의 시들은 왜 대중에게 사랑을 받을 수 있었으며, 시 창작 비밀은 무엇일까. 이 작가를 지난달 25일 줌 인터뷰로 만났다. 인터뷰 내내 그는 열정적으로 시와 인생을 이야기했고, 끝난 뒤에는 카카오톡으로 미흡한 내용이나 자료를 보내주기도 했다. 그의 친절과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이번 책에 실린 신작시에는 코로나 팬데믹의 시대상이 깊이 새겨져 있다. 먼저 시 「비 내리는 날」은 힘없고 가난한 자들이 더욱 힘든 코로나 시대의 수도자 마음가짐을 잘 보여준다.
“떨어지는 빗줄기/ 기도로 스며들고/ 빗방울은 통통 튀는/ 노래로 살아오니// 힘든 사람부터/ 사랑해야겠다/ 우는 사람부터/ 달래야겠다//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 어디서나/ 메마름을 적시는/ 비가 되어야겠다/ 아니 죽어서도/ 한줄기 비가 되어야겠다”(「비 오는 날의 연가」 부문)

“코로나 시대를 살면서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닫게 됐고, 수도자로서 힘든 사람부터 사랑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도 많으니까, 메마름을 적시는 비처럼, 정말 힘든 사람부터 사랑해야겠다고 다짐을 하는 것이죠. 비는 목마름을 축여주는 하나의 상징이니까요. 마더 테레사도 하느님은 인간의 사랑을 목말라 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을 목말라 한다며 목마르다는 단어를 많이 썼고요.”
팬데믹으로 당연하게 생각한 일상이 무너지고 나서야 감사를 배우게 된 현대인들의 성찰이나 반성을 담고 있는 시 「코로나19의 선물」도 공감과 공명을 부른다.
“코로나19로/ 지극히 평범하고도/ 당연했던 일상이/ 무너지고서야/ 우리는 조금씩/ 감사를 배우기 시작했지/ 너무 가까이 있어/ 그만큼 무심했던/ 가족들의 얼굴과 마음도/ 다시 들여다보고/ 마당에 핀 이름 없는 들꽃과/ 길가의 나무들에게도/ 인사할 줄 아는/ 시인이 되었지// 날마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 두기를 실습하면서/ 우리는 새롭게/ 인내와 절제를 배우는/ 커다란 인생 학교의/ 수련생이 되었네/ 작은 것도 나누고/ 서로를 위로하며/ 예전의 당연했던 일상을/ 함께 그리워하는/ 비범한 눈빛의/ 도반들이 되었네”(「코로나19의 선물」 부문)
―저도 그렇고, 많은 이들이 시처럼 절감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옛날에 당연한 것들이 이제 당연하지 않게 됐어요. 사소하고 평범한 것에 대한 감사하고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그런 의미에서 선물이라고 표현을 한 거죠. 마스크를 쓰고 살면서 가까운 사람들의 어떤 소중함, 주변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누구도 깨우쳐주지 못하는 것을 코로나가 강력 요법으로 한방 먹인 거 같습니다. 인간들이 말을 안 들으니까요.(웃음)”
물론 오랫동안 가톨릭 수녀의 길을 걷고 있는 작가는 시 곳곳에서 수도자로서의 생명에 대한 사랑과 위로, 자기 성찰을 담고 있다. 신작시는 아니지만, 시 편지글에 담긴 시 「나무의 사랑법」에선 수녀들을 한 그루의 나무로 바라보기도 한다. 참신한 발상이라고 하겠다.
“자꾸만 가까이/ 기대고 싶어 하지만/ 서로의 거리를 두어야/ 잘 보이고/ 침묵을 잘해야/ 할 말이 떠오릅니다// 남의 말을/ 듣고 또 듣는 것이/ 사랑의 방법입니다/ 침묵 속에 기다리는 것이/ 지혜의 발견입니다// 아파도 슬퍼도/ 쉽게 울지 않고/ 견디고 또 견디는 것이/ 기도의 완성입니다”(「나무의 사랑법」 부문)
―수녀를 나무로 바라보는 시상은 언제 어떻게 태어난 것인지요.
“수녀들이 성당으로 걸어 들어오면 한그루 나무가 걸어 들어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많은 수녀들이 숲을 이룬 나무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지요. 이것은 스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행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내는 나무하고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시 「용서의 꽃」 역시 용서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용서하지 못한 수행자로서의 모습에 대한 진솔한 반성과 성찰을 담고 있다.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용서하지 않은/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무어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을 대신해/ 오늘은 당신께/ 고운 꽃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토록 모진 말로/ 나를 아프게 한 당신을/ 미워하는 동안// 내 마음의 잿빛 하늘엔/ 평화의 구름 한 점 뜨지 않아/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젠 당신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참 이기적이지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직은 용기 없어/ 이렇게 꽃다발로 대신하는/ 내 마음을 받아주십시오”(「용서의 꽃」 전문)

“동료들과 사소한 말 한 마디로 마음이 상할 때가 있지요. 관계가 껄끄러워 가지고, 화해는 해야 되겠는데, 계속 뭐라고 그럴까 어색하고. 그럴 때 꽃을 갖다 준다든가, 동료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방에다가 살짝 갖다 놓는다든지 하지요. 성철 스님은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안으로는 가난을 배우고 밖으로는 모든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고, 어려운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은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며, 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고, 공부 가운데 가장 큰 공부는 남의 허물을 뒤집어쓰는 것이라고 했어요. 용맹까지는 흉내를 내볼 수 있겠는데, 마지막은 못 하겠더라고요. 역시 제일 어려운 것은 용서 같아요. 용서라는 것, 살아있는 동안 큰 숙제인 것 같습니다.”
특히 시 「고백」에는 칭찬과 위로는 물론 오해와 미움 등의 인생의 수많은 파도 속에서 성숙해가는 한 인간의 풍모나 기품이 비범하게 담겨있다.
“칭찬과 위로를 받을 적엔/ 너무 기뻐/ 위로 위로 잎사귀를 흔드는/ 노래의 나무였다가/ 오해와 미움을 받을 적엔/ 너무 슬퍼/ 울지도 못하고/ 아래로 아래로/ 고독을 삼키는/ 침묵의 나무였다가//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뿌리가 깊어진 걸 보고/ 깜짝 놀랐지/ 둘레가 넓어진 걸 보고/ 행복하였지// 사랑의 비밀은/ 기쁨보다는/ 슬픔 속에/ 은밀하게 숨어 있음을/ 새롭게 발견하고/ 푸른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았지”(「고백」 전문)
표제시 역시 살아있는 한 지치지 않고 따라다니는 죽음을 차분히 직시하면서 생명에 대한 깊이 있는 사랑과 자기 성찰을 담고 있다.
“살아갈수록/ 나에겐/ 사람들이/ 어여쁘게/ 사랑으로/ 걸어오네//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선뜻 마주할 수 없어/ 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로/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이름을/ 꽃잎으로 포개어/ 나는 들고 가리라/ 천국에까지”(「꽃잎 한 장처럼」 부문)
―표제시는 요즘 수녀님의 마음을 잘 담고 있다고 하셨는데요.
“꽃에 대한 시나 묵상 그런 건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꽃잎을 노래하게 됐어요. 제가 사는 이곳 수녀원의 벚꽃도 그렇고, 꽃잎들이 바람에 날리는 걸 자주 보게 되지요. 꽃잎을 보면서 꽃잎 하나하나가 저와 친교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물론 저도 거기에 포함돼죠. 제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천국에도 가져가겠다고, 하나의 러브레터 같은 생각이랄까, 그런 마음으로 쓴 것 같아요. 책이 출간되기 직전, 즉흥시처럼 쓰여졌어요.”
인터뷰가 끝난 뒤, 그가 기자의 카카오톡으로 보내온 글은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대학 졸업식에서 한 연설 가운데 한 대목이었다. “하루 한두 번 자신의 죽음을 미리 떠올리는 건 인생의 본질적인 것과 부수적인 걸 식별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조그만 아이의 머리통 속에서 어떻게 이런 게 나오겠어, 언니나 오빠가 대신 써줬지?
소녀 이해인이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하기 전까지, 담임선생은 그의 글짓기 숙제를 도대체 믿어주지 않았다. 한국전쟁 직후 우울했던 초등학교 시절 의지할 게 책밖에 없어서 언니 오빠와 함께 늘 책을 끼고 글을 쓰곤 했던 그였는데도. 그러니까, 그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열린 글짓기 대회에서 「학교 가는 길」이라는 글로 당당히 일등을 차지한 뒤에야, 담임선생은 그의 글들이 언니나 오빠가 쓴 게 아니라 스스로 썼다는 걸 믿어줬다.
그는 풍문여중에 들어간 뒤 문예반에 들어가서 글을 즐기면서 배웠고, 고등학교 시절엔 전국 고등학생 글짓기 대회에 참가해 1등을 했다. 특히 4·19혁명이 끝난 직후 경북 김천에서 열린 전국 고등학생 추모식 행사에선 학생 대표로 창작시를 읽기도 했다. 작고할 때까지 인연을 이어온 풍문여중 문예반의 임영무 선생과 성의여고의 홀성문 선생은 ‘영롱한 소녀’ ‘내일의 규수 시인’이라고 칭찬을 해주곤 했다.
이해인은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금융조합에 일하던 아버지와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1남 3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명숙. 태어난 지 3일 만에 받은 세례명은 벨라뎃다.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납북됐고, 어머니가 홀로 자식을 키웠다.
스무살이 되던 1964년, 그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 입회했다. 수도자 이름은 클라우디아. 수녀원 입회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1968년에 첫 서원을 했고, 1976년에 종신서원을 했다.

“10살 무렵 큰 언니가 수녀원에 들어간 뒤 언니와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수녀가 되려고 했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스무 살 중반에 가야 되는 건데, 조금 일찍 들어갔을 뿐이죠.”
그는 이후 한국천주교 중앙협의회에서 경리과 보조일을 거쳐 1992년 수녀회 총비서직 맡았으며, 비서직을 그만둔 뒤 1997년 부산 수녀원에서 ‘해인글방’을 열었다. 필리핀 성 루이스대학 영문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했고, 1998년부터 2002년까지 부산 가톨릭대에서 ‘생활 속의 시와 영성’ 등을 강의했다.
무난하게 수도생활을 이어오던 2008년, 이해인은 대장암이 몸에서 발견돼 큰 수술을 받았다. 수술 이후에도 방사선 치료 28회, 항암 주사 30번을 맞으며 고통을 견뎌냈다. 몇 년 전에는 맹장 수술과 양쪽 다리 수술도 받았다. 환자로 14년째 살고 있는 셈이다.
―63세이던 2008년 큰 수술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때 죽으면 연락할 사람의 이름을 작성하기도 했지요. 50명에서 30명으로 줄이고, 다시 20명으로 줄인 명단을. 그런데 육체적인 아픔을 경험하면서, 뜻밖에도 제가 모르는 저를 만나게 됐어요. 아프면 한숨도 좀 쉬고 눈물도 흘리고 그럴 줄 알았는데, 고통을 잘 이겨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즐긴다고 할 정도로 쾌활하게 고통을 대하는 모습이더라고요. 저도 제 자신에게 놀랐어요. 진짜 한 번도 한숨을 쉬거나 누구를 원망해본 적이 없고 눈물을 흘리지도 안 했으니까요. 수녀님은 시를 쓰는 시인이고 명색이 수녀이니까 체면 때문에 지금 참고 있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했어요. 그래서 체면 때문에 위선적으로 인내를 하나 싶어서, 성모병원에 입원했을 때, 혼자 울어 보려고 밤 10시 넘어서 아무도 없는 성당에 들어갔지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눈물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쇼맨십이나 잘 보이려고 참는 게 아니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고통이나 아픔과 동행하는 마음이 있구나 하고 반가우면서 끝까지 더 명랑한 표정을 하게 됐어요. 암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것도 아니고, 어느 날 찾아온 불청객이잖아요. 오늘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고 세상에 저보다 더 아픈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면서 제 고통을 객관화하려는 노력들이 도움이 됐지요.”
실제 그의 이번 시집에도 아픔을 통해 오히려 깊고 성숙해진 그의 모습이 담긴 시 「아픔이 준 선물」이 있다. “아픔이 선물이란 말을/ 전에는 믿지 못했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았지// 두 무릎을 한꺼번에 수술하고/ 집에 온 어느 날// 피도 많이 빠져나간 후/ 뼈와 살이 한꺼번에 아프니/ 울지도 못하고/ 뜨거운 물주머니를/ 조심스레 몸을 대는 순간//...이제는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내가 나에게 속삭이네// 아픈 만큼 철이 드는 게 사실이라고/ 조금 더 넓어지고 깊어지고/ 밝아지는 게 사실이라고// 힘든 수업료를 지불한 만큼/ 나는 행복을/ 보상받은 거라고!”(「아픔이 준 선물」 부문)
이해인은 수녀원에 입회한 이후 ‘넓고 어진 바다 마음으로 살고 싶다’며 ‘해인’이라는 필명으로 1970년 천주교 잡지 『소년』에 글을 기고했고,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톨릭출판사) 펴내면서 본격적으로 시작을 시작했다.
―수녀원 시절 초기, 비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고 하셨는데요.
“부산에는 눈보다 비가 많이 오잖아요. 개인적으로 눈도 좋아하지만, 비가 참 좋아요. 비가 똑바로 내리지 않고 사선으로 내리잖아요. 비가 오면 마음이 편해지고, 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에 실린 1971년 창작시 「비 내리는 날」에는 비 내리는 당시 풍경과 내면 상태가 다음처럼 정갈하게 담겨 있다.
“잊혀진 언어들이/ 웃으며 살아오네// 사색의 못가에도/ 노래처럼/ 비 내리네// 해맑은 가슴으로/ 창을 열면// 무심히 흘려버린/ 일상의 애기들이// 저만치 내버렸던/ 이웃의 음성들이/ 문득 정답게/ 빗속으로 젖어 오네// 잊혀진 기억들이/ 살아서 걸어오네// 젖은 나무와 함께/ 고개 숙이면/ 내겐 처음으로/ 바다가 열리네.”(「비 내리는 날」 전문)
―어떤 계기로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내게 된 것인가요.
“1975년 당시 총장이던 임남훈 수녀님이 저의 시가 어느 수준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가 쓴 시 10편을 가톨릭출판사 사장인 김병도 신부님을 통해 몰래 대표적인 여류 시인인 홍윤숙씨에게 보냈는데, 홍 시인이 그것을 읽고 부산으로 내려와서 특별한 색깔이라며 시집을 내자고 했지요. 당시는 수도회 분위기가 대단히 보수적이라 어느 한 개인이 밖으로 드러내는 건 상상이 안 되는 시기였기에 걱정을 많이 했지요. 박두진 시인이 제목과 서문을 써주고 홍윤숙 시인이 앞장서면서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단자도 아닌 무명 시인인데도 화려하게 데뷔를 하게 됐지요. 처음 우리 식구들끼리만 돌려보려고 조금만 찍었는데, 신문에 기사가 실리면서 난리가 났어요. 신문에 기사가 실리면서 저의 신분엔 맞지 않는 러브레터도 많이 받았어요. 수십권의 책을 냈지만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는 저의 첫 사랑이라 정이 많이 갑니다.”
그는 이후 시집으로 『내 혼에 불을 놓아』(1979),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1983), 『시간의 얼굴』(1989), 『엄마와 분꽃』(1992),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1999), 『다른 옷은 입을 수가 없네』(1999), 『작은 위로』(2002), 『작은 기쁨』(2007), 『엄마』(2008), 『희망은 깨어있네』(2010), 『작은 기도』(2011), 『필 때도 질 때도 동백꽃처럼』(2014) 등을, 산문집으로 『두레박』(1986), 『꽃삽』(1994), 『사랑할 땐 별이 되고』(1997) 등을 펴냈다. 그 사이 새싹문학상, 여성동아대상, 부산여성문학상, 천상병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허락도 없이 제 시를 담은 불법 출판물이 나왔고, 영화를 만들겠다고 영화감독이 찾아오거나, 저를 만나겠다며 기자들이 수녀원의 담을 넘기도 했어요. 심지어 누가 꽃을 가지고 찾아왔다고 해서 수녀원 지원자가 왔나 하고 나가봤더니 신문 기자가 기다리고 있더라고요. 내 길도 못 가겠구나 싶을 만큼 소용돌이였어요. 오죽했으면 책 좀 안팔리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겠어요? 제가 진짜 환속할 뻔했죠. 그런 날들을 지나서 제 길을 지켰다는 게 스스로 대견해요.”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주시죠.
“데뷔 이후 전반부에는 주로 자기 독백이나 감정적인 주관적인 시를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수행자로서 통제도 많고 긴장해야 하니까 자기를 닦달했던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2008년 수술 이후 후반부에 와서는 투병을 하면서 자기 객관화라고 할까요, 사물과 인생을 보듬어 안는 시선이 되면서 더 구체성을 띄면서 생활적인 시를 좀 옮아간 것 같아요. 지금은 약간 여유가 생기고 유머러스하고 재미있는 시도 쓰고요. 전체적으로 기도하고 사랑하며 쓴 시라고 생각하는데, 후반부에는 아픔을 겪으면서 아무래도 인생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넘어온 것 같아요.”
―특별한 시 쓰기의 전략이나 방법이 있는지요.
“평소에 아무리 바빠도 반 장 정도의 일기나 생활 메모를 씁니다. 신문 기사도 붙여놓고, 음악회에 갔으면 티켓도 붙여놓고, 사진도 붙여 넣는 등 재미있게 정리를 하지요. 출장을 가게 되면 다른 종이에 쓴 뒤 그것을 일기 노트에 붙여서 정리하기도 하고요. 두꺼운 노트는 일 년에 두세 권이면 되지만, 얇은 노트의 경우 몇 권을 쓰게 되지요. 이렇게 수녀원에 와서 쓴 노트가 175권입니다. 개인의 기록이지만, 수녀원의 역사이기도 하죠. 세월이 지나서 다시 읽으면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시작의 경우 시상이 떠오를 때는 산보를 하고, 시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면 시상을 메모 글에 써서 주머니에서 넣어뒀다가 침대 밑에 모아놓습니다. 그러다가 소임이 없는 주일 성당에서 시로 정리하고, 마지막에 컴퓨터에 입력하지요. (시가 안써지면 어떻게 하나요) 저의 경우, 이상하게 주변이 깨끗하면 글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적당히 지저분하게 책도 널려 있어야 잘 나오더라고요. 시가 안 써지고 막막할 때는 일부러 마음을 지어 짜지 않고, 그냥 그대로 둡니다. 그래서 밀쳐놓은 메모가 좀 많이 있는 편이죠. 만약 석류꽃에 대한 시를 쓰다가 잘 써지지 않으면 내년에 필 때 쓰지 뭐, 하고 밀쳐놨다가 내년에 다시 씁니다. 성당에서 기도를 하기도 하고요.”
―앞으로 어떤 시를 쓰고 싶고, 어떤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요.
“시를 쓰고 좋아하는 한 수녀가 있었는데, 그 수녀는 주변의 사소한 사물과 자연, 인간을 신앙 안에서 애정으로 바라보며 시로 썼고, 그 시를 생활 속에 적용시키면서 시의 집을 지어서 시를 바다처럼 만들어서, 많은 이웃들에게 나눠줬다. 그래서 그녀는 시로 살다가 간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 자체가 이미 시가 되지 않았을까, 이렇게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어린이 동화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고, 제가 알거나 감명 받은 사람에 대한 인물시를 쓰고 싶어요.”
―하루 일상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수도 생활의 하루하루가 기도와 독서와 일로 적합하게 잘 짜여진 하나의 예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상의 영성이 더 없이 중요하지요. 성경 못지않게 논어에 나오는 말들, 특히 ‘평상심시도’라는 말을 좋아 합니다.”
―일터 ‘해인글방’을 소개해 주신다면요.
“여기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본원이고, 130명 정도가 생활하고 있어요. 제가 일하는 곳은 1997년 개소한 ‘해인글방’으로, 옛날에는 유치원 교실이었어요. 미니 부속실이 하나 있어 10평짜리 방 두 개의 북카페 같죠. 저는 이곳에서 시만 쓰는 게 아니고, 여러 일을 합니다. 방문객들이 오면 프로그램을 짜서 같이 시도 읽고, 교도소에서 편지나 성경책을 보내달라고 하면 편지를 써서 보내고 물건도 전달하죠. 마치 심부름센터장, 작은 우체국장 같은 생각이 든다니까요. 흰구름 수녀, 국민 이모, 달빛 이모라는 별칭을 좋아합니다.”
1997년 이래 부산 광안리 앞바다를 보면서 성 베네딕도 수녀원의 ‘해인글방’을 지키고 있는 이해인 수녀. 매일 오전 5시 20분부터 시작해 20년 넘게 기도하고 사랑하며 시를 쓰고 나누는 이곳이야말로, 그리고 그 자신이야말로 ‘민들레의 영토’일 것이다. “좋은 시란 천 사람이 한 번 읽는 시보다 한 사람이라도 천 번 읽는 시”라며 “수도 생활, 수행자 삶 자체가 시하고 비슷하다. 한 편의 시처럼 죽었으면 좋겠다”는 아름답고, 고고하고, 뜨거운 시 정신 가득한. 죽어도 봄이 되면 다시 새싹을 밀어 올리는 민들레 같은.
“오래오래 생각해서/ 짧게 쓰는 시// 길게 늘렸다가/ 짧게 압축하는 시// 짧을수록 오래 읽은/ 시가 좋았다/ 시처럼 살고 싶었다”(「한 편의 시처럼」 전문)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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