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의 가을은 결코 어둡지 않았다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 ③]

문학수 선임기자 2022. 2. 4.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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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고딕 양식과 음악

[경향신문]

중세 후기의 다성음악은 당대의 아방가르드였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그 거점이었다. 노트르담의 고딕적 스타일은 동쪽에서 바라봤을 때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늘 높이 솟아오른 고딕 성당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 ‘대성당들의 시대’라는 노래가 있다. 서곡이 끝나자마자 등장하는 첫 곡이다. 집시 출신의 유랑가수 그랭구아르가 부르는 이 노래는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가 1482년 파리에서 일어난 “사랑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라면서 “대성당들의 시대가 왔다”고 밝힌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1482년을 ‘대성당의 시대’로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뮤지컬의 공간적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만 해도 1163년 공사를 시작해 1345년에 마무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른바 ‘대성당의 시대’는 이 뮤지컬(혹은 빅토르 위고의 원작)의 시간적 배경인 1482년보다 대략 150년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뮤지컬 작사가도 그 지점을 의식했는지, “대성당들의 시대가 왔네/ 이제 세상은 새로운 천년을 맞네”라는 가사를 중간에 삽입했다. 이어 등장하는 가사는 더 중요해 보인다. “하늘 끝까지 닿고 싶은 인간은/ 유리와 돌 위에 그들의 역사를 쓴다네.”

노래도 말하듯이 대성당의 시대는 ‘새로운 천년’을 맞은 시점부터, 그러니까 대략 11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로마네스크(Romanesque, 로마풍) 양식의 거대한 수도원과 성당들이 건립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순례자들이 약 4000㎞를 마다않고 성지(聖地) 예루살렘으로 걸음을 옮기던 때였으며, 교회와 국왕이 손잡았던 시대, 성지 탈환을 명분으로 내건 1차 십자군(1095~1099)이 예루살렘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던 시기였다. 이 무렵에 지어진 로마네스크 성당들은 마치 요새나 성채처럼 견고하고 웅장했으며 폐쇄적인 느낌마저 감돌았다. 원래 자그마한 소읍(小邑)이었으나 순례자 혹은 십자군의 행렬이 밀려들어 규모가 커진 신도시에 이렇게 묵직한 스타일의 성당들이 들어섰다. 애초부터 존재했던 구도시의 주교좌 성당들, 또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수도원들도 같은 양식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예컨대 독일의 중세도시 힐데스하임의 대성당과 성 미켈레 수도원은 1007년부터 20여년에 걸쳐 지어진 로마네스크 건축물이다. 또 당시의 순례길은 지금도 ‘순례’라는 테마를 지우지 않는 경우들이 왕왕 있는데, 이를테면 그 유명한 ‘산티아고 순례길’이 그렇다. 프랑스 중부에서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르는 약 800㎞의 여정이다. 당연하게도 이 길을 걷는 여행자들은 로마네스크와 빈번히 조우한다.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네 개의 코스 가운데 한 곳인 베즐레의 생트마들렌 성당, 코스에서 살짝 벗어나긴 하지만 콩크의 생트푸아 성당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대성당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유럽의 대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는 대성당들, 앞서 언급한 노래가 묘사하듯이 “하늘 끝까지 닿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반영한 기념비적 건축물들은 100년쯤 더 세월이 흘러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고딕(Gothic)이며, 이때부터야말로 본격적인 대성당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유럽의 거의 전 지역에서 로마네스크는 고딕에 바통을 넘겼다. 로마네스크가 둥근 아치와 돌로 쌓은 거대한 벽으로 획일적 체계를 만들었던 것과 달리, 고딕은 높은 첨탑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뽐내며 대도시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그것은 ‘지엄하신 신의 거처’ ‘예배하는 성소’라는 원래의 의미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압도적인 규모와 눈부신 화려함을 자랑하는 고딕 성당은 대도시의 표상이었으며 시민들의 자부심이었다. 당시 등장하기 시작한 부르주아지 계층, 그중에서도 부유한 이들이 성당 건축을 위해 아낌없이 기부했다. 주교와 성직자들은 물론이거니와 국왕과 부르주아지들도 ‘더 크고 더 높게’ 짓기 위해 타 도시와 경쟁했다. 마치 천상에 닿으려는 듯한 수직 상승과 관련해 예술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는 이렇게 말했다. “고딕 교회는 (…) 우리 눈앞에서 솟아오른다.”

■노트르담 악파, 음악의 진보를 성취하다

고딕은 프랑스에서 막을 올렸고 그곳에서 가장 화려하게 발화했다. 물론 우리가 ‘하늘 높이 치솟은 고딕’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성당 중에는 독일 땅에 소재한 것들도 적지 않다. 예컨대 쾰른 대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었던 분들이 있을 것이다. 기억하다시피 높이(157.38m)가 엄청나 성당과 인물을 같은 프레임 안에 담기가 벅차다. 하지만 1248년 건축을 시작한 이 성당은 프랑스의 고딕에 비하면 시기적으로 한발 늦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고딕의 물적 토대는 도시의 경제력이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자면 로마네스크는 기껏해야 조용한 소도시에 지어졌지만, 고딕은 부유한 대도시의 상징이었다. 당시의 파리는 그 지점에서 단연 앞섰다. 그곳은 유럽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역사서들은 1300년을 기준으로 파리의 인구가 20만명에 육박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도시의 배후였던 농촌으로부터 식량과 인구를 충분히 공급받으면서 경제적으로 활력이 넘쳤다. 물론 이 지점에서 원거리 무역으로 번성했던 이탈리아의 도시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시기를 기준으로 베네치아와 피렌체의 인구가 각각 10만명, 밀라노도 비슷한 수준에 육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로마의 유산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았다. 그 찬란한 유산은 외려 족쇄로 작용했다. ‘새로운 도전’이라는 측면에서 파리가 한발 빠를 수 있었던 이유다. 인구와 경제력, 그리고 전통에서 자유롭다는 역설을 통해 파리는 고딕의 진원지로 등장했다. 1130년 건축을 시작한 생드니 대성당을 필두로 파리와 그 주변의 일 드 프랑스에는 고딕 성당들이 속속 들어섰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음악은 어땠는가. 성당 밖에서 음유시인이 노래하고 골리아드가 세상을 야유하던 시절에 고딕으로 지어진 성당 안에서는 어떤 음악이 울려 퍼졌는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성당 건축물’이라는 하드웨어가 크고 높고 화려해졌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조건(환경)의 변화는 예술에도 중력을 미치기 마련이다. 앞 시대에 비해 훨씬 높아진 천장은 소리의 잔향(殘響) 자체를 바꿨다. 성당 내부에 성가대석과 오르간도 본격적으로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런 전제하에서 우리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들어설 필요가 있다. 그곳은 새로운 교회음악의 진원지, 이후의 음악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노트르담 악파’의 거점이었다.

교회음악은 애초에 단성(monophony)이었다. 하나의 선율로 노래했다. 음역도 넓지 않아 오늘의 감각으로 듣노라면 거의 읊조리는 것과 비슷했다. 게다가 기독교가 전파된 지역마다 토착화의 과정을 겪으면서 각기 다른 성가를 불렀다. 로마에는 ‘로마 성가’, 이탈리아 북부에는 ‘밀라노 성가’, 남부에는 ‘베네벤토 성가’가 있었다. 프랑크 왕국의 땅이었던 서유럽과 중유럽에는 ‘갈리아 성가’, 스페인 지역에는 ‘모자라빅 성가’가 있었다. 이렇게 지역마다 상이했던 음악을 ‘통일된 전례’로 수렴하기 시작한 때는 그레고리오 1세가 교황으로 재위(590~604)하던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상당한 세월이 필요했다. 또 한 명의 그레고리오가 교황으로 재위했던 시기(그레고리오 2세, 715~731)에 이르러서야 어느 정도 단일한 체계를 마련했고 이를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부른다.

9세기가 끝날 무렵까지는 단성으로만 노래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같은 세기 말에 쓰여진 다성(polyphony)의 문헌 증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프랑스 북동부에서 발견된 작자 미상의 논문 ‘무지카 엔키리아디스(Musica Enchiriadis)’는 ‘오르가눔’(Organum)이라는 이름으로 당대의 다성음악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러 성부를 정해진 간격으로 병행시키는 초기적 형태의 다성음악이었다. 이것이 한층 진보해 저마다의 성부가 독자성을 지닌 채 복잡하고 입체적인 화성을 구사한 것은 12세기 후반부터였다. 파리에 노트르담 대성당이 지어지던 시기와 절묘하게 일치한다. 물론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후원을 받던 음악가 레오넹(Leonin, 1150~1201?)과 그의 제자로 알려진 페로탱(Perotin, 생몰연대 불명)이 새로운 흐름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 의해 교회음악은 ‘평면’에서 ‘입체’로 나아갔다. 이를 위해선 당연히 ‘정량적 악보’가 필요했는데, 노트르담 악파는 음의 높낮이와 길이까지 정확히 표기하면서 ‘악보의 진보’를 이뤄냈다.

■기욤 드 마쇼가 ‘거장’으로 불리는 까닭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0?~1377년)는 성과 속을 통합한 음악가였다. 140곡이 넘는 작품이 지금까지 전해진다.

수세기 동안 수도원이 이끌었던 교회음악은 대성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레오넹과 페로탱이 그랬듯이 음악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겨 ‘작곡의 주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창작자들이 스스로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의식하면서 음악은 점점 더 복잡한 선율과 화성을 구사했다. 물론 이 현상은 ‘교황권의 약화’라는 지점과 무관치 않다. 알려져 있다시피 내분이 끊이지 않았던 교회는 14세기 초반에 분열, 로마와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이 존재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종교적 권위의 약화가 예술의 자율성(어쩌면 세속화)을 더욱 추동했음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14세기 초반에는 ‘아르스 노바’(Ars nova)라는 개념과 용어가 등장한다. 말 그대로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이다. 프랑스의 작곡가 겸 음악이론가인 필립 드 비트리(1291~1361)가 제시한 이 개념은 앞서 언급한 노트르담 악파의 음악조차 ‘아르스 안티쿠아’(Ars antiqua, 낡은 예술)로 규정하면서 더욱 강력하게 음악의 혁신을 옹호한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다채로운 리듬’이었다. 이 시기의 다성음악은 ‘싱커페이션’(syncopation)이라고 부르는 당김박까지 시도하면서 멋들어진 음악을 창출한다. 물론 보수주의자들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급기야 아비뇽의 교황이었던 요한 22세는 1324년 교서에서 저주를 퍼붓는다. “선율을 토막 내어 (…) 음들이 쉼없이 날뛰고, 귀를 진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취하게 하며, 신앙심을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방해한다.”(윌 듀런트, <문명이야기>(민음사)에서 재인용)

그럼에도 새로운 음악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의 ‘귀’를 과거로 되돌릴 순 없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드디어 기욤 드 마쇼(Guillaume de Machaut, 1300?~1377)가 등장한다. 지난 회에 언급했듯이 그는 ‘마지막 음유시인’이었다. 세속음악가였다. 거의 모든 세속 장르(발라드, 론도, 비를레 등등)를 작곡했던 당대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프랑스 북부 랭스(Reims)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그는 성직자였다. 당연히 교회음악가였다. 이처럼 세속과 교회를 오가며 작곡했던 그는 자신의 작품이 후대에 남으리라고 예견했다. 세밀한 악보를 작성해 이름을 명기했을 뿐 아니라 어떤 곡들은 작곡 연대를 표기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우리는 그를 통해 ‘세속’과 ‘교회’라는 두 물줄기가 ‘음악’으로 합류하는 장면을 생생히 목격한다. 공들인 작품을 후대에 남기려는 ‘장인(匠人)의 욕망’과도 대면하게 된다.

그가 남긴 최고의 걸작이자 대작으로는 <노트르담 미사>(1360년 이후 작곡)가 손꼽힌다. 한데 이 ‘노트르담’은 파리에 있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성당이 아니다. 당시 많은 성직자들이 그랬듯이 여러 군주를 섬겼던 그는 노년에 접어들자 고향으로 돌아와 주교좌 성당에서 말년을 보내는데, 그곳의 이름도 역시 ‘노트르담’이다. 사실 프랑스인들의 ‘노트르담’(Notre Dame, 성모 마리아) 사랑은 유명하다. 파리뿐 아니라 곳곳에 같은 명칭의 성당들이 있다. 1211년 건립을 시작한 랭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역시 고딕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결국 중세 후기의 다성음악은 ‘노트르담’이라는 이름과 뗄 수 없는 친연성을 지닌다.

서양음악사에서 ‘거장’이라는 호칭으로 불릴 수 있는 최초의 작곡가였던 기욤 드 마쇼는 예순이 다 된 나이에 18세 소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1872~1945)는 <중세의 가을>(연암서가)에서 이 ‘러브 스토리’를 “황혼과 아침의 사랑’으로 표현한다. “아주 유명한 시인이었지만 (…) 병약했고 한쪽 눈이 멀었으며 통풍으로 고통받던 노시인”은, 샹파뉴의 귀족 집안 딸인 페로넬 다르망티에르가 “사랑의 시를 주고받자는 요청”을 보내자, “온몸이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물론 시인의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하위징아는 이에 대해 “당대 최고의 시인은 그녀가 그를 상대로 또 자신의 마음을 상대로, 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 책에서 더 중요한 것은 중세 후기의 예술, 특히 기욤 드 마쇼의 음악과 관련한 언급이다. 요약해 소개하면 이렇다. “중세 후기의 미적 감각은 빛과 찬란함에 대한 감각이거나 생생한 움직임에 대한 감각이다.” “성과 속의 구분은 희미해졌다. 신성한 노래에 세속의 멜로디가 사용되거나, 반대로 세속적인 노래에 신성한 멜로디가 사용됐다.” 이처럼 ‘중세의 가을’은 칙칙하지 않았다. 그 중심에 고딕 대성당과 화려한 다성음악, 그리고 대(大)작곡가 기욤 드 마쇼가 있었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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