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날 갑자기 250만 팔로워를 가진 보테가 베네타의 인스타그램 계정이 폭파되었다. 250만이면 서울 인구 중 4분의 1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인데... 갑자기 왜 증발해 버린 걸까? 항간에는 노이즈마케팅이라거나, 심지어 계정 관리자의 실수라는 설까지 돌았는데 진짜 이유는 뭘까. 유튜브 댓글로 “이름만 들으면 알만한 명품 브랜드들이 SNS 계정을 없애는 이유를 취재해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했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명품이 SNS를 지우는 진짜 이유

톰브라운 가디건 183만원, 스톤아일랜드 상의 39만원, 구찌 클러치 119만원, 발렌시아가 신발 127만원. 요즘 ‘일진’님들의 데일리룩이다. 소위 일진 패션으로 불리는 명품 휘감은 이 패션, 그런데 명품 브랜드 입장에선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잘 쌓아온 브랜드 이미지를 순식간에 나락으로 보내버리기 때문이다. 톰브라운 가디건은 검색만 해도 바로 아래에 ‘양아치’라는 자동완성이 따라온다. 무스너클은 브랜드명 바로 아래에 ‘급식’이 뜬다. 심지어 고야드 클러치는 ‘극혐’이라는 키워드까지 붙는다.

이게 무슨 일일까. 톰브라운은 2003년 뉴욕에서 런칭한 글로벌 명품 브랜드이고, 무스너클은 캐나다의 컨템포러리 브랜드, 고야드는 160년 넘는 역사의 유서깊은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인데 요즘 ‘양아치 패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학교다닐 때 일진들이 명품을 휘감고 다니더라는 목격담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쏟아지고 이들 명품 브랜드들이 거론되고 있는거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명품들의 반응도 즉각적인데 서둘러 SNS 계정을 닫고 있다. 일종의 거리두기 전략인데 고급 브랜딩이 아니라 10대들의 흔한 패션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 특히 ‘일진 패션’으로 불리는 것에 대한 부담이 상당하다고 한다.
패션 브랜딩 에이전시 Ternastudio 박성조 대표
“명품 입장에서는 대중들이 많이 들어와서 세일즈가 되는 것도 좋지만, 또 너무 많이 들어오면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니까 가격을 높인다거나 실적이 어느 정도 돼야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거나 그런 형태로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소수의 계층들만 구매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전략으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가죽 위빙 제품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명품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는 250만이나 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삭제하기까지 했다. 이외에 구찌, 발렌티노, 발렌시아가, 언더아머, 겐조, 골든구스도 각자의 철학과 감성이 녹아있는 브랜드들인데 ‘일진’ ‘양아치’ 이런 수식어가 따라붙으면서 이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살 때 눈치가 보이는 상황.

아무리 그래도 가치를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백만의 팔로워를 확보한 그간의 성과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걸까? 전문가들은 명품 브랜드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바로 이미지인데, 특정 집단에서의 일시적 유행으로 이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것으로 본다. 대중 친화의 길보다는 차라리 선을 긋겠다는 것이다.
패션 브랜딩 에이전시 Ternastudio 박성조 대표
“보테가 베네타같은 경우는 거리두기라는 전략을 통해서 대중들과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하고 구매하기 어려운... 대중적이지 않아야 되는.. 이미지 메이킹을 그렇게 한 것.. 이게 사람들이 희소성의 가치를 느끼고 구매 욕구를 자극시킬 수 있다고 생각이 들어요. 너네들과 달라라는 차별화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다만 일진 또는 온몸이 문신으로 가득한 이들의 명품 소비만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해석도 있다. 패션계에서는 보테가 베네타의 경우 새로 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다니엘 리의 브랜드 철학이 반영된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SNS가 넘치는 시대에, 오히려 SNS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쿨하고, 멋지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하잎한(hype) 이미지를 가져간다는 것.
패션 브랜딩 에이전시 Ternastudio 박성조 대표
“다니엘 리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부임하면서 SNS로 보통 젊은 세대들과 소통을 하는데 오히려 그 부분을 삭제시킴으로서 ‘우리는 쿨해’ ‘우리는 이정도 팔로워를 지워도 별로 개의치 않아’ ‘우리는 SNS 운영하지 않아도 우리는 잘 돼’ 이런 걸 통해서 좀 하잎한(Hype) 이미지를, 쿨한 이미지를 가져가려고 했던 것 같아요.”

대중과의 거리두기라는 명품들의 전략 변화는 과거 해외사례에서도 교훈을 얻고 있다는 게 패션계의 설명이다. 과거 영국에서는 ‘차브족’으로 일컫는 집단이 버버리 제품을 많이 입어서 이미지 복구에 꽤나 애를 쓴 적이 있다.
차브족은 어리다는 뜻의 Chavi에서 유래된 말로 고급 브랜드를 저질스럽게 즐기는 비행청소년 집단을 뜻한다. 이들의 패션은 주로 이랬는데,(차브족 사진 짤들) 이때 대표되는 브랜드가 바로 버버리였다.

이들은 주로 위조품을 구매해서 브랜드의 고객도 아니고, 이미지도 깎아 먹었으니 어쩌면 우리나라 일진님들보다 더 골치가 아팠을지도... 버버리는 이들과 어떻게든 손절하기 위해 인기있던 체크패턴 야구모자 생산을 중단하고, 심지어는 자신들의 시그니처인 버버리 체크제품도 전체의 10% 이하로 생산하는 정책을 내기도 하며 몇 년에 걸쳐 어렵사리 브랜드 이미지를 복구해냈다.

명품은 이미지로 먹고사는데, 이 이미지는 브랜드만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주요 고객들도 한 몫한다. 돈이 많아도 실적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에르메스의 버킨백은 아무에게나 팔지 않기 때문에 소수의 특별한 사람만 들 수 있고, 더 차별화가 되고 그래서 더 인기가 많다.

언제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르겠는 일진과 명품의 어색한 조합, 그리고 여기서 위기감을 느끼는 명품들의 거리두기는 당분간 계속될 듯하다. 유행이 휩쓸고 간 자리를 복구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당신도 취재를 의뢰하고 싶다면 댓글로 의뢰하시라. 지금은 “경주 박물관은 안내 데스크에 몰래 접수될 만큼 유물이 많다는데 진짜인지 알려달라”는 의뢰가 들어와 취재 중이다. 구독하고 알람 설정하면 조만간 취재 결과가 올라올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