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IQ 논쟁" 가장 똑똑한 인종은?

흑인의 IQ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다.

“나라마다 IQ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흑인들이 아주 똑똑하다는 걸 저도 알게 되면 정말 좋겠어요. (…) 하지만 그게 사실은 아니죠.”

최근까지 이어져온 학자들과 기자들의 주장들은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는데, 그 단초가 된 여키스의 지능검사의 실상을 파헤쳐보자.

이 연구는 그다지 엄밀하게 실시되지 않았다.

175만 명의 신병에게 지능검사를 실시하기란 여간 벅찬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수치들은 사실 수박겉핥기로 다급하게 수집되었다.

신병들이 그 검사를 치렀던 실내는 가구가 없었고 조명이 나빴으며 너무 혼잡해서 뒤쪽에서는 실험 진행자의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일부 군인들은 미국에 막 이주했던 터라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못했다. 다른 군인들도 영어를 말할 줄은 알았지만 읽거나 쓰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시간 압박도 있었다. 다음 차례에 시험을 볼 사람들이 복도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지능검사 수치를 너무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도 될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정반대 반응이 일어났다!

여키스의 수치는 미국의 이민정책에 관한 의회 토론에서 거듭하여 사용되었다. 정치인들은 지능검사에서 성적이 나빴던 신병 집단(남유럽인과 동유럽인)을 이민자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집단들에게는 인원 할당이 도입되었는데, 그 결과 1924년에서 2차 세계대전 사이의 기간 동안 수백만 명이 미국 국경을 넘지 못했다. 할당 인원 때문에 유대인을 포함해 어려운 처지의 난민들이 입국을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지능 수치는 아주 과격한 강제불임수술 법률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쓰였다. 1927년 미국에서는 사람을 강제로 불임 상태로 만드는 것이 합법화되었다. 미국 대법원은 “3대에 걸친 정박아들만으로 충분하지, 더 이상은 안 된다”라고 판단했다. 수만 명의 미국인들이 강제로 불임이 되고 나서 1978년에 이르러서야 그 관행은 불법이 되었다.

이만하면 도저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


IQ와 피부색에 관한 논의는 수를 오용한 가장 추악한 사례들 중 하나다.

잠시 이런 질문에 답해보자.

✔ 한 집단의 IQ가 다른 집단보다 낮다는 말은 과연 어떤 뜻일까?

피부색과 IQ에 관한 주장은 종종 미국에서 나온 표본에 근거한다. 따라서 '모든' 흑인이 지능검사 점수가 낮다는 건 틀린 말이다. 표본에 속한 흑인 미국인들만이 백인 미국인들보다 점수가 낮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에 관해도 짚어보아야 할 것이 꽤 많다.

지능과 피부색에 관한 주장은 언제나 평균을 다룬다. 한 집단의 평균이 다른 집단의 평균보다 낮다는 식이다. 그런데 두 평균 뒤에 점수들의 전체 범위가 놓여 있다. 이를테면 스펙트럼의 제일 위에 위치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도 있고, 제일 아래에 위치한 백인 미국인도 있다.

많이 사용되는 웩슬러 지능검사의 점수들을 보면 두 집단이 상당히 많이 겹친다.

웩슬러지능검사 점수에 따르면 많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평균적인 백인 미국인보다 더 지능이 높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많은 백인 미국인이 평균적인 아프리카계 미국인보다 점수가 낮다. 즉 이런 종류의 평균은 개개인의 점수와는 거의 무관하다.

중요한 질문이 하나 더 있다.

✔ ‘흑인’과 ‘백인’을 나누는 기준은 과연 무엇인가?

연구에서 이 구분은 종종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여기는지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하지만 이 구분은 결코 확정적이지 않다.

미국에서 이탈리아인들은 비백인이라고 여겨지고, 브라질에서는 유럽인이 아니면 흑인이며, 2010년 인구총조사에서 수백만 명의 미국인은 2000년과 비교하면 다른 범주에 속했다. 달리 말해서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는 피부색만큼이나 시간과 장소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피부색과 지능에 관한 난감한 결론을 다룰 때 위에서 나온 주의할 점들(데이터의 출처, 평균의 한계 그리고 ‘흑인’과 ‘백인’의 의미)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잘못된 기대를 품고서 정의상 숫자가 객관적이라고 가정하면 위험하다. 그랬다가는 숫자가 사고를 멈추게 만드는 핑계로 작용한다.

우리가 숫자를 진지하게 취급하려면 숫자의 한계도 전부 알아차리고 확인해야 한다. 숫자의 이면에는 가치판단이 있다는 사실, 모든 것을 셀 수는 없다는 사실, 그리고 숫자가 알려주지 못하는 내용도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숫자는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다.

숫자를 대화의 종착지로 삼지 말고 출발점으로 삼기 바란다. 우리는 이런 질문들을 계속 던져야 한다.

연구 과정에서 어떤 선택이 있었을까?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런 차이가 정책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까? 그리고 특히 다음 질문이 중요하다. 숫자는 우리가 중요하다고 미리 결정한 것을 측정한 값이 아닐까?


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왜곡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