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된, 이 '구멍가게'도 사라지겠지요[남기자의 체헐리즘]

남형도 기자 2022. 2. 1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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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가게·문방구·오락실·철물점·만화방·레코드가게 탐방기(記)..우리 곁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

[편집자주] 수습기자 때 휠체어를 타고 서울시내를 다녀 봤습니다. 장애인들 심정을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생전 안 보였던, 불편한 세상이 처음 펼쳐졌습니다. 뭐든 직접 해보니 다르더군요. 그래서 체험해 깨닫고 알리는 기획 기사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름은 '체헐리즘' 입니다. 제가 만든 말입니다. 체험과 저널리즘(journalism)을 하나로 합쳐 봤습니다. 사서 고생한단 마음으로 현장 곳곳을 몸소 누비겠습니다. 깊숙한 이면의 진실을 알리겠습니다. 소외된 곳에 따뜻한 관심을 불어넣겠습니다.

보기만 해도 소담하고 따뜻한 동네 구멍가게. 평상이 킬포인트. 여름에 여기 앉아 시원한 아이스크림 하나 먹으면 참 좋겠다. 정겨운 동네 앞엔 물줄기도 흐른다./사진=남형도 기자

"어서 와. 날이 이제 더운가 봐. 윗도리 벗어서 다니는 거 보니까."

'드르륵'하고 문을 열어 동네 구멍가게에 들어섰을 때 들려온 말이었다. 그 이름은 '자하슈퍼'. 시선이 닿은 곳엔 할머니 세 분(사장님 포함)이 옹기종기 모여 연탄난로를 쬐고 있었다. 할머님들 반대편 벽면에 붙은 오래된 TV에선 동물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가니 소담한 가게에 과자며, 라면이며, 음료수 같은 것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뭘 먹을까 고르는 사이에도 할머니들의 수다는 도란도란 이어졌다. 점퍼 벗고 들어온 내가 쏘아 올린, 아까 그 화두였다.

"젊은 여자들도 벗어 재끼고 반팔 하나만 입었더라고." (초록 점퍼 입으신 할머니 1)

"요즘 열나는 사람들 많어." (진분홍 점퍼 입으신 할머니 2)

"애들도 그렇잖아, 뛰어놀다 보면 겉옷만 입었지, 안에는 반소매야." (연분홍 점퍼 입으신 할머니 3 - 사장님)

구멍가게 안의 물건들. 어릴 땐 정체 불명의 불량식품 같은 걸 먹으며, 돌아보는 걸 아주 즐거워했더랬다./사진=남형도 기자

구수한 음성이 정겨워 물건을 천천히 골랐다. 잠시 뒤 건빵과 봉지 음료를 들고 계산대로 갔다. 계산을 마치고 할머님들 대화에 끼어보고 싶어서, 누군지 밝히고 말을 걸었다.

"장사는 언제부터 하셨어요?"(기자)

"80년부터 했어. 빨리 계산해 봐. 얼마나 됐는가."(사장님)

"와, 42년이나 됐네요. 슈퍼는 어떻게 하시게 됐어요?"(기자)

"먹고 살라 그러니까 했지. 애들 어리니까 벌어야 할 것 아니야. 장사하려니까, 양식점 이런 걸 하려면 돈이 들잖아. 그래서 구멍가게 시작한 거야. 애들 다 가르치고 이제 손자들도 대학 다니고 졸업반이야 시방. 여기서 다 나이 들었어."(사장님)

해질녘 어스름한 햇살이 비추는 구멍가게 평상./사진=남형도 기자

한 자리에서만 무려 42년을 이어온 가게. 젊었던 사장님은 가게와 함께 나이 들어 백발이 됐다. 백 몇 개는 됐다던 구멍가게는 다 없어지고, 이제 이곳 하나만 남았다. 요즘 장사는 어떠냐는 물음에 사장님은 "그냥 앉아서 놀잖아, 굶어 죽게 생겼는데"라고 했다. 50년 지기라는 할머님들의 쓴웃음이 함께 터졌다. 그러고 보니 구멍가게에 오기 전 길목에, 커다란 편의점 하나가 있었던 게 생각났다. 어쩐지 다 알 것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바깥에 나와 구멍가게 앞에 놓인, 듬성듬성 까진 곳이 많은 평상에 앉았다. 느긋하고 편하고, 해 질 녘 어스름한 붉은 볕이 은은하게 드리워져 아름다웠다. 음료를 까서 한 모금 마시니 그 순간 더는 바랄 게 없었다. 가게를 나서며 사장님께 남긴 마지막 말은 "오래 남아 계셨으면 좋겠어요"였다. 진지한 내 바람에, 사장님은 "평상에서 명상이나 많이 하고 가"라고 했다.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어느 날 사라져버린 '동네 문방구' 때문에
폐업을 결정한 동네 문방구의 세일. 동네 손님들은 "문방구가 있어서 좋았는데 사라져서 아쉽다"고 했다./사진=남형도 기자
사라져가는 것들을 기록해야겠다고 맘먹고 다니는 중이었다. 실은 폐업해버린 동네 문방구 때문에 시작한 거였다. 어느 날 갑자기, 40~50%씩 할인해서 팔기에 들어가서 물어봤었다. 더는 힘들어서 못 버티겠다고,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요즘은 학교에서 준비물도 다 나눠주고요. 그렇지 않아도 다이X에서 물건을 다 살 수 있잖아요.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도 잘 보이지 않고요. 어쩌겠어요. 할 만큼 했지요."

색종이와 색색의 얌체공 두 개, 주황색 샤프 하나를 사서 나왔다. 짐작하기 힘든, 거대한 시간의 흐름에 사라지는 문방구를 보며 어떤 판단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속절없이 소멸하는 이야기들이 아쉽고 쓸쓸했다. 그래서 다짐했다. 미리 가봐야겠다고, 그걸 함께 생각할만한 무언가로 남겨야겠다고.

마흔 살 기자, 문방구서 산 '봉숭아 물' 들이기
문방구가 깨워준 마흔 살 기자의 소녀 감성. 봉숭아 물을 정성껏 들였더니, 아내가 "손톱에 황달이 온 것 같다"며 낭만을 파괴했다./사진=이정도면 고운 손이라 느끼는 남형도 기자.
서울 관악구에 있는 한 문방구. 초록색 간판에 하얗게 쓰인 이름은 정직하게 '관악문구사'였다. 가게 앞엔 뽑기 자판기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옛날엔 100원짜리 동전 하나면 쪼그리고 앉아 설레었었던. 운 좋게 원하는 만화 캐릭터 인형이 한 방에 나오면, 그걸 꼭 쥐고 마냥 행복했었다.

빛바랜 장난감들이 놓인 곳에 저절로 시선이 갔다. BB탄 장난감 총을 드니, 아예 까먹은 줄 알았던 30여 년 전 추억이 간질거렸다. 값비싼 M16 장난감 총이 있는 친구가 놀이터로 나오면, 서로 편을 먹고 싶어 난리였었다. 야광 BB탄 총알은 더 귀해서, 땅을 보며 다니다 하나씩 주우면 보물을 찾은 듯 기뻤었다.

5000원짜리 장난감 총을 사고 나니, '봉숭아 물들이기' 제품이 눈에 띄었다. 손톱에 봉숭아 꽃잎을 붙이고, 잘 고정한 다음에 하룻밤이 지나면 예쁘게 들었더랬다. 그 나이엔 여자애들이 하는 거라며 손사래 치긴 했지만, 지나고 나니 그저 추억이라고.

"버티기 힘들어", 그리 말하던 문방구 사장님의 말. 누군가 검은 머리 하얘지도록 청춘을 바친 문방구가 빛이 바랜 채 사라지지 않았으면. 사진 오른쪽은 기자가 어렸을 적 즐겁게 가지고 놀던 장난감 총./사진=하나 더 사고 싶지만 혼날까 봐 참은 남형도 기자.

이것저것 사고 나서 사장님과 대화를 나눴다.

"아우, 한 40년 됐지요. 머리가 까매 가지고 문방구를 시작했는데 이렇게 하얘졌어."(사장님)

"문방구가 저랑 동갑이네요. 요즘 하시기 많이 힘드시지요?"(기자)

"그러게, 옛날엔 아이들도 많이 왔는데…요즘은 노트도 잘 안 나가요. 2000년대부터는 매출이 50%씩 줄었지. 학교서 학용품 주고 필요하면 마트서 사고 하잖아. 지금은 적자야."(사장님)

어렸을 땐 구경할 게 많아 고개를 젖혀 한참을 올려다봤던 문방구. 작았던 아이의 키가 자라서인지, 돌아서는 길에 바라본 문방구가, 사장님이, 참 많이 작아 보였다.

만화는 넘기며 보는 게 '맛'이었는데
만화방서 라면을 못 먹은 게 아쉬워서, 아무래도 다시 한 번 가야할 것 같다./사진=취재하느라 맘껏 못 즐긴 남형도 기자
만화를 맘껏 볼 수 있는 '만화방'. 만화 카페가 아닌 그냥 만화방. 안락한 소파에 앉아 보고픈 만화책을 잔뜩 쌓아놓고, 라면 한 그릇을 먹고 있노라면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었다.

서울 종로에 있는 만화방에 갔다. 쥐 죽은 듯 고요한 만화방엔 심신 안정에 좋은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코까지 골며 곤히 자는 이들이, 소파의 안락함을 고스란히 증명해줬다. 책장에선 낡은 만화책 냄새가 배어 나왔다. 오래 잊고 있던 제목들이 눈에 띄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부리나케 가방을 내려놓고 삼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겹쳐진 책상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밀며 만화책을 엄선했다. 어렸을 때 좋아했던 만화책 '짱'(학원물) 몇 권을 옆에 두고 소파와 물아일체가 되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위로 미는 게 아닌, 서걱서걱한 종이를 넘기면서 보는 맛이 달았다. 나쁜 놈이 주인공의 주먹을 잡으며 "좋은 주먹이다. 특히 연타에 이은 마무리 펀치는 일품이었어"라고 할 땐 머리털이 쭈뼛 서긴 했지만. 그래서 봤으니까.

종이로 된 만화책을 보는 맛이 있다. 약간 너덜너덜하고 손때가 묻어 있으면 조금 더 정겨운. 좋아하던 만화책들./사진=남형도 기자

농구 만화 '슬램덩크'에서 가장 좋아하는 불꽃 남자 정대만도 다시 보고 싶었다. 만화책을 꺼내어 좋아하는 장면을 찾아서 봤다. 엉망이 된 정대만이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 싶어요…"라며 울 땐, 수십 번이나 봤음에도 전율이 돋았다.

모처럼 상기한 추억과는 달리 만화방은 무거웠다. 빈자리가 많았고, 사장님의 표정이 어쩐지 어둡게 느껴졌다. 쥐포를 굽던 그는 2016년부터 만화방을 시작했다고 했다.

"요즘 만화방이요, 엄청 안 되죠(허탈한 웃음). 만화를 옛날만큼 잘 안 봐요."(사장님)

"아무래도 웹툰이나 그런 영향도 있겠지요."(기자)

"그것도 그렇고, 코로나 영향이 커요. 코로나 이후 매출이 50% 이상 줄었으니까요. 인근 직장의 영업사원 분들, 여행사 직원분들, 많이 오셨었는데 이제 안 오시고요."(사장님)

"고민 많이 되시겠어요."(기자)

"그쵸. 적자니까요. 대출받아서 버티고 있어요. 코로나가 좀 지나가야 나아질 텐데…."(사장님)

만화방 사장님께 들려드리고 싶었던, 슬램덩크 명대사./사진=남형도 기자

그날 슬램덩크에서 봤던, 좋아하는 안 선생님의 명대사를 들려주고 싶었다.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 내 삶의 고비에서도 수차례 버팀목이 되어줬던 그 말을. 그러나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사장님에게 어떤 말도 위로가 될 것 같지 않아서.

서울대 학생들 사랑방이었던, '동네서점'
서울대 학생들의 사랑방과 같았던, 누구나 그날이 오길 꿈꾸었던 동네 인문사회과학 전문 서점, '그날이 오면'./사진=남형도 기자
서울대학교 앞 인문사회과학 서점인 '그날이 오면'에 갔다. 1988년부터 34년째 이어져 온 유서 깊은 공간이란다. 책만 사는 곳이 아니라 학생.노동.사회 운동이 활발하던 그 시기에, 서울대 학생들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고, 공부하고, 토론하고, 사색하던 장(場)이었다.

오래된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책 내음은, 새 책이더라도 묵직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촌철살인을 한 땀 한 땀 새겨놓은 누군가의 생각이, 관점이, 목소리가, 자그마한 공간에 울리는 듯했다. 좁다란 책장 사이를 껴안을 듯 오가며 무언가라도 사고 싶어졌다.

자릴 오래 지켜왔던, 지금도 지키고 있던 책방 주인 김동운 씨에게 물었다. 동네서점에서만 가능한, 이런 대화가 시작됐다.

"사장님, 소설책 한 권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기자)

"음, 뭐 좋아하는 작가나 주제가 있으실까요?"(사장님)

"김연수 작가님이나, 김애란 작가님이요. 그리고 사회문제가 깊이 녹아 있으면 좋겠습니다."(기자)

책방 사장님이 추천해준 소설책들./사진=남형도 기자

그러자 김 씨는 짙은 남색 배경의 책 한 권을 어딘가에서 꺼내와 내게 보여줬다.

"김연수 작가의 <밤은 노래한다> 보셨어요? 일제 독립운동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재로 한 소설이거든요. 만주 쪽의 항일 운동, 무장투쟁 그런 이야기요."(사장님)

사장님은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황석영 작가의 <철도원>도 함께 추천해주었다. 그중에서 김연수 작가의 책으로 샀다. 그리고 궁금했던 이야길 들었다. '그날이 오면'을 어떻게 시작한 건지.

현실을 치열하게 인식하고, 나아지길 간절히 바라던 시절.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열심히 읽고 모색하던 그때, 학생 운동에 이어 노동운동을 하다 공장서 해고된 그는 1993년 책방 주인이 됐다. 원래 주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해, 그 뒤를 잇게 된 거였다.

단순한 책방이 아녔다. '매일 들리지 않으면 가시가 돋는다'란 말이 있을 만큼, 서울대 학생들에게 사랑받던 공간이었다. 책을 보고, 세미나와 모임을 하고, 책방 앞에서 수백 명이 모여 항의 집회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쇠락하면서 위기가 찾아왔다. 적자가 심각해질 무렵, '그날이 오면'을 사랑하는 이들이 후원회를 결성해 이 서점을 지켜왔다.

'그날이 오면'을 지키는, 김동운 사장님./사진=남형도 기자

"책방 이름에 대한 설명을 직접 들려주셨으면 좋겠어요."(기자)

"상록수 저자(심훈) 시문의 시잖아요. 그 당시 80년대 새로운 사회를 바라는 희망, 바람이 그 노래 안에 다 담겨 있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고요."(사장님)

"지금 시대에서, '그날'은 온 걸까요?"(기자)

"어려운 노동자와 농민들, 국민이 좀 더 해방되는 세상. 많은 이들이 자유롭고 억압이 없는 나라. 물질적인 것보다 사람이 중심이 되는 것들이랄까요. 여전히 그 과제는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사장님)

책을 사러 들어갔는데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된 걸 보며, '그래 이런 게 동네서점의 묘미였지'하고, 참으로 오랜만에 새삼 떠오르게 됐다.

20년 만에 찾은 오락실, 격투 게임 10초 만에…
서촌에 있는 옥인오락실. 따땃하고 즐거운 곳./사진=남형도 기자
서촌에 있는 '옥인 오락실'에 갔다. 아마 고등학교 졸업 이후엔 한 번도 안 갔으니, 20년 만이었다. 입구엔 오락실의 세월을 드러내 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1988년부터 2011년까지 있었던 '용오락실'을 기억하는 이들의 도움으로 살아난 거란다.

보글보글, 스트라이커 1945, 스트리트 파이터 2, 철권 같은 오래된 게임들이 날 반겼다. 100원짜리 동전을 넣으려고 봤더니 한 판에 500원이었다. 국민학교 때 하던 스트리트 파이터 2에 앉아, 켄을 골라 블랑카와 싸웠다. 뒷걸음질 치며 장풍만 쏘다가 10초 만에 패했다. 이럴 때면 친구들이 놀려댔었는데, 그럴 때 하던 말이 있었다. "여기 컴퓨터 난이도가 너무 높아."

여러 게임을 했는데 도합 5분을 못 넘긴 것 같다. 조이스틱을 잡기엔 손이 너무 커버린 것일지./사진=500원짜리 동전을 삼킨 오락기 앞을 못 떠나는 남형도 기자.

철권'폴 피닉스(머리 세우는 데 왁스 10통 쓰는 친구)''쿠마'란 곰탱이 캐릭터를 골랐다. 폴로 뒷걸음질 치며 "안 돼 안 돼 오지 마"하며 붕권만 쓰다가 또 패했다. 열 받아 펀치 게임을 하려다 손목 관절 나이를 생각해 참고, 인형 뽑기를 하다 톡 떨어져, 분노 게이지가 초필살기를 쓸 정도로 찼다.

괜찮았다, 원래 오락실은 결국엔 동전 다 잃고 구시렁거리며 나가는 게 제맛이니.

온돌방서 들은, 42년 된 '철물점' 이야기
42년 된 남성역 인근 '설화철물점'과 사장님(오른쪽). 서울시 오래가게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사진=남형도 기자
간판만 봐도 세월이 묻어나던 42년 된 '설화철물점'. 조용히 가게에 들어가니 사장님이 주무시고 있어, 가게를 구경하며 기다렸다. 나사못을 살까 싶어 만지작거릴 때쯤, "언제 와 있었어?"라며 사장님이 일어나 내게 물었다. 곤히 주무셔서 안 깨웠다고 했고, 함께 웃었다.

요즘은 다 파는 생활용품점이 많아 쇠락했지만, 물건을 사며 새삼 철물점의 매력이 떠올랐다. 생활하며 필요한 잡다하고 다양한 것들을 잘 모를 때, '이러이러한 것'을 달라고 해도 척척 꺼내어 주는 사장님의 내공의 힘이랄까. 취재를 많이 다니느라 신발이 자주 더러워지는데, 닦을만한 게 없느냐고 묻자 사장님이 이렇게 답했다. "아, 그건 수세미에 물 묻혀서 닦고, 마른걸레로 싹 다시 닦으면 금방 마르지."

철물점 이야기를 듣고 싶어 왔단 말에 사장님은, 가게 끝자락에 있는 소담하고 따뜻한 마루 위에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믹스커피를 타주며 진하게 할지, 연하게 할지를 물었다. 다 좋다고 하자 진한 것을 내게 건넸다. 엉덩이도, 입가도, 마음도 금세 뜨끈해졌다.

42년 전, 충남 논산에서 올라와 철물점을 차렸단다. 장사라곤 '장'자도 몰랐던 젊은 여성이 하기엔 벅찬 일이었다. 리어카에 시멘트를 실어 언덕을 올라가며 배달했다. 남동생과 같이 애를 많이 먹었다.

"그때 바지도 안 입었었어. 치마 길게 입고, '거지 커트'라고 머리를 이렇게 하고, 귀걸이 달랑달랑하고 그랬지. 사람들이 '아니, 화장품 장사를 할 사람이야'라고 그랬어(웃음)."(사장님)

못이 뭐가 뭔지도 잘 모르던 이가, 1000가지도 넘는 철물점 물건을 척척 꿰기까진 부단한 노력이 필요했다. 1톤짜리 화물차를 몰아가며 배달하고, 2~3년을 그리 납품한 건설현장서 돈 1억 2000만 원을 떼이기도 했다.

"장사는 좀 어떠세요, 요즘에는요."(기자)

"안 되지. 보다시피 손님 안 오잖아. 이걸 치우자니 물건을 어디다 다 버릴 수도 없고."(사장님)

"생활용품점 많이 생겨서 영향이 있으시겠지요, 아무래도."(기자)

"마트 있지, 생활용품점도 그렇고. 거기에선 물건을 많이 가져다 놓고 싸게 팔잖아. 우린 10개씩, 이렇게 들여오는데. 철물점이 지금은 많이 없어졌어."(사장님)

무거운 걸 많이 들어서 손가락이 이리 휜 거라고./사진=남형도 기자.

50년도 넘었단 나무로 된 돈 통에, 손때가 잔뜩 묻은 주판이 눈에 들어왔다. 148cm의 작은 키에, 4m짜리 파이프며 무거운 물건을 수도 없이 드느라 손가락도 휘고, 허리 디스크에 목디스크도 이겨내며 철물점을 지켜온 사람.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자녀 둘을 다 키워낸 사람. 그렇게 어렵사리 지켜온 거리 광경은 여기 말곤 싹 다 바뀌었다.

사장님의 마지막 말이 이랬다.

"뭐를 크게 하려고 하지 말고, 열심히만 하면 밥은 먹고 살아. 늦었어, 어여 가. 아내 기다리겠어."

돌아오는 지하철서, 넥스트 CD를 들고…
동묘 앞 레코드 가게서 2만원에 구입한 넥스트 초판 CD./사진=남형도 기자
동묘 앞 오래된 레코드 가게서, 중학교 때부터 듣던 넥스트(N.EX.T) 1집 초판 CD를 사는 걸로 여정이 끝났다.

돌아오는 지하철서 앨범 자켓을 보다,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학교며 독서실에 가던 때가 생각났다. CD가 자주 튀고, 재생이 멈춰서 여간 불편한 게 아녔다. CD를 하나하나 사야 하니, 그 부담은 또 오죽했으랴.

지금은 많은 게 편해졌다. 원하는 음원을 실시간으로 듣고,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고, 좋은 건 아내와 공유하고. 그러나 사라진 것들을 기록하며 조금은 그리운 것들이 생각났다. 좋아하는 가수 CD가 나왔냐며 음반 가게를 자주 들락거리던 기다림의 설렘이랄지, 카세트테이프 땐 음악을 골라 듣기 불편해 결국 꾸역꾸역 다 듣다가 그 가수가 더 좋아져 버렸던, 그런 것들.

그러니 삶의 모든 것엔 양면이 있어 무언가 채워지면 무언가 사라지는구나 싶다. 그건 알아채기도, 의식하기도 힘든 사이에 문득 그리된다고. 사람들 기억에서 다 사라지면, 우린 무언가 중요한 걸 완전히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KT 통신구 화재 때, 핸드폰이 다 먹통이 됐을 때, 사라져가는 공중전화에 다들 몰려갔듯이.

파란 바탕에 쓰여진 이름이 참 좋다, 종로 구멍가게인 '희망상회'./사진=남형도 기자.

43년 되었다는 서울 종로의 구멍가게, '희망상회' 사장님이 내게 이렇게 말했었다.

"여기 쪽방촌 사는 분들은 소주 가격을 100원, 200원도 따지며 아끼거든. 우린 소주를 1400원에 파니까, 조금 싸게 주고 그래. 단골들은 여전히 이모네 집 와서 사러 오고, 하하."(사장님)

그런 구멍가게도 다 사라지고, 어쩌면 가까운 미래엔 무인 편의점에 로봇만 남아, 고단한 하루에 소주 한 병 먹고픈 이들이 그 앞을 망설이며 서성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조금은 바라본다. 불편함 안에 늘 깃들어 있던 사람, 대화, 틈, 이런 것들이 다는 사라지지 않기를.

뭐라도 사려, 소주 두 병을 사서 나서던 내게, 희망상회 사장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적당히 먹어요. 건강 해치지 않게."

에필로그(epilogue).

구멍가게 '자하슈퍼'서 난롯불을 쐬던 할머님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연탄불 이제 갈아야 것다."

그때 사장님이 답한 말이 어쩐지 회고(回顧)처럼 쓸쓸히 들렸다.

"이제 갈아야지. 여태 따뜻하게 해줬으니까."

연탄을 빼내었을 때, 새 걸로 바꾸기 전에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다. 오래도록 뜨거웠던 그 열기를, 기록으로 고스란히 가두고 싶어서.

꺼져가는 연탄 불씨를 더 오래 살리려 호호 불다가, 얼굴에 새까맣게 먼지가 묻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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