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색에 잠기다

오현주 2022. 3. 22. 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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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스페이스선 '빛의 풍경' 전
유리에 LED로 온기담은 '황선태'
'물 드로잉' 기법 구현한 '송창애'
필름에 찰나의 섬광쌓는 '이정록'
조각으로 그림자를 빚는 '엄익훈'
4인4색 '빛의 예술' 20여점 걸어
서울 중구 통일로 아트스페이스선이 올해 첫 기획전으로 ‘빛의 풍경’을 연다. 22일 개막하는 전시는 작가 황선태·송창애·이정록·엄익훈이 ‘빛’을 키워드로 각기 다른 장르에서 다른 기법으로 작업한 4인4색을 펼친다. 왼쪽부터 엄익훈의 ‘꽃을 든 소녀’(2019·), 송창애의 ‘워터스케이프-물꽃’(2021), 황선태의 ‘빛이 드는 공간’(2016), 이정록의 ‘나비’(2015)(사진=아트스페이스선).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오후 5시쯤 바로 내 공간에서 생긴 일’이라고 해두자. 친숙한 일상의 공간에 낸 창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의 밀도가 말이다. 노르스름하게 사선으로 스미는 햇볕의 색이 말이다. 작가 황선태(50)는 ‘공간에 빛을 들인다.’ 슬쩍 분위기만 내는 정도가 아니다. 진짜 빛을 꽂는다. 빛이지만 사실은 볕이다. 밝기를 말하려 했겠지만 온기가 먼저 다가온다는 뜻이다. 길게 뻗은 초록 선뿐이던 단순하고 미니멀한 공간을 빛으로 채워내는 순간, 드라마틱한 움직임이 생긴다. 따뜻한 피가 돈다고 할까.

#2. ‘언제인지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무정형 세상’이다. 푸른 바탕에 하얀 선만 뒤엉켜 있을 뿐. 그 선들이 이리저리 꿈틀대며 산을 세우고 구름을 날리고 꽃을 피우고 풀을 키운다. 결국엔 빛을 만든다. 세상이 태어나던 그때, 태초의 풍경이란 게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깊은 물속에서 생명을 알리는 순간 말이다. 마치 누군가 지켜보듯 핀조명 하나만 내리박고서 말이다. 그렇게 작가 송창애(49)는 ‘물속에 빛을 들인다.’

송창애의 ‘워터스케이프-물꽃’(2021). ‘물속에 빛’을 들이는 작가는 ‘물 드로잉’ 기법으로 장지에 깊고 푸른 전통안료를 올려두고 공기압축기를 이용해 강한 물을 쏘아 형체를 만들어낸다(사진=아트스페이스선).

#3. ‘시간이 멈춘 자연에서 벌어진 초자연적 현상’일 거다. 분명 세상 어디엔가 있을 장소인데 그 위에 머무르는 빛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깊은 숲속 단 한 그루의 나무만 빛을 뒤집어썼고 어스름한 호숫가에 노란 광채를 내는 나비가 떼로 난다. 작가 이정록(51)은 ‘사진에 빛을 들인다.’ 빛이 스며야 사진이 나오는 건 당연한데, 차고 넘치는 빛의 기운이 사진에 차마 스미지 못해 삐져나왔다고 할까.

#4. ‘현실과 환영이 엉킨 그 찰나에 벌어진 일’이라고 해두자. 총 맞은 것처럼 여기저기 구멍까지 낸, 낱낱이 파편화해 생김새도 가늠할 수 없는 불분명한 추상의 조각이 말이다. 빛을 먹고 내뱉은 그림자는 어디 하나 축난 데 없는 멀쩡한 사람이다. 작가 엄익훈(46)은 ‘그림자에 빛을 들인다.’ 빛을 받는 건 조각이지만, 정작 그림자가 없다면 그조차 의미가 없다. 조각이 속내를 털어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림자에게.

엄익훈의 ‘목마 타는 아이’(2020). ‘그림자에 빛’을 들이는 작가는 조각으로 ‘그림자 회화’를 그린다. 조각이 빛을 만나니 실체와 전혀 다른 형체의 그림자가 생겼다(사진=아트스페이스선).

평면·조각 넘어 한 단계씩 더 붙인 ‘빛 작업’

서울 중구 통일로 아트스페이스선이 올해 첫 기획전에 ‘빛’을 밝혔다. 작가 황선태·송창애·이정록·엄익훈이 4인4색전으로 여는 ‘빛의 풍경’이다. 평면·조각·설치 등 20여점을 내놨다.

각기 다른 기법과 장르의 작가 4인을 한자리에 묶을 수 있는 연결고리는 마땅히 빛이다. 하지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빛을 그리고 빛을 조각하는 작업과는 다르다. 회화라고 하기엔 섭섭하고 조각이라고 하기엔 허전하다고 할까. 적어도 한 단계씩은 넘고 붙이는, ‘특별한 작업’이 더해져야 나오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감히 ‘빛을 창조’한다고 할까.

황 작가는 ‘미디어회화’를 한다. 강화유리에 스케치한 이미지를 입힌 뒤 LED로 빛을 붙이고 그림자를 덧대는 방식이다. 화룡점정은 스위치에 내준다. ‘온’으로 올리는 순간 냉랭한 유리판이 환해지며 온기가 감돈다. 선뿐인 납작한 사물에 입체감이 생기는 건 화려한 덤이다. 이번 전시에선 대표작이자 연작인 ‘빛이 드는 공간’(2016·2017·2018)이 변천해온 과정을 펼쳐냈다.

황선태의 ‘빛이 드는 공간’(2018). ‘공간에 빛’을 들이는 작가는 강화유리에 스케치한 이미지를 입힌 뒤 LED로 빛을 붙이고 그림자를 만드는 방식으로 ‘미디어회화’ 작업을 한다(사진=아트스페이스선).

‘물 드로잉’이란 독특한 기법을 꺼내든 이는 송 작가다. 장지에 깊고 푸른 전통안료를 올려두고 공기압축기를 이용해 강한 물을 쏘아 형체를 만드는 거다. 핵심은 수압이란다. 물의 흐름이 끊어지거나 혹여 흔들리기라도 하면 의지와는 다른 엉뚱한 형체가 나온다는 거다. 연작 ‘워터스케이프’(2014·2017·2019)를 비롯해 최근 몰두하는 ‘워터스케이프-물꽃’(2021) 등을 걸었다.

기법·장르 달라도…빛을 창조하는 작가들

‘사진을 그린다.’ 이 작가의 작업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렇다. 신이 빚은 듯한 신비로운 빛을 씌워 현재의 공간을 태고의 우주로 되돌리는 듯하다. 자연광, 플래시의 순간광, 서치라이트를 총동원한다. 카메라렌즈를 오래 열어두고 어둠이 내릴 때부터 플래시를 계속 터뜨리며 순간광을 쌓는 것부터다. 아날로그 필름에 찰나의 섬광이 내는 흔적을 입히는 식. 그렇게 만든 빛을 나무에 매단 연작 ‘생명의 나무’(2013), 공기 중에 흩뿌린 연작 ‘나비’(2015) 등이 전시에 나온다.

이정록의 ‘생명의 나무’(2013). ‘사진에 빛’을 들이는 작가는 아날로그 필름에 찰나의 섬광이 내는 흔적을 입히는 식으로 어떤 풍경이나 공간이 품은 단순치 않은 에너지를 끌어내 신화적인 세계를 만든다(사진=아트스페이스선).

조각으로 그리는 그림이 ‘그림자’다. 엄 작가의 작업을 요약하면 ‘그림자 조각’ ‘그림자 드로잉’으로 정리된다. 조각을 하고 그림도 그리는데, 결국 그림자가 없으면 완성이라 할 수 없는 작품을 빚어내는 거다. 사람의 근육과 골격을 떠올릴 형체는 돌돌 말아 연결한 스틸판. 작정하고 끊지 않으면 끊기지 않을 무한반복이 특징이다. 그런 조각에서 어찌 저런 그림자가 나오는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건 조각의 마음이니까. ‘꽃을 든 소녀’(2019), ‘목마 타는 아이’(2020) 등을 걸었다. 전시는 4월 30일까지.

오현주 (euanoh@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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