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서 뛰노는 아이들이 있는 곳..'아, 여기는 다른 세계구나' [다른 삶]
[경향신문]
주말에 점심을 먹으러 해변 식당에 갔다. 날씨도 좋고 해안도 잠잠해 해양 스포츠를 즐기기 좋은 날이었다. 그곳에서 크리스와 빅토리아를 만났다. 크리스는 그리스계 호주인이다. 수중 영상감독으로, 인도네시아의 잘 알려지지 않은 다이빙 명소를 소개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날은 아들과 휴가를 보내기 위해 누사프니다에 온 참이었다. 그의 아들은 열 살 남짓이다. 발리의 국제학교에 다닌다. 크리스는 일을 할 땐 그저 친절하고 늠름한 사람 같았는데 아들과 있으니 살갑기가 비단결이다. 음식은 맛있니, 채소를 남겼구나 이따 배고프겠다, 어딜 가고 싶니, 뭘 하고 싶니, 꼼꼼히 챙긴다. 친구들이 ‘F’로 시작하는 단어를 뱉을 때마다 애 앞이라고 입단속을 시키고, 그런 그가 낯설어 친구들은 웃는다. 나는 크리스에게 아들과 자주 시간을 보내느냐고 물었다.

“그러려고 하는데 최근에는 출장이 많았어. 그래서 주말을 꼬박 같이 보내려고 데리고 나왔어. 작은애는 아직 어려서 엄마 ‘껌딱지’거든. 그래서 우리끼리만 왔어. 다음엔 온 가족이 같이 오려고.”
식사를 마친 후 크리스는 아들과 스노클링을 나갔다. 누사프니다는 해안이 얕지 않아 수영이 어설프면 겁먹기 십상인데 아들은 구명조끼도 입지 않고 씩씩하게 따라나선다.
러시아인 빅토리아는 남편과 함께 누사프니다에서 리조트를 운영한다. 아이가 셋인데 큰아이 둘이 발리의 국제학교에 다니기 때문에 주말 부부로 지낸다. 평일엔 빅토리아가 발리에서 아이들을 돌보다가 주말이면 온가족이 누사프니다에 모인다. 그날 빅토리아의 아이들은 프리다이빙 수업에 참가했다. 다섯 살 막내부터 열두 살 첫째까지, 아이들이 복장을 챙기며 준비를 하는 동안 어른들끼리 한바탕 농담을 주고받는다. 그 역시 러시아인인 프리다이빙 강사가 생선잡이용 작살을 만지작거리는 걸 보고 누가 물은 거다.
“오 그게 자네가 아이들을 말 잘 듣게 하는 비결인가?”
“그렇지. 우리 러시아인에게 장난이란 있을 수 없어. 어린이들, 다이빙을 할 거면 진지하게 하라고!”
강사는 작살을 휘두르는 시늉을 했다. 빅토리아가 맞장구를 친다.
“그럼 그럼. 그게 러시아의 정신이지.”
이내 아이들은 프리다이빙을 하러 떠나고, 빅토리아는 “두 시간 동안 해방이다!”라고 만세를 부르며 해변 식당을 떠났다.
나는 전날 밤 파티에서 만난 프랑스인 부부의 딸이 떠올랐다. 내 집 인근에서 리조트를 운영하는 부부로, 그들은 아이가 기저귀를 뗄 무렵부터 파티에 데리고 다녔다. 파티는 주로 시끄러운 음악 속에 새벽까지 이어진다. 이제 여섯 살이 된 아이는 그 안에서 맨정신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아내 함께 시간을 보내는 법을 안다. 예컨대 술도 끊었고 사교적이지도 않은데 예의상 얼굴이나 비추러 파티에 들르는 나 같은 사람 말이다. 그날 우리는 클럽에서 나눠준 야광 밴드를 이리저리 연결해 다른 형상을 만들면서 놀았다. 아이는 신이 나서 온 클럽을 돌며 야광 밴드를 수거해왔다.
그 주말을 보내면서 나는 발리에 살아도 그리스인은 그리스인답게, 러시아인은 러시아인답게, 프랑스인은 프랑스인답게 아이를 키우는구나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만난 이곳 이민자 자녀들의 공통점은 있다. 부모와 보내는 시간이 많고 야외활동 기회도 많다 보니 정서가 안정되고 다른 세대와도 자연스럽게 어울린다는 점이다. 한국의 여초회사에 다니면서 나는 바쁜 아침에 밥투정, 잠투정하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다 끝내 화를 내고는 부랴부랴 출근해서 죄책감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자주 보았다. 주말에 아이와 놀아주려다 상사의 긴급 호출을 받고 직장으로 달려가는 아버지도 보았다. 아이의 잘못도 부모의 잘못도 아닌데 그렇게 가족의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그들에게는 이게 다 꿈같은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발리가 자녀 키우기에 천국인가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부모가 여기서 생존할 수 있는가는 일단 논외로 하자. 아이들만 놓고 보자면 사교육 압박이 없고, 불건전한 문화에 노출될 위험이 적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건 좋다. 저렴한 비용으로 국제학교에 다니며 여러 언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이곳 이민 2세들은 영어, 인도네시아어, 그리고 부모의 주 언어까지 3개 국어 이상을 하는 게 보통이다. 언어를 시험 성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세계를 경험하는 도구로서 중시하는 서구인들의 기준으론 매우 좋은 환경이다. 하지만 국제학교의 수준은 천차만별이다. 발리는 외국인의 취업비자 단속에 엄격한데 무허가 교사를 쓰다가 단속에 걸려 혼쭐이 나는 학교들도 있다. 부모 마음은 어디나 같은지, 그러다 대학은 제1세계로 유학을 보내고 싶어 하는데 그게 여의치 않을 수도 있다. 학업과정이 다르니 따로 공부할 것도 많고 물가 차이도 있고 시골에 살다 도시로 가는 격이라 아이들 적응 문제도 있다.

이민자 부모들은 발리에 살아도
각 나라 방식으로 아이를 키운다
그럼에도 함께 많은 시간 보내고
정서가 안정적이라는 건 공통점
아이들에 친화적이고 자유로운 곳
어른과 자연스럽게 섞이는 세계
출산·양육이 짐이 된 한국과 다른
이곳서 잃어버린 시절을 다시 산다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는 결정적 장점 한 가지는 이곳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아이들에게 친화적이고 자유롭다는 것이다. 내가 발리에서 처음으로 ‘여기는 다른 세계구나’라는 강렬한 인상을 받은 건 야자수나 맑은 공기나 서핑 비치 따위가 아니라 골목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았을 때다. 발리에 막 도착한 나는 반사적으로 ‘왜 이 시간에 아이들이 학원이 아니라 여기에 있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서울 생활 20년의 기억을 맨 앞장까지 넘겨보았지만 비슷한 풍경을 찾을 수 없었다. 무리 지어 노는 아이들을 본 건 아파트 놀이터나 키즈카페, 공원처럼 제한된 장소가 전부였다. 시골은 시골대로 애 낳을 사람이 없어 아이들 무리를 보기 어려웠다. 어른들과 아이들의 공간이 분리되어 있으니 가족 중에 아이가 없으면 성인이라도 양육에 무지할 수밖에 없다. 공공시설에서 애들이 울부짖는 게 부모가 염치없어서가 아니라거나, 어린이들의 체력은 하루 세 시간 헬스를 하고 풀코스 마라톤을 하는 성인조차 너끈히 능가한다거나, 애들은 위장이 작아 조금씩 자주 먹어야 한다는 사실 따위를 까맣게 잊고 사는 성인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이 작은 인간들에게 너그러울 수도 없다. 나는 잘 모르니까 거리를 두고 싶다는 쪽이었다. 그렇게 어른을 어려워하는 아이였던 나는 아이를 어려워하는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어딜 가나 아이들이 있다. 인구가 4만5000명밖에 안 되는 누사프니다에서도 해변에 가면 자기들끼리 멱을 감는 꼬마들이, 슈퍼마켓에 가면 밤마실 나온 청소년들이 바글거린다. 밥집을 가든 술집을 가든 부모를 따라 놀러왔거나 가족의 일을 돕는 미성년자들이 있다. 마을을 돌아다닐 땐 사람이라면 그저 반가운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면서 “할로! 할로!” 인사를 하거나 손을 흔든다. 아이들과 어른들의 세계는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다. 그 덕에 나도 아이들과 어울리는 법을 조금씩 배우고 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북적이는 풍경이 주는 따뜻함과 활기가 있다. 자연소멸을 향해 장렬히 나아가는 대한민국 출신으로서, 나는 자주 “아 이곳은 젊은 나라구나!” 감탄한다. 출산과 양육은 미친 짓이라 생각하는 현대 한국 젊은이들에게 “애는 낳으면 알아서 큰다” “사람은 제 먹을 건 갖고 태어난다” 잔소리하는 노인이 있다면 아마 이와 비슷했던 과거의 한국을 기억하는 탓일 게다. 나는 여기서 잃어버린 시절을 다시 살고 있다.
내 주변 이민자들은 대개 로컬들보다는 교육에 많은 투자를 하고, 다양한 경험을 만들어주려 애를 쓴다. 하지만 동네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제1세계의 시선으로 보자면 방목에 가까운 느슨함을 유지한다. 그 경험이 이민 2세들의 인생에 궁극적으로 어떤 작용을 할지는 모르겠다. 다만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들이 오래 남는다는 건 안다. 스노클링을 하러 가는 크리스 부자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게도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의 방학 숙제를 돕는다고 아버지가 과자 상자를 구부려서 배를 만들어주었는데 그 배가 너무 멋져서 감탄했던 순간이다. 그런 기억이 더 많았다면 나도 좀 따뜻한 인간, 아버지와도 덜 데면데면한 딸이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쉽게도 그 시간은 오래전에 지나갔다. 물론 세상에는 삶의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데도 모르고 지나치지 않도록, 이런 여유로운 세계도 있다는 걸 알아두면 좋겠다.
▶이숙명
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
이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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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잡지 ‘프리미어’, 패션지 ‘엘르’ ‘싱글즈’ 등에서 일했다. 27년차 프로 독거인으로서 <혼자서 완전하게>라는 책을 썼으며, 2017년 한국을 떠나며 짐정리를 하느라 고군분투한 얘기를 <사물의 중력>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현재 발리 인근 누사프니다에 살면서 가끔 글을 쓰고 요가와 스쿠버다이빙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