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1년 3월 19일,
한반도를 떠들석하게 하는 전시가 열립니다.

70여 점의 풍경화와 정물화로 채워진 전시
당시에 생소했던 미술전시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시내는 북적였는데요.

단 이틀 간 열린 전시를 보러
오천 명이 넘는 이들이 방문할 정도였죠.

전시가 많은 이들에게 각광받았던 이유는
다름아닌 최초의 유화 개인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서양화가 들어오며 여러 협회나
단체가 여는 전시가 있었지만
개인이 여는 전시는 처음이었던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는데요.

사람들을 더 놀라게 한 사실은 한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바로 이 개인전의 주인공이 여성이란 사실이죠.

미술의 불모지였던 20세기 초 조선 땅
사회적 진출에 제약이 많던 여성이라는 신분으로
서울 중심에서 최초로 개인 전시를 연 예술가.

나혜석은 어떻게 미술계의 중심에 올라서게 된 걸까요?

나혜석의 작품은 독특합니다

정면을 향하는 다부진 자세
굳게 다문 입술
어딘가 강한 의지가 느껴지는 이 그림

이 작품은 나혜석의 자화상인데요.
인물의 특징만을 살린
과감한 형태와 색채의 사용,

이목구비의 비율을 작가만의 관점으로 변형한 것까지
아주 독특한 기운을 풍기죠
하지만 나혜석은 처음부터 독특한 그림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1896년 4월,나혜석은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다섯 남매가 함께 지낸 집안 속에서
남다른 교육환경을 살아왔는데요.

조선후기에는 여성에게
교육의 기회가 잘 주어지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혜석의 아버지는 달랐죠.

“교육만큼은 차등을 두지 않아야한다”는 철학 아래
아버지는 나혜석에게도 아낌없는 지원을 했습니다.

가족의 전폭적인 지지와 함께
나혜석은 어릴적부터 미술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는데요.
꽃과 나무, 자연을 그리길 좋아했고
이러한 생각은 자연스레 화가를 꿈꾸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자 가족은 나혜석에게
당시 일반적인 가정이 그렇듯 결혼할 것을 권유했는데요.

하지만 나혜석은 다른 길을 택합니다.
당시 조선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던 서양화를 더 공부해야겠다 결심했죠.
이러한 결심과 함께 나혜석은 일본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일본 5대 미술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도쿄여자미술학교에 입학하죠.

당시로서는 여성 최초의 서양화 유학생이었습니다.
나혜석은 이곳에서 수채, 유화 물감을 사용하며
서양화 재료와 기법을 익혔습니다.

자신이 꿈꾸던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게 된 것이죠.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온 그는 새로운 작업에 매진합니다
바로 목판화 삽화 작업이었는데요.

당대의 일상 속 모습들을 담는 작품들을 많이 남겼죠
이는 당시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던 화가들이
택한 방법이기도 했는데요.

특히 나혜석은 목판화를 활용해
여성을 주제로 한 풍속화를 남겼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대표적인 목판화 중 하나인
<저것이 무엇인고>입니다.

목판 특유의 투박함과 단순함
동시에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선이 눈에 띄죠.

이 작품은 바이올린가방을 들고 길거리를 지나는 여성을 두고
나누는 두 남성의 대화 모습을 담고 있는데요.
이는 당대 신여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담고 있습니다.

작품의 양 옆에 짤막한 해설을 통해
호의적이지 않던 당대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죠.

이 시기 나혜석은 그림 뿐만 아니라
간단한 시나 소설 등 문학에 까지 손을 뻗치며
작품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각종 잡지와 신문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죠.

창작의 열정이 불타올랐던 그에게
작품활동의 경계는 무의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회 운동에 직접 참여하며
적극적으로 사회문제를 직시했는데요.

당대 많은 지식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혜석 또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슬픔을 갖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요.
실제로 나혜석은 1919년
3·1 운동에 가담했단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습니다.
이로 인해 5개월간의 형무소 생활을 거쳐야 했죠.

20대 중반의 나이에 접어들자 가족들은 계속해서
나혜석에게 결혼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나혜석은 계속 거절했지만
평소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오빠의 적극적인 권유로
같은 일본유학생 김우영을 만납니다.

김우영의 적극적인 구애 속에
둘의 사랑은 꽃피게 되는데요.
결혼을 고민하던 나혜석은
몇가지 조건을 내세웁니다.

김우영은 이 조건을 받아들였고 둘은 결혼하게 됩니다.
결혼 생활의 시작과 함께
나혜석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났고 이는 곧
화풍 변화로 이어집니다.

나혜석은 풍경, 정물 등을 소재로 삼아가며
대상을 보다 있는 그대로 표현했는데요.
당대 화가들이 빛과 색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죠.

그는 꾸준히 서화협회에서 진행하는 전시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했는데요.
그만의 독특한 화풍은 금세 미술계 사이에서 소문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기본기가 탄탄하면서도 명확하게 대상을 드러내는 기법.
당대 유행하던 화법과 구분되는 그의 스타일은
그의 작품을 더욱더 돋보이게 했죠.

사람들 사이 이름을 알리게 된 그는 1921년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자신만의 개인전을 열게 되는데요.
그가 만든 70여점의 유화작품과 함께
서울 최초의 서양화 개인전을 연 것이죠.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지 않았던 시절
미술 교육을 제대로 받았던 사람들도 없던 시기,

해외에서 기본기를 다져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친 화가의 작품은
세간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쏟아지는 기사와 관심 속에
작품의 약 1/3이 판매되었을 정도였죠.

전통적인 그림이 익숙했던 당시 사람들에게
나혜석의 서양화 화풍은 선구적이었습니다.

이후 나혜석은 자연과 풍경을 소재로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이 시기의 대표작인 <만주 봉천풍경>을 보면
더욱더 발전된 그의 화풍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중국 전통건축물의 세밀한 표현,
화면 가득 대상을 그려넣은 과감한 구도까지.
작가는 자신만의 화법을 완성해 나갔습니다.

명쾌하면서도 힘있는 붓질, 두터운 물감의 질감에서는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의 기운 또한 느껴지는데요.

이처럼 나혜석은 끊임없이 서양화의 방식을 고민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해나갔습니다.
하지만 가사노동과 작품 활동을 병행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아이를 가지고 어머니가 된
나혜석은 고민에 빠지죠.
이때 외교 일을 하던 남편 김우영이
세계일주 여행을 제안합니다.

부진한 작품세계에 활력을 줄 수 있을거라 생각한 것이죠
그리고 그 예상은 딱 들어맞았습니다.

나혜석은 약 16개월에 걸쳐 세계일주를 다녀오는데요
특히 유럽에서의 시간은
나혜석 그림에 또 다른 발전을 이끌었습니다.

서양예술의 상징과도 같은 프랑스 파리는
나혜석에게 크나큰 영감이 되었죠.
당시 파리에는 피카소와 마티스 같은 전설적인 예술가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당시엔 색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야수파 화풍이 휩쓸고 있었죠.
나혜석은 이 ‘야수주의’에 빠져
프랑스에서 직접 이 화풍을 공부하기로 결심합니다.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가 운영하는 화실에서
나혜석은 그림공부를 시작했죠.
야수파, 입체파 등을 이끈 화가들의 작품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익힌 것입니다.

나혜석은 일본 유학시절 배울 수 없던
서양미술의 정수를 직접 보고 배웠습니다.
덕분에 이후 나혜석의 작품 곳곳에서
이 시기의 영향을 엿볼 수 있죠.

주제나 표현에 있어 과감한 시도를 하는 서양의 화가들.

그들을 보며 나혜석 역시 익숙하게 그리던 풍경을 벗어나
무용수 등 새로운 주제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영감이 넘쳤던 세계일주 후 나혜석의
화풍은 크게 변화하는데요.
과감한 붓 터치와 단순화된 대상,
강렬한 색채까지 당대 유행하던 화풍과 자신만의 기법이 섞였죠.

이 표현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나혜석의 인물화입니다.

나혜석은 작가만의 즉흥적 감성, 개성을 담기 때문에
인물의 비례를 의도적으로 왜곡하기도 했는데요.

생략과 과장이야말로
예술가가 자신의 시각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했죠.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더 깊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행복했던 시간’은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옵니다.

세계여행 중 만났던 또다른 외교관 최린과
취미와 감성을 공유하다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죠.

파리 한인 사회에서 그 둘의 염문이 돌기 시작했고
나혜석은 결국 이혼하게 됩니다.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염문
그리고 이로 인한 이혼 등
여전히 보수적인 한인 사회에서는
그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는데요.

이에 대해 나혜석은 직접 ‘이혼 고백서’를 발표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나혜석은 이 고백서를 통해
자신의 결혼부터 이혼의 과정을 담고
최린과의 관계에 대한 솔직한 내용들을 전했습니다.

자신의 연애관을 담아내면서 동시에
조선의 불평등한 남녀관계와
정조에 관한 남성들의 이중성을 고발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에게
사람들의 반응은 비난과 조롱 뿐이었죠.

자유로운 연애와 이혼은
당시에 강요되던 정조 관념을
어지러뜨린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을 둘러싼 숱한 오해와 추문이 잇따랐지만
나혜석은 작품활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자신이 보고 배운 것을 통해
그림을 그리고 글로 쓰며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했죠.

이후로도 여성 운동을 포함해
지속적으로 사회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는데요.

운동 뿐만 아니라 ‘여자미술학사’를 설립해
제자 양성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남녀의 차별이 사라지기 위해선
여성을 위한 전문 교육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자립을 만들 수 있다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술계와 언론계의 냉대와 외면을 받았고
당대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남녀 할 것없이 비판받았습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최린 역시 그를 떠났고
이는 그를 더욱더 우울한 상황으로 몰고 갔습니다.
사람들의 관심 또한 줄어들기 시작했고
홀로 지내며 생활고와 함께 병상 생활이 시작됐죠.

창작의 원동력이었던 정신력과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는데요.
이로 인해 점차 나혜석은 사회로 나올 기회가 사라졌고
조금씩 세상에서 지워졌습니다.

1948년 말 한 무연고자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소식이
신문에 기재됩니다.
나혜석
그의 나이 53세

그의 파란만장했던 삶의 끝은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한 채 무연고자 병동에서 마무리되었습니다.

생전에 만든 작품만 800여 점 이상
하지만 그의 작품 중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전쟁 등으로 대부분 유실됐기 때문이죠.

뿐만 아니라 작품활동보다 사생활에 집중한 당대 사회분위기 덕에
그의 작품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기도 합니다.

한국 유화를 정착시킨 최초의 예술가.
작품판매로 생계를 꾸리는 전업화가의 기초를 닦은 선구적 예술가.

더 자유롭고, 더 새로운 표현을 위해
과감하게 조선땅을 박차고
세계일주를 떠났던 100년 전 나혜석.

그가 남긴 작품 속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