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는 어떻게 독립국으로 살아남았나

아프리카 동부에 위치한 에티오피아는 유서 깊은 역사를 지닌 나라다. 에티오피아의 시조라는 메넬리크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왕 솔로몬과 시바의 여왕 사이에서 태어난 이로 전해지고 있어. 아르메니아, 조지아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에티오피아는 이슬람 세력에 포위되어 있으면서도 기독교 국가의 정체성을 유지해온 나라이기도 해.
장구한 역사를 가진 에티오피아도 19세기 말, 유럽 제국주의의 파도를 피해 가지는 못했어. 에티오피아 황제 테워드로스 2세는 이집트의 공격을 받고 같은 기독교 국가인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지. 그러나 이집트에 이권을 둔 영국이 거절하자 영국 외교관은 물론 유럽인 전체를 감금하는 무리수를 둔다. 분노한 영국군이 에티오피아를 침공했고 테워드로스 2세는 자살로 생을 끝맺지.
생전에 테워드로스 황제는 지역 세력을 제압하면서 쇼아 지방의 지배자 살레 마르얌이라는 젊은이를 인질로 잡아둔 바 있어. 인질이긴 했지만 그가 마음에 들었던지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사위로 삼았지. 하지만 살레는 탈출을 감행해 고향으로 돌아갔고 쇼아 왕국의 왕을 칭하게 돼. 이후 테워드로스 황제의 자살 소식이 들려오자 쇼아에서는 축제가 벌어졌으나 살레는 골방에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에티오피아 점령에는 관심이 없던 영국군이 철수하자 에티오피아에서는 치열한 내부 다툼이 벌어졌어. 그 결과 요하네스 4세라는 인물이 제위에 오른다. 살레는 요하네스 4세와도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어. 당시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끼려고 안달이던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 북부의 에리트레아를 점령하면서 요하네스 4세와 충돌했는데 살레는 되레 이탈리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둘 사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지. 요하네스 4세는 연이은 외침을 맞아 동분서주하다가 수단과의 전쟁 와중에 전사하고 말았어. 살레는 요하네스 4세가 지명한 후계자를 밀어내고 에티오피아의 제위를 차지한다. 그는 에티오피아 창건자 메넬리크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스스로를 ‘메넬리크 2세’라 칭한다.
메넬리크 2세는 부족별·지역별로 갈라졌던 에티오피아를 하나로 아우르는 한편 근대화에 박차를 가한다. 그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서구의 무기였어. 요하네스 4세로부터 미움을 살 만큼 이탈리아와 밀착했던 것 역시 무기를 구하기 위함이었지. 메넬리크 2세는 서구 열강의 갈등을 이용해 프랑스와 러시아에 각각 접근하면서 무기 구입에 혈안이 됐다.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나눠 가지려는 흑심을 품고 있는 한 나는 결코 무관심한 방관자가 될 수 없다(〈역사를 바꾼 위대한 장군들〉 제레미 블랙 지음).”
당시 유럽과 다른 대륙 간 무력 격차는 엄청났어. 1871년 신미양요 광성진 전투에서 조선군 수백 명이 쓰러진 반면 미국의 전사자는 단 3명이었던 걸 생각해보길 바란다. 이런 현실을 지켜보며 메넬리크 2세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단다. 이 와중에 유명한 프랑스 시인 랭보는 메넬리크 2세에게 뒤통수를 심하게 맞기도 했어. 모험을 즐기는 무역상이기도 했던 랭보는 메넬리크 2세의 부탁을 받고 몇 달 동안 유럽에서 소총을 박박 긁어 배달하지만 메넬리크 2세는 무기를 손에 넣자마자 안면을 바꿔버린 거지. 아래는 랭보가 프랑스 영사관에 제출한 하소연이야. “모든 물건을 손에 넣더니 헐값에 넘기라고 제게 강요했습니다. 소매상에 팔아서도 안 되고 여차하면 물건을 해안가로 돌려보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것도 제 부담으로 말입니다(〈작가님, 어디 살아요?〉 조이스 메이너드 외 지음).”
에티오피아 판 ‘을사늑약’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에 이어 에티오피아에도 눈독을 들였다. 1889년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와 우치알리 조약을 맺으며 에티오피아의 영토를 일부 양도받는 대신 화승총 3만 정과 대포 등을 제공했는데 이 조약 제17조가 문제가 돼. 에티오피아 쪽 문안에는 “에티오피아의 황제는 외국과의 교섭에서 이탈리아 정부의 중재를 요청할 수 있다”라고 쓰였는데 이탈리아 쪽 문안에는 “중재를 요청해야 한다”라고 둔갑해 있었던 것이지. 이탈리아로서는 에티오피아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셈이야. 물론 자기 혼자서만.
메넬리크 2세는 이 내용을 알고 격노했고 1893년 조약 파기를 선언한다. 그러자 이탈리아는 2만의 군대로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지. 에티오피아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어. 엄청난 기근에 우역(牛疫)까지 돌아 에티오피아인들이 키우던 소 대부분이 쓰러졌단다. 거기에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이탈리아 군이 진격해온 거야. 이 절체절명 위기에서 메넬리크 2세는 이슬람의 바다에 떠 있는 기독교 섬으로서 천 년 넘게 버텨온 에티오피아인들의 자긍심을 되살려냈어. “기근으로 인구의 3분의 1이 죽고 가축도 없고 식량과 물 부족은 심각했다. (···) (메넬리크 2세는) 적은 식량이나마 공평하게 분배했다. 모든 에티오피아인들이 하나가 되어 자발적으로 이탈리아와의 전쟁에 나서게 만든 것이다(〈사이언스 타임즈〉 ‘기후와 전쟁’).” 메넬리크 2세가 밀어냈던 요하네스 황제의 후계자까지도 메넬리크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참전할 정도였어. 메넬리크 2세가 10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패배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어. 흑인들의 군대 따위는 얼마든지 쓸어버릴 수 있다고 여겼으니까.
현지의 이탈리아 군 지휘관 바라티에리는 에티오피아 대군의 보급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간파했다. 이를 이용하고자 바라티에리는 본격적인 전투를 피하며 시간을 끌었어. 하지만 자신들이 강력하다고 믿었던 이탈리아 본국 여론은 들끓었지. “아프리카 오합지졸을 앞에 두고 뭐하는 것이냐.” 마침내 1896년 3월1일 스스로를 골리앗 같은 거인이라 믿은 이탈리아 군은 다윗의 후예를 자처하는 에티오피아 군에게 돌격해 들어간다. ‘아두와(Adwa) 전투’의 시작이었지.
이탈리아 여단 하나가 에티오피아 군에게 박살났지만 두 번째 여단은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에티오피아 군을 수세로 몰아넣었다. 여기서 메넬리크 2세는 자신의 무력 기반, 즉 향후 지방 세력을 위압할 보루라 할 만한 정예 근위대를 투입하는 승부수를 던졌어. 결국 이탈리아 군은 여단장 세 명 중 두 명이 전사하고 한 명이 포로가 되는 최악의 패배를 당한다.
메넬리크 2세가 이탈리아를 격파하던 시기는 대한제국이 망국으로 치닫던 즈음이야. 대한제국도 서구 열강의 각축을 이용한 외교전을 펼쳤고 근대적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엄청난 국방비를 들였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전쟁 한번 치르지 못한 채 망했고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에서 두 곳뿐인 독립국 중 하나로 살아남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빠는 리더십의 차이라고 생각해.
시인 랭보를 바보로 만들었듯 서구 열강 앞에서 교활하게 이익을 챙길 줄 알았던 메넬리크 2세와, 무기상들에게 밥 먹듯 사기를 당하고 국익보다는 왕실과 척신들의 이익을 먼저 챙겼던 대한제국 지배자들의 차이. 오래도록 분열을 거듭했던 민족과 백성들을 묶어세워서 목숨을 걸고 직접 무장하고 전장에 나섰던 메넬리크 2세와, 자기 나라 백성들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 군대를 끌어들이고 나라가 망한 뒤로도 편안히 지냈던 대한제국 황제들의 간극 말이다. 대개 강자는 교만하고 약자는 그 허를 찾고자 혈안이 되기 마련이야. 하지만 강자의 허점이 쉽게 발견되는 것도 아니거니와 찌를 곳을 제대로 짚어야 하지. 실패하면 죽을 수도 있음을 각오해야 하며 찌르는 손에 젖 먹던 힘까지 불어넣어야 해. 메넬리크 2세는 그걸 해냈고 고종 황제는 그러지 못했던 거란다.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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