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수의 사람 '人'] "인하대 배구팀은 내 마음의 고향" ..'코트의 귀공자'에서 '명감독'으로 우뚝 선 최천식 인하대 배구 감독

김학수 2022. 4. 1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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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보다는 화려한 수식어가 항상 먼저 붙는다. 선수시절에는 팬들 사이에 최고 인기를 누리며‘코트의 귀공자’, ‘고공 폭격기’ 등으로 불렸다. 선수 은퇴이후 지도자로는 ‘명장’, ‘덕장’이라는 말을 들으며 대학에서 최고 사령탑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 TV 스포츠 중계를 통해 재미있고 전문적인 해설로 ‘명 해설자’로 평가받았다.

최천식(57) 인하대 배구감독은 배구인들 가운데서는 가장 성공적인 삶을 보냈다. 그는 배구계의 원조 ‘꽃미남’이었다. 훤칠한 키(1m97)와 수려한 외모로 1990년대 배구 코트를 주름잡으며 오빠부대를 몰고 다녔다. 그의 경기가 열린 체육관은 수많은 소녀팬들로 가득했다. 멀리 일본에서도 소녀팬들이 그를 보기 위해 날아왔다. 경기가 끝나고 난 뒤에는 사인을 받으려는 열혈 팬들로 인해 팀 버스에 오르기 위해서 경찰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듯 했다. 프로배구 이전 역대 슈퍼리그에서 3차례나 인기상을 차지하는 등 여성팬들의 우상으로 군림했다.

얼굴만 잘 생긴게 아니었다. 배구 선수로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에이스로 오랫동안 활약했다. 인하부중과 인하사대부고를 거쳐 대한항공에서 주전 센터로 화려한 명성을 날렸다. 국가대표팀으로 1984년 NHK 국제배구대회에 첫 참가한 이후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마지막 은퇴를 할 때까지 12년간 뛰어난 활동을 펼쳤다. 라이벌 일본전에서 특히 강한 일면을 보여 ‘일본 킬러’로 불리기도 했다.

2005년 모교인 인하대 감독으로 부임, 지도자로 본격적인 출발을 한 뒤 바로 다음 해인 2006년 춘계, 추계, 전국체전, 종합선수권, 최강전 등 5개 대회를 모두 석권, 최고의 감독으로 자리잡았다. 이후에도 그의 존재감은 남달랐다. 인하대를 이끌면서 대학배구연맹 전무이사와 대한배구협회 경기력향상위원회 위원장 등 중책을 맡아 한국배구 행정의 발전과 선수 육성에 많은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최천식 감독에게도 지난 2년간은 힘든 시간이었다. 코로나로 인해 대회 참가에 큰 어려움을 겪었으며, 팀훈련과 선수 관리에도 많은 불편함을 감내해야 했다. 코로나 제한 조치가 대부분 해제된 가운데 이달 말 올 시즌 첫 대학배구대회인 U리그 개막을 앞두고 있는 최천식 감독을 15일 인천 용현동 인하대 교정에서 만났다. 체육관 공사를 하기 때문에 심술궂은 봄바람으로 벚꽃이 흐드러지게 휘날리는 체육관 앞 잔디 공원에서 인터뷰를 가진 그는 “올 대학배구는 각 팀간의 전력이 비슷비슷해 만만한 팀이 하나 없다”고 말했다.

1990년대 소녀팬들의 우상이었던 스타플레이어출신 최천식 인하대 배구 감독이 벚꽃이 봄바람으로 흐트러지게 휘날리는 인하대 교정에서 올 시즌 성공적인 활동을 다짐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인천=정지원 기자]

“선수들을 대할 때는 선수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프로팀으로 가지 않고 인하대 감독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는데.

“모교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한다. 인하대는 나를 키워준 소중한 곳이다. 실업선수와 대표선수를 거쳐 인하대 감독을 맡은 것을 큰 영광으로 여긴다. 소명의식을 갖고 좋은 선수들을 육성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감독 이전에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육자로도 노력을 많이 기울인다. ”

-대학감독으로 성공하는 비결은.

“선수들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스타플레이어 출신 감독들은 자신의 눈높이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면 실패하기가 쉽다. 선수들의 기량을 높이기 위해선 선수의 위치에 서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선수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선수들이 실수를 했을 때는 무조건 혼을 내기 보다는 자상한 마음으로 왜 실수가 일어났는가, 어떻게 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는 가를 설명해준다.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선수들을 대해야 한다고 본다. ”

-올 U리그에 대비해 어떤 각오를 하고 있는가.

“ 오는 29일 홈경기로 충남대와 첫 경기를 갖는다. 작년에는 U리그에서 예선탈락을 했지만 올해는 좀 더 나은 성적을 기대한다. 선수들도 올해에는 우승을 한 번 해보자는 결의를 강하게 보이고 있다.”

-선수 구성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4학년생인 신호진과 몽고 유학생 바야르사이한이 핵심 전력을 이루고 2학년 세터 박태성이 뒤를 받쳐줄 것이다. 경험이 부족하지만 1학년 신인들도 패기있는 경기를 펼칠 것으로 생각한다. ”

-코로나로 대회 준비에 어려움을 없었나.

“지난 2년간 코로나로 대면훈련을 하는데 많은 불편이 있었다. 선수들을 모아 훈련을 하기에는 많은 제한이 따랐다. 실전 경험을 쌓기 위한 연습경기도 충분히 하지 못했다. ”

-체육특기자 입시 개편과 선수들의 수업 의무화로 대학팀들의 운영이 힘들다고 하던데.

“우리 때와는 입시제도가 많이 바뀌어 원하는 선수들을 뽑기도 어렵고, 대학 입학이후에는 선수 관리도 쉽지 않다. 예전 나처럼 인하부중과 인하부고를 거쳐 인하대로 가는 코스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고교 선수들은 특정 학교 지원서에 서명하던 예전의 방식과는 달리 6개 학교를 지원하게 돼 있고 학교 공부까지 반영되는 입시 관리로 인해 자신이 원하는 대학팀으로 가는게 만만치 않다. 대한항공 정지석 같은 선수는 송림고를 졸업하고 아예 대학으로 가지 않고 바로 프로팀으로 가버렸다. 앞으로 대학팀에서 좋은 선수를 확보하기에 더욱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

-대학에 입학한 선수들 관리도 예전과 다르다는데

“지금은 대학팀에서 100퍼센트 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선수들이 꽤 있다. 학교 기숙사 숙박비와 식사비도 개인이 부담하는 팀들도 많다. 대학 당국은 대학금 등록금이 오랫동안 오르지 않아 재정적으로 어려워 운동 선수들에게 주던 여러 혜택을 점차 줄이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 학교만해도 숙박을 무료로 제공하지만 식사비는 개인이 부담한다. 또 선수들은 평일 정상수업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주로 야간에 훈련을 할 수 밖에 없다. 선수들도 힘들지만 지도자로서 정상적으로 훈련을 하는데 어려움을 느낀다. ”

코로나 이전인 2014년 당시 최천식 감독이 자신의 학창시절 땀이 배여있는 인하대체육관에서 선수들과 함께 하고 있다.

“내 배구 고향은 인하대와 대한항공이다”

최천식 감독은 인천 배구의 정통 멤버이다. 인하부중에서 처음 배구를 시작한 뒤 인하부고와 인하대를 거쳐 대한항공에서도 인하대 체육관에서 훈련을 계속 했다. 인하대 체육관을 처음 건립할 때가 1979년 인하부중 2학년때였으니 현재까지 43년째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인하부고, 인하대, 대한항공으로 이어지는 인천배구의 정통성은 수년전 김성민 이후 대가 끊어졌다. 국가대표 출신들인 한장석, 최천식, 박희상, 김경훈 등으로 이어지던 계보가 막을 내린 것이다.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한번도 인천을 떠나지 않았다. 아직 집도 인하대에서 차로 15여분 거리인 송도 인근의 아파트에서 산다. 어찌보면 인천이라는 도시는 그에게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인천이라는 배구 연고성이 많이 흐려지고 있는데.

“배구가 활성화되기 위해선 지역 연고성을 많이 갖고 있는 것이 좋다. 내가 선수로 활동하던 1980-90년대 대통령배 배구대회와 슈퍼리그 등을 할 때 지방 대회를 돌면서 경기를 하던 때가 많이 생각한다. 당시 지방팬들도 배구를 많이 좋아했다. 인천만 해도 인하부중고와 인하대가 좋은 선수들을 배출해 대한항공으로 입단시켜 강한 지역 연고성을 보여주었는데 지금은 이런 것이 많이 없어져서 안타깝다. ”

-지역 연고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이 있다면.

“프로배구 정규리그에 앞서 코보컵 대회를 할 때 지방 순회경기를 하는 방법도 좋을 것 같다. 인천에서도 코보컵 대회를 한 번 개최해보는 것은 어떨는지. 대구, 부산 등에서도 코보컵대회 개최를 고려해 볼만하다. ”

-대한항공 입단 직전 한때 현대자동차써비스와 가계약을 맺은 적도 있었는데.

“맞다. 1985년 대학 재학중에 현대차써비스와 당시로서는 최고 금액이라고 할 수 있는 1억2천만원을 받고 입단 가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인하대 재단을 이끌고 있는 대한항공에서 1986년 배구팀을 재창단하면서 현대차써비스에 가계약금을 환불해주고 나를 스카우트했다. 대한항공이 창단하지 않았으면 현대 유니폼을 입을 뻔했다. ”

그가 당시 받았던 1억2천만원의 스카우트금은 강남 아파트 30평 2채 이상을 살 수 있는 큰 돈이었다고 한다. 현재 대학 배구팀 감독으로 받는 봉급 수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이다. 하지만 재테크 관리를 썩 잘 할 편이 아니어서 그 큰 돈은 손에 쥔 모래알처럼 솔솔 빠져 나갔다는게 그의 얘기이다.

최천식 감독과 배구선수 출신 어머니 박춘강씨를 소개한 1993년 조선일보 기사.

“어머니부터 자녀까지, 배구는 3대째 모태 스포츠이다

최천식 감독의 어머니는 부산 남성여고와 동일방직을 거쳐 스타덤에 올랐던 배구선수출신 박춘강(78)씨이다. 그가 배구를 하게 된 것은 이런 어머니의 영향 때문이다. 모전자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자녀들도 현재 배구를 하고 있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셈이다. 아들은 그가 다녔던 인하부고에서 3학년 재학중으로 198cm의 장신공격수이다. 딸은 진주 선명여고 1학년으로 키가 178cm로 포지션은 세터이다.

-자녀들도 배구 집안의 피를 물려받아 운동을 잘 할 것 같은데.

“더 두고 봐야 알겠다. 열심히 하고 있는데 아직 기본기가 덜 다듬어진 것으로 보인다. 열심해 운동을 해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까지 이르렀으면 하는 마음이다. ”

-한국배구의 전망을 한다면.

“내가 대표선수를 할 때와 지금을 비교하기는 어렵다. 당시는 여러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올리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후 한국남자배구는 올림픽에 나가지 못했는데 이는 참가 기준이 세계랭킹제로 바뀐 게 주요 원인으로 보인다. 오는 7월 국내에서 열릴 챌린지컵에서 모처럼 한국 배구가 좋은 성적을 올리기를 기대한다. ”

-대표팀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아시아예선전에서 일본과 막판까지 물고 물리며 극적으로 티켓을 따낸 것이다. 서울에서 우리가 완패를 당한 뒤 도쿄에서 중국이 일본을 잡고, 최종 우리가 일본을 꺾으면서 올림픽 티켓을 잡았다. 당시 송만덕 대표팀 감독님 이하 대표팀 전원이 믿어지지 않았던 결과에 모두 감동을 했었다. 극적인 승리를 거둔 덕분에 애틀랜타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선수단 기수로 뽑히는 영광까지 안았다. ”

선수 시절 ‘코트의 귀공자’라는 말을 들었던 그이지만 지금은 이런 말보다는 ‘코트의 전사’라는 말이 더 좋은 것 같다고 했다. 삶의 연륜이 깊어진 지도자의 말처럼 들렸다.

[김학수 마니아타임즈 편집국장 kimbundang@maniarepor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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