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에 맞선 은징가의 용맹함, 앙골라에 남았다

신대륙 발견을 전후해 대서양 곳곳에서는 양대 해양 강국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충돌이 빈발했다. 양국은 옥신각신한 끝에 당시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중재로 구대륙의 끝 카보베르데섬과 신대륙의 시작이라 할 히스파니올라섬 사이의 대서양을 ‘서경 43도 37분’ 기점으로 분할하고 서쪽은 스페인이, 동쪽은 포르투갈이 차지한다는 합의에 이르렀지. 148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야.
포르투갈이 할당받은 영역은 오늘날의 브라질 해안 지역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덕분에 포르투갈은 브라질을 식민지로 만들 단초를 마련했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의 독점권을 지켰지. 이 항로를 유지하기 위해 중간 보급과 휴식을 위한 근거지가 필요했어.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동쪽과 서쪽 해안 일부를 점령하고 식민지화한다. 오늘날 아프리카 남서쪽 해안의 앙골라와 남동쪽 해안에 위치한 모잠비크가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쓰는 이유야. 앙골라라는 국명은 16세기 그 일대를 지배하던 아프리카인들의 나라 은동고(Ndongo)와 관련이 있어. 은동고 왕국의 국왕 호칭인 ‘응골라’에서 앙골라라는 현재의 국가명이 나왔지. 이 은동고 왕국의 이름을 기억해두렴.
서남부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한 포르투갈인들은 매우 ‘유용한’ 무역 상품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노예였어. 포르투갈이 우선 상대했던 건 콩고 왕국이었다. 콩고 왕국은 은동고 왕국을 복속시킬 만큼 인근 지역의 강자였지. 콩고의 왕 은징가 아 은쿠우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주앙 1세’라는 유럽식 호칭을 쓸 정도로 유럽 문화를 받아들였어. 아버지에 이어 아들 은징가 아 음벰바는 본인을 ‘아폰수 1세’로 지칭하는 독실한 신자였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에게 ‘콩고의 사도’로 불릴 정도였지. 하지만 그는 포르투갈의 노예무역 때문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흑인 노예무역은 백인들의 노예사냥만으로 형성된 사업이 아니야. 흑인 노예를 대거 사들인 쪽은 백인들이지만 공급자는 대개 흑인 왕국의 지배자이거나 부족장 그리고 아랍 상인이었다. 즉 ‘노예’는 자연스러운 교역 상품이었고 콩고 왕국 역시 엄청난 노예 무역판을 벌이고 있었지. “왕국은 끊임없이 이웃 부족을 쳐들어가 노예를 획득했고, 노예 거래를 통해 얻은 수익을 왕실의 비용에 충당했다. 연간 12~15척의 포르투갈 배가 노예를 실어 날랐는데, 한 척당 400~1000명씩 실었다(〈아틀라스 뉴스〉 2020년 10월27일).” 흑인 왕국이 흑인을 팔아먹는 제 살 깎아먹기 장사를 한 셈이야.
결국 콩고 왕 아폰수 1세는 1526년 포르투갈 왕에게 이런 편지를 쓰게 된다. “포르투갈 상인들은 끊임없이 우리 왕국의 국민들을 끌고 갑니다. 왕족과 귀족까지 가리지 않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땅은 텅 비어버릴 지경입니다.” 하지만 포르투갈과 노예 상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지. 포르투갈을 향한 아폰수 1세의 저항은 무위에 그치고 콩고 왕국은 시들어간다. 이윽고 포르투갈은 콩고 왕국에 조공을 바치던 은동고 왕국에도 손을 뻗친다. 그런데 이 왕국에 걸출한 여성 한 명이 출현하게 돼. 이름은 은징가 음반데(1583~1663).
비장의 카드 ‘세례명 안나’
노예 출신 후궁의 딸로 태어났지만 아버지의 총애를 받던 은징가 음반데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는다. 가톨릭 선교사들을 통해 포르투갈어도 습득했지. 해안지대에 머물던 포르투갈은 더 많은 노예를 찾아 내륙으로 침투하며 은동고 왕국을 위협했다. 이즈음 은징가는 이웃 나라에 피신해 있었어. 왕위에 오른 이복 오빠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한다며 그녀의 아들을 죽이고 아이를 갖지 못하게 하는 형벌을 내렸으니까. 그런데 염치없게도 이복 오빠는 은징가에게 포르투갈 군과의 협상을 요청한다. “네가 포르투갈 말도 잘하고 아는 사람도 많으니까”라는 이유였지.
그녀는 은동고 왕국 특유의 화려한 전통의상을 입고 협상장에 도착했다. 이때 근사한 의자에 앉아 있던 포르투갈 지휘관은 은징가에게 방석 하나를 던져준다. 땅바닥에나 앉으라는 뜻. 그러자 은징가는 시녀 한 명을 엎드리게 한 뒤 그 위에 걸터앉았어. 포르투갈에 결코 꿀리지 않겠다는 외교적 시위를 한 거지. 은징가 공주는 포르투갈에 대한 적대행위 중단, 영토 내 포르투갈 노예상 활동 허용 등 여러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매해 공물을 바치라는 요구는 한사코 거절했어. “은동고를 당신들이 정복했다면 합당한 요구이겠지만, 은동고의 왕인 내 형제는 당신들의 신하가 아니다.” 아울러 그녀는 왕국 내 포르투갈 요새를 철수하라고 요구한다.
포르투갈인들이 협상에 미적거리자 은징가는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 “우리 조건에 동의한다면 나는 교리문답을 공부하고 세례를 받겠다.” 당시 포르투갈 사람들은 악독한 노예 무역상인 동시에 신실한 가톨릭교도이기도 했으니까. ‘이교도를 개종시킴으로써 영혼을 구한다’라는 명목은 위선적이었지만 그들은 이를 성스러운 임무로 받아들였다. 은징가는 그 점을 찌르고 들어간 거야. 그녀는 ‘안나’라는 세례명을 받고 심지어 포르투갈 총독의 이름을 따서 유럽식 이름을 받아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합의를 지키지 않았어. 오빠가 죽은 뒤(은징가가 독살했다는 설도 있음) 응골라, 즉 은동고 왕국의 왕을 자처하게 된 은징가는 칼을 간다. 포르투갈의 야욕을 막아내기에 앞서, 은징가는 여러 난관을 뚫고 왕위를 지켜낸다. 우선 노예 출신 후궁의 자식, 심지어 여자가 왕위에 오를 수 없다는 남자들에 맞서야 했지. 포르투갈 군대와 꼭두각시가 된 동족들을 피해 이웃 나라로 피신하기도 했지만 정략결혼, 포르투갈의 라이벌로 부상한 네덜란드와의 동맹 등 갖가지 수단을 동원하며 오뚝이처럼 되살아난다. 포르투갈 군은 최전방에 나서서 활과 총을 쏘아대며 군대를 지휘하는 은징가 여왕의 용맹에 두고두고 치를 떨어야 했지.
은징가가 노예 해방의 기치를 들고 싸운 건 아니었어. 그녀 역시 노예를 소유한 아프리카 군주였고 자신의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여왕으로서 수십 년 동안 포르투갈 노예무역을 방해하는 데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건 분명한 사실이야. 잡혀간 노예들을 선동해 탈출시키고 자신의 백성으로 삼기도 했지. 은징가가 힘을 얻은 이후 포르투갈이 손을 뻗친 지역에서 대서양을 건너는 노예들의 수가 현저히 줄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수십 년 동안 전쟁터를 전전했던 은징가에게도 값진 평화가 찾아온다. 스페인 선교사들(이들은 포르투갈의 이익과 대척점에 서 있었지)이 바티칸의 중재를 통해 왕권을 인정받는다면 포르투갈이 그녀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라며 여왕의 공식 개종을 제안한 거야. 은징가 여왕은 새삼 세례명 안나로 돌아가 그녀의 땅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세례를 줄 것이라 약속한다.
1656년, 나이 일흔셋의 은징가 여왕은 무려 27년 전 적의 포로가 됐던 여동생과 재회하게 돼. 동생과 재회하자마자 그녀는 바닥에 엎드려 몸에 흙을 문지르기 시작했어.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는 전통 방식이었지. 자매와 감격적인 해후 속에 수십 년간의 전쟁은 마무리됐고, 은징가 여왕이 죽을 때까지 은동고는 짧은 평화를 누린다.
몇 년 후 은징가 여왕이 죽었을 때 백성들은 그녀의 시신 앞에 쓰러져 몸에 흙을 문질렀지. 침략자들을 끈질기게 괴롭힌 불굴의 전사에게 보내는 경의였다고나 할까. 오늘날 은동고 왕국의 왕을 의미했던 ‘응골라’는 한 나라의 국명 앙골라로 남아 있고, 그 나라 사람들은 은징가를 국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지. 압도적인 적뿐만 아니라 동족 남자들 앞에서도 당당했고, 상대의 문화와 종교를 넉넉히 수용하되 상대의 탐욕스러운 발톱에 단호히 맞섰던 여왕의 역사는 수백 년 암흑기를 거쳐 그녀의 옛 땅에 살아 숨쉬고 있다.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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