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빚어 코스로 차린 비건 한식, 사찰음식 철학을 담다
[이택희의 맛따라기] 정관 스님 세속 제자의 ‘두수고방’

예전 가정에서 두부를 만드는 건 큰일이었다. 시설과 장비가 원시적이라 과정은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갔다. 시간도 하루 한나절이 꼬박 걸렸다. 명절 닷새쯤 전에 콩을 조리로 일어 따뜻한 물로 불린다. 다음날 맷돌 차려서 콩을 갈고 두부를 쑤면 해 짧은 겨울날 하루가 다 간다.
불린 콩을 갈고 물을 섞어 약간 묽게 한 다음 가마솥에 넣고 불을 지펴 끓인다. 솥바닥에 콩물이 눋지 않도록 주걱으로 계속 젓는 한편 끓어 넘치지 않도록 찬물로 잘 달래야 한다. 끓으면 Y자 모양의 나무를 잘라 만든 삼발이나 막대기로 엮은 발을 함지 위로 걸치고 베자루를 올려 끓은 콩물을 퍼 담는다. 콩즙은 걸러져 함지에 고이고 섬유질 성분이나 덜 갈린 알갱이는 자루에 남는다.
양념류에도 멸치 한 토막 안 들어가

처음 거를 때 자루에 남은 게 비지다. 할머니는 이걸 베 보자기 깐 대소쿠리에 담고 볏짚 몇 가닥을 접어 꽂은 다음 얼른 안방으로 달려갔다. “비지가 식으면 안 뜬다”며 서둘러 담요나 허드레 이불로 싸서 아랫목에 앉혔다. 요즘 식으로 설명하면 비지는 38~45도에서 24~72시간 띄워야 하기 때문이다. 하얀 비지가 황갈색으로 변해 진해지면서 청국장 비슷한 냄새가 나면 뜬 것이다. 이렇게 발효한 비지를 띄운 비지, 뜬 비지라고 한다. 강원도 일부에서는 ‘고작비지’라고 한다.
비지를 띄우면 거친 입자가 부드러워지고 맛은 구수해진다. 발효취는 청국장보다 약하다. 여기에 돼지 뼈나 고기, 김장김치를 넣고 찌개를 끓이면 독특한 별미 음식이 된다. 채소와 버섯 자투리 달인 물에 묵은김치만 넣고 끓이기도 한다.
어려서는 억지로 먹던 이 찌개가 나이 들수록 그리워진다. 메뉴로 파는 식당을 서울에서 오래 찾았으나 인연이 닿지 않았다. 예전 남한 일대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비지를 띄웠지만 이제 띄우는 집도, 할 줄 아는 사람도 드물어 그리움을 쉬 달래지 못했다. 요즘에는 인터넷을 검색하면 띄운 비지를 통신판매하는 곳이 많지만, 온라인 판매가 활성화되기 전에는 구할 수도 없었다.
띄운 비지찌개를 하는 음식점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주일 새 두 번을 찾아갔다. 수원 광교앨리웨이에 있는 ‘두수고방’이다. 백양사 천진암 주지 정관 스님의 세속 제자인 요리연구가 오경순(53)씨가 운영하는 이곳은 스님의 음식철학과 조리법을 세상에 펼치는 종합 음식문화 공간이다. 스님은 넷플릭스가 2017년 공개한 음식 다큐멘터리 ‘셰프의 테이블(Chef’s Table)’이 세계 유명 셰프 6명을 소개할 때 그 첫 편에 올라 서양 미식계에 홀연 스타로 떠올랐다. 서양 사람들이 놀란 핵심은 무궁무진한 채식 요리의 세계와 그 맛이었다.
서양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한국 채식이 정작 본고장에서는 존재감이 미약하다. 시대에 뒤떨어진 음식이라고 폄훼하기도 한다. 사찰음식을 오래 공부하고, 스님과 함께 유럽에도 여러 번 다녀온 오씨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물을 곁들인 두부 코스 메뉴를 만들었다. 토종 채식의 재발견과 세계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두부를 근간으로 해서 이 땅에서 나는 제철 채식재료를 다양하게 활용해 비건(완전 채식) 한식의 새 모델을 구축하겠다는 의욕이다. 한국 사찰음식이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채식이라는 자부심을 바탕으로 한 도전이다.
“띄운 비지찌개는 내핍·지혜의 음식”
코스 진행은 다음과 같다(저녁 기준).









반상은 큰 그릇에 담아 내오면 개인 발우에 덜어 먹는 사찰 공양 방식으로 먹는다. 비지찌개는 따로 먹어도 맛있지만 톳밥에 비벼서 먹으니 또 아주 색다른 맛이다. 오씨는 띄운 비지찌개에 대해 “콩 한 알에서 나오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최대한 활용하는 내핍과 지혜의 음식”이라며 “이런 게 사찰음식의 철학이고 정신”이라고 말했다.

나오는 음식은 완전 채식이며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고, 먹은 식재료가 내가 된다”는 음식 철학에 근거한 정관 스님 조리법을 따른다. 간장·된장·고추장과 각종 과일청은 정관 스님이 직접 만든 걸 쓴다. 그 덕에 멸치 한 토막도 안 들어갔지만, 뭔가 빠진 듯한 맛의 허전함은 전혀 없다. 스님 양념류를 이렇게 쓰는 곳은 하늘 아래 천진암과 ‘두수고방’뿐이다.
오씨는 새 판을 벌이는 굳센 다짐을 이렇게 밝혔다. “외국에서 들여온 정체불명의 비건 음식을 많이 하는데 한국 채식보다 좋아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나물의 민족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오랜 세월 채식 위주로 식생활을 해왔다. 특히 우리 땅에 불교가 들어온 이후 1650년(가야 불교를 인정하면 1900여년) 동안 사찰에서 꽃핀 채식문화는 세계 음식 역사에서 하나의 장르가 됐다. 이걸 사람들이 몰라준다. 여기는 맛집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되살리고 퍼트리는 음식점이 되고 싶다.”
두 번째 방문한 지난 23일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궁중음식 기능이수자 한복진 교수, 한식·술 관련 저서 16권을 내고 다수의 음식 특허를 보유한 정혜경 교수, 미국의 격주간 경제지 포브스가 2022년도 ‘50세 이상 성공한 아시아 여성 50인(50 Over 50)’에 선정한 한식의 대모 조희숙 셰프와 함께 했다. 세 분의 평가를 귀동냥해보니 이랬다. “연구 많이 했나 보다.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조) “명상코스 같고 치유의 식사다.”(정) “이런 코스가 상품이 된다는 게 신기하고 훌륭하다.”(한)

이택희 음식문화 이야기꾼 hahnon2@naver.com, 전 중앙일보 기자. 늘 열심히 먹고 마시고 여행한다. 한국 음식문화 동향 관찰이 관심사다. 2018년 신문사 퇴직 후 한동안 자유인으로 지내다가 현재는 경희대 특임교수로 일하고 있다.
Copyright © 중앙SUN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