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과 미학'의 사잇길에서 한국 근대 여성화단 일군 두 거장[김홍희의 페미니즘 미술 읽기](16)
[경향신문]

여명기 이끈 선구적 서양화가 나혜석
민족주의 계몽운동가와 방종한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방황한 지식인
페미니스트 문필가이자 각광받는 화가로 인생 황금기 누렸지만
페미니스트 화가로서는 시대와 장르의 벽 넘지 못하고 ‘과제’ 남겨
1. 나혜석과 천경자에 대한 경의
3월 연재는 15번째 복식조 작가로 근대기의 두 선구적 여성작가 나혜석(1896~1948)과 천경자(1924~2015)를 초대했다. 대략 1980년대 이후의 현대 페미니즘 미술을 다루어 온 연재가 이번 호로 근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순환 구조를 이루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역사적 연속성에 대한 의미 부여와 함께 전설적인 두 여성화가에 대한 경의가 자리했다.
나혜석은 근대 한국 화단의 문을 연 대표적인 여성화가이자 동시대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사상에 경도된 투철한 페미니스트였다. 서양화 전공의 신여성이자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로서 그가 남긴 공과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고 있지만, 나혜석은 여전히 온몸으로 여성미술의 여명기를 이끈 선구적 화가였다. 천경자는 페미니즘 의식보다는 여성 특유의 감수성에 의거하여 독창적 여성 화풍을 수립한 동양화의 거장이다. 나르시시즘, 감상주의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는 심미안적 양식 실험과 색채 탐구로 주류 수묵화 사조를 무색하게 한 대담하고 화려한 채색화를 선보이고, 개인 서사와 문학적 서정으로 충만한 특유의 형상화를 대두시킴으로써 여성미술사에 새로운 정점을 찍었다.

2.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 나혜석
나혜석의 생애와 화업은 일제강점기에 불거진 여성운동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의 유학 시절이자 미혼기인 1910년대에는 일제 치하 애국애족적 차원에서 펼쳐진 민족주의 여성운동과 호흡을 같이하며 문사로서 페미니즘 계몽 활동에 참여했다. 결혼기인 1920년대에는 서구에서 유입된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상에 경도된 첨단의 여성해방론자이자 조선미전 활동을 통해 각광받는 여성화가로서 인생의 황금기를 누렸다. 이혼 후 파탄기인 1930년대에는 한국에 사회주의 사상이 파급되었지만 나혜석은 그에 연루되기보다는 자유주의의 극단 형태인 퇴폐주의로 흐르며 위악적이고 과격한 페미니스트로서 사회적 냉대를 받다 비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다.
1913년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한 나혜석은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 기관지 ‘여자계’를 발간하고 동경 유학생 동인지 ‘학지광’에 다수의 수필을 기고하는 한편, 신여성의 우월성을 역설한 소설 <경희>(1918)를 발표했다. 1918년 귀국 후에는 3·1운동에 가담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1920년 자신을 면소처분해준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한다. 같은 해 문학 동인지 ‘폐허’의 창립 동인이 되어,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 노라를 놓아라”라는 혁명적인 여성 해방 시 ‘인형의 집’(1921)을 발표한다.
이 시기의 유화 작품에 대해서는 거의 전해지는 바가 없으나, 신문과 잡지 삽화로 제작한 리얼리즘 목판화가 그의 계몽주의 사상을 적시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명절날 가사노동에 분주한 집안 여자들을 묘사한 ‘섣달대목’(1919)과 ‘초하룻날’(1919)에 이어,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1920)에서는 밤 12시까지 독서하고, “부글부글” 끓는 냄비 앞에서 시를 짓고, “손으로는 바느질 머리로는 신여자 잘 살릴 생각”을 하며 새벽까지 원고를 쓰는 김일엽의 분주한 하루를 그리고 있다. ‘저것이 무엇인고’(1920)는 양장한 신여성을 향해 “저 건방진 것을 누가 데려가냐”고 나무라는 두 양반 어른과 “고것 참 이쁘다 쳐다봐야 인사나 하지”라고 수작 부리는 어느 청년의 엇갈리는 대사를 통해 부계적 여성관의 이중성을 풍자한다.
1920년대 이후 여권신장을 부르짖는 나혜석의 계몽주의 사상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자유연애론, 특히 여성 문제를 성 문제로 환원시켜 여성적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을 중시한 스웨덴 페미니스트 엘렌 케이(Ellen Key) 사상에 힘입어 점차 그 밀도를 상실해갔다. 그것은 유복한 상류층에 주어진 부르주아 가치관의 결과이기도 했다. 1923년 만주 부영사로 부임하는 남편을 따라 만주에 체류한다. 1927년부터 거의 2년에 걸쳐 시베리아 등 러시아, 유럽 대륙, 하와이 등 미국, 일본을 만유하는 사이 그의 사상은 해외 문물과 서구사상에 물들며 민족주의로부터 멀어졌다.
인생 황금기였던 1920년대는 미술 활동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1921년 경성일보 내청각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은 나혜석을 화제의 여류작가로서 데뷔시켰다. ‘신춘’을 비롯해 70여점의 풍경화가 출품되었으며 관객 5000명이 다녀갔다. 무려 20여점 팔렸다고 한다. 이후 그는 거의 매해 조선미전에 출품, 수차례의 입상 끝에 1926년 5회 미전에서는 ‘천후궁’으로 특선된다. 1931년 10회 미전에서도 2000년 된 파리의 클뤼니 수도원을 그린 ‘정원’으로 특선되며, 언론으로부터 “여인화단의 선구자”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 시기 유화는 1910년대의 목판화와 달리, 대체로 이념과 무관한 몽롱한 인상주의 화풍의 풍경화들이다. 일본의 남성 스승들로부터 전수받은 화법을 자신의 양식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채 초젠더적 인상주의 풍경화가로 남게 된 것이다.
1929년 유럽 여행 후 귀국하여 수원 불교 포교당에서 발표한 유럽 체류 시 풍경화들은 전보다 밝아진 색감, 넓은 붓질과 평평해진 화면이 후기 인상파 내지 야수파의 영향을 드러낸다. 한편 누드화와 인물화에서는 야수파보다는 관학파적 화풍의 학습 효과가 감지된다. 근육질적 몸매의 서구 모델을 그린 최초 누드화 ‘나부상’(1928)은 물론, 동시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자화상’도 커다란 눈에 높은 코를 가진 전형적인 서구적 용모의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혜석의 실제 모습과 다르게 보이지만, 세부가 생략된 원통형의 몸매나 무표정한 중성적 얼굴에서 페미니스트의 단호함이 읽힌다. 그럼에도 말년의 고뇌가 드리워진 듯한 우울한 풍모가 붓을 든 자태로 직업화가의 전문성을 과시하는 여느 여성화가의 자화상과 다른 인간적 체취를 느끼게 한다.
나혜석의 1930년대는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점철된 인생의 파탄기였다. 최린과의 연애 행각으로 1931년 남편에게 이혼을 당한 후, 위반적이고 퇴폐적인 자유주의자로 변신한 그는 외도를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만 할 감정”이라고 피력한 ‘이혼고백서’를 비롯해 ‘신정조론’ ‘남녀공창제’ 등 남성 중심사회에 대해 반기를 든 폭탄선언으로 동시대인을 경악하게 했다. 1933년 수송동에 여자미술학사를 개설하고 재기를 다짐하지만 그마저 실패하고 화업으로도 퇴조기를 맞는다. 전성기로부터의 낙조를 예고하듯, 1933년 조선미전에 낙선하고 1935년 사회의 무관심 속에 치러진 진고개 조선관에서의 개인전을 끝으로 20여년간의 작가 경력을 마감한다. 이후에도 개인전을 준비하며 작품들을 제작했지만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전해진다.
민족주의 계몽운동가와 방종한 자유주의자 사이에서 이념적 혼란을 겪었던 나혜석의 불운은 일제 치하 사회·문화·사상적 환란기의 암울한 시대상과 지식인의 방황을 반영한다. 페미니스트 문필가였으나 페미니스트 화가가 될 수 없었던 나혜석의 모순 역시 당시가 서양화와 페미니즘의 도입기였다는 시대적 한계와 함께 문학에 비해 이념적 재현이 쉽지 않은 미술의 장르적 특성 때문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붓을 꺾지 않았고, 부단하게 그림 그리기를 수행하며 페미니즘을 실천했다. 유교적 가부장 사회에서 용납될 수 없는 급진적 사상과 전복적 삶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시대적 희생을 치러야 했지만, 결국 그는 불굴의 창작 의지로 여성화가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여성화단의 물꼬를 튼 선각자였다.

새로운 정점 찍은 동양화가 천경자
채색화로 수묵화 전통 탈피하고 추상에 맞선 해방적 회화 세계 구축
절필까지 50여년 창작에 매진…‘이념보다 붓으로’ 페미니즘 표출
여성성을 당당하게 도식화한 새 유형의 여성초상화 탄생시켜
3. 새로운 유형의 초상화가 천경자
천경자는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6·25전쟁, 전후 재건기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90년의 장구한 세월 속에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다. 그러나 다사다난한 역사의 질곡과 개인사의 트라우마를 뒤로하고 오롯이 창작에 매진한 치열한 예술가였다. 1940년대 초반의 일본 유학기부터 절필기 이전인 1990년대 초중반까지 50여년의 화업을 통틀어 그는 수묵화 전통을 탈피하는 채색화, 모더니즘 추상형식에 맞서는 형상화 실험으로 해방적 회화세계를 구축했다. 또한 여성 장르로 주변화되어온 인물화, 풍속화, 화조화의 소재를 자기 방식으로 도상화함으로써 자전적이면서도 보편적이고,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새로운 유형의 여성 초상화를 탄생시키고 이로써 페미니즘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천경자의 작가 경력은 초기 1940~1960년대, 중기 1970~1980년대, 말기 1990년대 이후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수학을 마치고 1944년 귀국한 이래 일본 채색화와 다른 새로운 화풍을 모색하며 제작한 ‘생태’(1951)가 초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전쟁통에 겪은 여동생의 죽음과 35세 나이로 요절한 애인에 대한 슬픈 기억을 35마리의 뱀으로 그린 이 작품은 뱀의 상징성뿐 아니라 생동감 넘치는 묘사력으로 대중적 인지도를 획득하며 단번에 유명해졌다. 1960년대에는 전후 재건기의 시대상을 반영하듯, 영롱한 푸른 색조로 감상과 낭만을 자아내는 환상적, 몽상적 작품군을 발표했다. 상상적 공간, 추상적 배경 속에 남녀 군상, 새 떼, 꽃 무리를 그려 넣은 ‘전설’(1961), ‘환’(1962), ‘정원’(1962), ‘여인들’(1964), ‘백야’(1966) 등은 자신이 꿈꿔온 여인의 행복, 남녀의 사랑과 결혼의 환희에 대한 찬가였다. 좌절에서 희망으로의 심경 변화는 재현 양식과 기법상의 변화를 동반했다. 두껍게 바른 안료로 표면 질감을 부각시키고 추상성과 전면성을 강조함으로써 이미지 감각을 상승시킨 것인데, 이와 함께 채색화의 현대화 행보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1970~1980년대는 경력 중기이자 전성기로 이 시기 화업은 작가를 서구 문물에 노출시킨 해외여행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펼쳐졌다. 1969년 6개월에 걸친 유럽과 남태평양 여행과 1970년대 중반~1990년대 초반에 걸친 12회의 해외 스케치 여행은 신문과 잡지 연재 기고를 통해 그에게 대중적 인기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여행을 통해 자신을 재발견하고 여성화가로서의 자의식이 표출된 작가 특유의 여성 초상을 정립시킨 점에서 여행 이상의 의미가 있다. 풍요로운 다작기였던 이 시기, 그의 화면에는 더는 남녀 군상이 존재하지 않고 고립된 단독 여인상이 화면을 지배한다. ‘길례언니’를 비롯해, ‘孤’ ‘사월’ 등 1973·1974년의 작품들이 보여주듯이, 긴 목의 얼굴로 클로즈업된 상반신의 여인 초상은 항상 꽃 무리에 둘러싸여 있거나 머리나 가슴에 꽃장식을 달고 있는 우아하고 고고한 초월적 여성상으로 도식화된다.
1977년 제작된 두 작품, 머리에 뱀을 화관처럼 두른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와 검은 두건을 쓴 ‘수녀 테레사’는 전성기를 대변하는 초월적 여성상의 전형이지만, 그보다는 마녀와 성녀 이미지가 대구를 이루며 젠더와 재현의 문제를 건드린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메두사와 성모 마리아로 양분되는 뿌리 깊은 여성 이미지의 역사, 남성적 기준으로 설정된 전통적 재현 코드에 대한 응답인 양, 그는 꿈과 한, 환상과 좌절, 욕망과 절망의 이중심리를 표출하는 자전적 초상을 나르시시즘을 벗어나는 보편적 여성상, 억압을 승화시키고 현실을 초월하는 영구불멸의 상징적 여성으로 기표화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1980년대 초중반의 ‘황금의 비’ ‘어느 여인의 시 I, II’에서는 동물적 야성과 성상적 영성을 동시에 발하는 초현실적 여인을 재현하고, 자신의 삶과 그레타 가르보, 매릴린 먼로, 마돈나의 비극을 동일화한 작품들(1968~1990)에서는 꽃으로 환생한 불후의 스타를 통해 실체 없이 이미지로만 존재하는 여성상을 표상했다.
말기에 해당하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그는 상징적 밀도 대신에 감상과 향수가 팽배하는 누드의 여인 초상을 선보인다. 에로틱한 자세로 사지를 길게 편 과장된 비례의 누드상이 황혼기의 매너리즘을 암시하는 ‘누가 울어 I, II’(1988, 1989)에는 자신의 단골 모티프인 꽃과 개, 해외여행의 추억을 담은 트럼프 카드, 장갑, 스카프 등이 이국적 정취를 풍기는 소품으로 등장한다. 특히 원경에 묘사된 사막과 긴 머리를 앞으로 늘어뜨린 채 코끼리 등에 업혀 가는 여인은 작가의 원시문화 동경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이는 생애 마지막 작품들인 1995년의 ‘황혼의 통곡’과 ‘환상여행’(미완성작)에서 절정에 달한다. 여기서는 웅크리거나 누워 있는 누드의 군상이 억압과 해방, 통곡과 환상, 애수와 축제의 이중 감정을 이입시키며 원형적이고 원시적인 에로티시즘을 방출한다.
작가는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자신의 작업을 총결산하는 마지막 개인전을 열고, 같은 해 18번째 수필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을 출간한 이후 2015년 타계할 때까지 일체의 활동을 중단한다. 자전적 수필과 마찬가지로 그의 그림은 전체가 하나의 자화상, 또는 여인의 초상으로 독해된다. 작품을 자신을 비추어보는 심리적 거울로 간주하는 작가적 카르마에 대한 기시감이었을까,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옥자라는 본명을 거울(鏡)을 넣어 ‘鏡子(경자)’로 개명했다. 이름대로 그의 여인상은 자신의, 여성이라는 이름의 모든 것의 거울 반영이다. 실로 그의 여성 초상은 부계적 화단에서 여성작가가 여성을 주제화하는 것 자체가 젠더적 발언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어 단일 정체성의 남성과 차별화되는 여성의 이중 정체성, 사회적 여성과 본성적 여성, 모성애와 이성애, 야성과 영성, 마녀와 성녀로 양분되는 정신분석학적 여성상을 제시한 점에서 더욱더 그렇다.
천경자에 앞서 나혜석이 있었고, 같은 세대의 박래현이 있었지만, 천경자는 그들과 차별화되는 ‘여성적인’ 작품세계로 커다란 울림을 남겼다. 창작자의 성별을 암시하는 여성적 특성이 ‘여성적 전형’으로 치부되고 비주류로 폄훼되는 미술사적 통념에 맞서 그는 여성성을 진솔하게 표출하는 자연스러움과 당당함으로 새로운 여성 양식을 수립했다. 그것이 페미니즘 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본능적 창조충동 또는 예술적 조형 의지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 여성·여성주의 미술로서의 충분한 호소력을 갖는다.
4. 의미 있는 반쪽
삶의 페미니스트였으나 학습된 아카데믹 화가로 머물렀던 나혜석, 이념보다는 붓으로 여성성을 형상화하고 여성상을 양식화한 천경자.
양면성의 대척점에 선 이들은 각각 다른 양상으로 페미니즘 미술과 엇비스듬히 만난다. 시대적 한계인지 개인의 선택인지, 정치와 예술, 이념과 미학의 사잇길에서 일구어낸 이들의 예술적 업적이 반쪽의 페미니즘으로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후대 여성작가들에게 완결의 과제를 남겨놓은 의미 있는 반쪽이었다.
■김홍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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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희는 미술사학자이자 평론가·큐레이터다. 서울시립미술관과 경기도미술관, 대안공간 쌈지스페이스 관장 등을 거쳐 현재 백남준문화재단 이사장이다. 카셀도큐멘타14 감독선정위원·광주비엔날레 총감독·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다수의 페미니즘 미술전과 백남준·미디어아트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 <여성과 미술> <굿모닝 미스터 백> <큐레이터는 작가를 먹고산다> 등이 있다. 김세중상(저작출판), 석주미술상(평론), 월간미술대상(큐레이터) 등을 수상했다.
김홍희 미술사학자·평론가·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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