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N사피엔스] 현대화학의 시조, 반핵 운동가 라이너스 폴링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 교수 2022. 4. 1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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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스 폴링은 과학과 다른 분야에서 노벨상을 2번 수상한 유일한 인물이다. 위키피디아 제공

20세기 과학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양자역학이다.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세계관은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대체했으며 원자보다 작은 미시세계에서 작동하는 새로운 규칙을 정립했기 때문이다. 양자역학이 촉발한 20세기의 과학혁명이 다른 분야로 확산돼 나갔으리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마치 17세기 뉴턴 역학의 성공이 다른 과학 분야의 근대화에도 큰 영향을 미친 것과도 비슷하다. 실제로 화학 분야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화학이 20세기의 현대 화학으로 자리 잡은 것은 양자역학의 원리로 화학결합의 비밀을 규명했기 때문이다. 화학은 원소들 간의 결합에 관한 학문이고 이 과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미국의 물리화학자인 라이너스 폴링이다.

폴링은 1901년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태어나 오리건 농대에서 공부했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칼텍)에서 대학원에 진학해 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칼텍에서 교수로 일했다. 폴링이 칼텍의 조교수로 임명됐을 때 나이가 26세였다.

폴링의 대학원 지도교수이던 로스코 디킨슨 칼텍 교수는 나이도 젊었고 최신의 양자이론에도 정통했다. 디킨슨은 1920년대 당시의 첨단 기술이던 'X선 회절'로 폴링을 이끌었고 폴링은 이를 이용해 결정의 구조를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X선은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로 거시적으로는 파동이라 일반적 파동의 성질을 보인다. 파동은 일반적으로 장애물을 만나거나 좁은 틈을 지나갈 때 그 주변에까지 퍼져나가는 성질이 있다. 이를 '회절'이라 한다. 파동이 퍼져나갈 때 파면의 모든 점은 새로운 구면파의 근원으로 작용하며 그렇게 각 점에서 만들어진 파들은 서로 간섭을 일으켜 파동을 상쇄시키거나 강화하면서 새로운 파면을 형성한다. X선을 결정 속으로 조사하면 결정 속에서 규칙적으로 배열된 격자를 구성하는 원자와 부딪혀 튕겨 나온다. 이때 규칙적인 격자로부터 튕겨 나온 X선들이 서로 간섭을 일으켜 격자구조에 따라 독특한 패턴을 만든다. X선 회절 무늬를 이용해서 물질의 내부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이유다. 폴링은 1929년 X선 회절기법 연구를 통해 이온결정 구조를 분석하는 다섯 가지 규칙을 발표했다.

폴링이 제안한 혼성오비탈. 과학동아DB

1930년대로 접어들면서 폴링은 화학결합에 관한 중요한 논문들을 발표했다. 특히 '혼성오비탈'이라는 개념을 이때 처음 제시했다.

오비탈 또는 궤도함수는 원자 내에 전자가 존재할 확률분포로 보면 된다. 지극히 양자역학적인 개념으로서 슈뢰딩거 방정식의 파동함수에 대한 보른의 규칙과 코펜하겐 해석이 적용된 결과이다. 오비탈은 슈뢰딩거 방정식의 단순화된 근사적 풀이로서 전자가 하나 있을 때의 파동함수에 해당한다. 

이들 파동함수(궤도함수), 즉 오비탈의 종류는 양자수가 결정한다. 주양자수 n은 전자의 에너지, 부양자수 l은 전자의 각운동량, 자기양자수 m은 특정 방향에 대한 각운동량의 성분을 나타낸다. 주양자수 n은 n=1, 2, 3…의 자연수 값을 가진다. 흔히 전자껍질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주양자수로 결정되는 에너지준위이다. 부양자수 l은 주양자수 n이 주어졌을 때 l=0, 1, 2, ... , (n-1) 의 값을 가질 수 있다. 자기양자수 m은 주어진 l에 대해 -l, -(l-1), ..., 0, ... (l-1), l의 값을 가진다. 따라서 l의 가능한 경우의 수는 n개이고 m의 가능한 경우의 수는 (2l+1)이다. 관습적으로 화학에서는 l=0일 때를 s(sharp) 오비탈, l=1일 때를 p(principal) 오비탈, l=2일 때를 d(diffuse) 오비탈, l=3일 때를 f(fundamental) 오비탈이라 부른다. 보통 주양자수를 앞에 붙여 1s, 2s, 2p, 등으로 부른다. s 오비탈은 구형대칭이고 p 오비탈은 아령모양이다. 주어진 n에 대해 n개의 l의 경우의 수(l=0,1,2,...,n-1)가 존재하고, 각 l에 대해 (2l+1)개의 경우의 수가 존재하므로, 주어진 n에 대해 총 1+3+5+...+(2n-1) = n² 개의 경우의 수가 가능하다. 여기에 전자의 스핀이 두 가지 경우를 가질 수 있으므로 총 2n²개의 전자가 들어설 수 있다. 

슈뢰딩거 방정식이 나온 것이 1926년이었고 바로 이듬해인 1927년 독일의 발터 하이틀러와 프리츠 런던은 수소원자 둘이 결합된 수소분자에 양자역학의 원리를 적용해 두 수소원자 사이의 결합을 설명했다.

수소분자의 경우 두 개의 수소원자가 결합한 형태인데 하나의 수소원자는 하나의 전자만 갖고 있고 그 전자는 가장 낮은 에너지상태인 1s 상태에 있다. 스핀까지 고려하면 s 오비탈(l=0)에는 2개의 전자가 있을 수 있다. 그러니까 각 수소원자의 s오비탈은 절반만 차 있는 셈이다. 이제 두 개의 수소원자가 결합할 때 각자가 가진 하나의 전자를 서로 공유해 두 수소원자 모두 2개의 전자를 공유하면서 분자를 형성한다. 이런 화학결합을 공유결합이라 한다. 오비탈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소원자의 두 개의 1s 오비탈이 서로 겹쳐졌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분자를 구성하는 각 원소의 오비탈의 겹침으로 화학결합을 설명하는 이론을 '원자가 결합 이론'이라 한다. 여기에 기여했던 하이틀러와 런던, 그리고 미국의 존 슬레이터와  폴링의 이름을 따서 'HLSP'(하이틀러-런던-슬레이터-폴링)이론이라고도 부른다. 각 원소의 오비탈들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시그마결합, 파이결합이 있다. 

폴링은 좀더 복잡하고 다양한 분자들의 결합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혼성오비탈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간단히 말해서 분자형성에 참여하는 각 원소들의 원래 오비탈들이 서로 뒤섞여 새로운 오비탈을 형성해 결합을 이룬다는 의미다. 가령 s오비탈과 p오비탈이 융합돼 sp 혼성오비탈을 만드는 식이다.

혼성오비탈은 하나의 탄소와 네 개의 수소가 결합한 메탄(CH₄) 분자를 쉽게 설명한다. 원자번호 6번인 탄소는 6개의 전자를 갖고 있다. 6개의 전자는 1s 오비탈에 2개, 2s 오비탈에 2개, 2p 오비탈에 2개로 분포돼 있다. 탄소가 4개의 수소와 결합해 메탄을 만들 때에는 2s 오비탈 속 하나의 전자가 2p 오비탈로 옮겨가고, 이렇게 전자가 하나씩 남게 된 1개의 2s 오비탈과 세 개의 2p 오비탈이 융합해 네 개의 똑같은 sp³ 혼성오비탈을 만든다. 여기에 네 개의 수소가 각각 1s 오비탈을 가지고 sp³ 오비탈과 함께 결합해 정사면체 구조의 메탄을 만든다. 폴링의 연구는 1939년 출판한 저서 《화학결합의 본질과 분자 및 결정구조》로 집대성됐다. 책은 현대 화학의 기둥을 이루는 교과서로 평가받고 있다.
 
원자가이론은 오비탈들의 겹침으로 화학결합을 설명하기 때문에 전자들이 겹치는 오비탈에 편중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양자화학에서 또 다른 중요한 이론인 '분자오비탈(MO) 이론'과 다른 점이다. 분자오비탈 이론에서는 분자를 구성하는 각 원소의 원자핵들, 그 주변의 전자들을 모두 하나의 시스템으로 보고 모든 전자가 분자 전체에 걸쳐 분포할 수 있는 오비탈을 상정한다. 육각형 고리모양의 구조를 가진 벤젠(C6H6)을 예로 들어 보자. 고전적으로는 19세기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케쿨레가 벤젠의 고리구조를 제안했는데, 여기서 6각형을 이루는 탄소는 각각 이웃한 탄소와 단일결합과 이중결합을 하나씩 갖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육각형을 따라 단일결합과 이중결합이 번갈아 나타난다. 이때 단일결합과 이중결합이 서로 위치를 바꾸어도 전체 구조에는 변함이 없다. 케쿨레는 벤젠이 두 개의 구조 사이를 빠르게 왔다갔다하면서 진동한다고 설명했다. 폴링은 양자화학의 대가답게 벤젠을 두 상태 사이의 진동이 아니라 양자중첩으로 이해했다. 이를 공명이라 부른다. 

벤젠의 복잡한 구조를 컴퓨터로 재현한 모습. 과학동아DB

반면 분자오비탈 이론에서는 탄소-산소, 탄소-탄소의 결합 오비탈에 있지 않은 6개의 전자들이 탄소의 육각고리 전반에 걸쳐 골고루 퍼져 있다.  6개의 전자가 포함된 6개의 p 오비탈이 서로 중첩되면서 육각고리 위아래로 두 개의 도넛 모양의 결합오비탈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폴링은 1954년 화학결합의 본성을 연구한 공로로 노벨화학상을 단독으로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폴링은 다른 과학자들과 함께 반핵운동에 적극 나섰다. 그는 핵실험에 의한 방사능 낙진이 위험하지 않다는 정부의 주장에 반대했고 전 세계 1만명이 넘는 과학자들로부터 핵실험 반대 서명을 받아냈다. 

폴링의 적극적인 반핵운동은 1962년 노벨평화상으로 이어졌다. 동서간 핵무기 경쟁에 대한 투쟁이 수상 이유였다. 상은 1962년 수상자가 나오지 않아 이듬해인 1963년에 수여됐다.  역사상 복수의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마리 퀴리, 폴링, 존 바딘, 프레데릭 생어 넷뿐이다. 모두 2회 수상이다. 마리는 1903년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고 1911년 노벨화학상을 단독으로 받았다. 바딘은 1956년과 1972년 모두 노벨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생어는 1958년 노벨화학상을 단독으로 받았고 1980년에는 공동 수상했다. 서로 다른 두 분야에서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마리와 폴링뿐이다. 특히 노벨상 역사상 단독으로 2번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폴링이 유일하다.

폴링은 영국의 과학잡지 뉴사이언티스트가 선정한 역대 가장 위대한 과학자 2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반핵 운동에 앞장선 운동가로 변신한 폴링. 케미컬 에듀케이터 제공

※참고자료

-Pauling, Linus (1929). "The principles determining the structure of complex ionic crystals". J. Am. Chem. Soc. 51 (4): 1010–1026.
-Pauling, L. (1931), "The nature of the chemical bond. Application of results obtained from the quantum mechanics and from a theory of paramagnetic susceptibility to the structure of molecules", Journal of the American Chemical Society, 53 (4): 1367–1400.
-Heitler, W.; London, F. (1927). "Wechselwirkung neutraler Atome und homöopolare Bindung nach der Quantenmechanik". Zeitschrift für Physik. 44 (6–7): 455.
-테드 고어츨, 벤 고어츨, 《라이너스 폴링 평전》(박경서 옮김), 실천문학사.
-The Nobel Prize in Chemistry 1954. NobelPrize.org. Nobel Prize Outreach AB 2022. Tue. 12 Apr 2022. 《https://www.nobelprize.org/prizes/chemistry/1954/summary/
-The Nobel Peace Prize 1962. NobelPrize.org. Nobel Prize Outreach AB 2022. Mon. 11 Apr 2022. 《https://www.nobelprize.org/prizes/peace/1962/summary/》
-Nobel Prize facts. NobelPrize.org. Nobel Prize Outreach AB 2022. Mon. 11 Apr 2022. 《https://www.nobelprize.org/prizes/facts/nobel-prize-facts》.
-Horgan, J (1993). "Profile: Linus C. Pauling – Stubbornly Ahead of His Time". Scientific American. 266 (3): 36–40.
 

※필자소개

이종필 입자이론 물리학자.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교양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신의 입자를 찾아서》,《대통령을 위한 과학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아주 특별한 상대성이론 강의》, 《사이언스 브런치》,《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을 썼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을 옮겼다. 한국일보에 《이종필의 제5원소》를 연재하고 있다.

[이종필 건국대 상허교양대 교수 jongphil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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