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득 칼럼]사도의 꿈과 징용공의 눈물

양승득 입력 2022. 1. 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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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를 뚫고 달린 도쿄발 신칸센 고속 열차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멈춰 선 일본 니가타역. 이곳에서 멀지 않은 여객선 터미널에서 필자 가족 4명을 태운 쾌속선은 파도가 일렁이는 동해(일본해)를 한 시간 남짓 내달린 후 한 섬의 조용한 항구에 닻을 내렸다. 바다 냄새 물씬 나는 그리 크지 않은 배터였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눈부셨고 갈매기 합창이 파란 하늘을 수놓던 이때, 섬에서 받은 첫 느낌은 ‘평화’였다. 일본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서도 “좋다”는 소문만 믿고 무턱대고 나섰던 1박2일의 사도가시마 여행이 우리에게 준 선물은 따뜻한 안식과 지금도 잊히지 않는 다채로운 체험이었다. 섬사람들의 친절과 때묻지 않은 미소는 덤이었다. 연수생 시절이었던 26년 전 3월 초의 앨범 속 한 토막 추억이다.

제주도 면적의 약 절반 크기인 섬. 우리나라의 춘천 양양 부근(북위 38도)에서 오른쪽으로 선을 쭉 그으면 일본 본토에 닿기 전 나오는 곳. 인구 5만여명의 한적한 이 시골섬이 한·일 관계에 ‘태풍의 눈’으로 급부상했다. 섬 곳곳에 산재한 여러 금·은 광산 중 서북부의 몇 곳을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등재 추천 후보(사도 광산)로 지난해 말 선정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에 정식 추천 여부는 일본 정부에 달렸지만 결론은 오는 2월 1일까지 날 예정이다. 일본이 추천서를 제출하면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심사·권고를 거쳐 정식 등재 여부가 2023년 가려진다.

사도 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배경은 복합적이다. 관광·문화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고 지역 주민들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는 게 지자체의 표면적 이유다. 사도가시마 섬은 에도시대인 17세기 일본에서 최대 금·은 생산량을 자랑한 곳이다. 고순도의 금과 은을 생산해 낸 광산이 널려 있다 보니 광공업과 금속 가공 등이 발달해 있었다.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구리 등 전쟁 물자 확보를 위한 광산으로 활용됐고 이 기간 중 최대 1200여명의 조선인이 징용근로자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다수 광산이 문을 닫은 1990년대 이후 지역 경제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섬을 관할하는 사도시 홈페이지에 따르면 역내 총생산은 2006년 1961.41억엔에서 2018년 1723.8억엔으로 쪼그라들었다. 1인당 연소득은 같은 기간 205만 9천엔에서 2018년 212만 7천엔으로 거의 제자리였다. 일본의 2018년 1인당 GDP(국내총생산)3만 9159달러에 비하면 반 토막이다. 사도시와 니가타현이 사도 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20년 넘게 매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산을 관광 상품의 주력 테마로 앞세워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시의 이런 꿈은 아직 위험하다. 현재의 한·일 관계에 비춰 볼 때 작은 소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폭발력이 큰 초고성능 폭탄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파탄 직전까지 갔다는 평을 듣는 양국 관계를 걷잡을 수 없이 더 험악하게 만들 우려가 커서다. 징용근로자 배상문제를 둘러싸고 일본 기업의 한국내 재산 강제매각 절차가 진행 중인 상태에서 한국의 아픈 상처를 또 한 번 후비는 처사로 비난받을 수 있다. 하시마(군함도)탄광의 6년 전 문화유산 등재 때 일본 정부가 관련 전시 시설에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설명하는 조치를 하겠다고 약속한 후 지키지 않은 것을 한국 정부와 국민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가시마는 물론 일본 전역의 886개 탄광과 광산에서 강제 노동에 시달렸던 징용근로자들의 피와 눈물에 대한 한국의 분노를 몽땅 뒤집어쓸 수도 있다. 한·일 관계 정상화와 인도·도의적 차원의 치유가 선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도의 꿈은 미루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근거다. “견딤의 시간이 쓰임의 시간을 결정한다”는 일본 궁목수 가문의 가르침을 기억한다면 사도의 염원은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양승득 (tanuki26@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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