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 성장기 '왕성한 쌀 소비' 상징..식습관 바뀌자 순식간에 자취 감춰

기자 2022. 2. 1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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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80년대 한국의 보통 가정에 하나씩은 있었던 쌀통. 쌀통은 1인분 정량에 대한 표준을 정해줬다. 자료사진
1970년대 삼익쌀통 TV 광고.
쌀 소비량이 줄어들면서 이제 쌀은 소량 포장이 대세가 됐다. 대형마트의 쌀 판매대. 연합뉴스
김태호 전북대 교수

■ 기술이 지나간 자리 - ⑩ 쌀통

핵가족 늘며 보관·덜어내기 편리한 쌀통 열풍… 소비 급증하자 국가서 ‘1인분’까지 정해

1인당 소비량 40년만에 반토막… 소포장 판매가 주류 되고 김치냉장고 등장하며 효용 사라져

‘쌀통’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서는 “쌀을 넣어두는 통”이라고 풀고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일반명사다. 넓게 보자면 전통사회에서 쓰던 뒤주도 쌀통의 일종일 것이다. 하지만 1970∼1980년대를 기억하는 세대라면 쌀통이라는 말에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플라스틱 또는 철재로 만든 네모 반듯한 상자에, 아래쪽에 단추나 레버가 달려 있어 일정한 양의 쌀을 덜어낼 수 있도록 만든 ‘개량 쌀통’이 이 무렵 도시 중산층 가정의 새로운 가재도구로 각광받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런 쌀통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쌀통은 어째서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잠시 유행했다가, 또 어째서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일까? 쌀통의 짧고 굵은 역사를 통해 우리는 한국 현대사의 어떤 측면을 들여다볼 수 있을까?

도시화와 쌀 소비 형태의 변화

쌀은 보관이 중요하다. 밥맛을 따질 때 품종부터 보는 이가 많지만, 아무리 평판 높은 품종의 쌀이라도 수확 후 보관에 신경을 쓰지 않거나 서투른 솜씨로 밥을 짓는다면 그 밥이 맛있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오랜 세월 벼농사를 짓고 쌀밥을 먹어 온 아시아 사람들은 쌀이 보관에 민감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통풍이 잘되는 저장 공간을 만들었고, 뒤주와 같이 쌀을 담아두는 기물을 따로 만들곤 했다. 쌀이 중요한 사회였으므로 뒤주는 한 집안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상징성을 얻기도 했다. 대가족 시대에 시어머니가 맏며느리에게 뒤주 열쇠를 넘겨주는 것은 곧 집안 살림의 권한을 물려준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그에 맞물린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쌀을 보관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농촌의 대가족이 쪼개져 도시의 주택과 아파트로 나뉘어 들어가게 되자 가구당 차지하는 생활 공간도 줄어들었고, 일 년 먹을 쌀을 쌓아두기도 어렵게 됐다. 그 대신 필요할 때마다 쌀을 사다 먹는 집이 늘어났다. 짚으로 만든 80㎏ 가마니는 차츰 합성수지 마대로 만든 40㎏ 포대로 대체됐지만, 여전히 개인이 시장에서 지고 오기에는 너무 무거웠으므로 시장의 싸전에는 쌀자루를 실은 오토바이가 수시로 드나들며 집집이 쌀을 배달했다.

나라가 정해준 “1인분”

쌀을 가마니째 들여놓아도 금세 동나던 시절이 있었다. 고도성장기인 1960∼1970년대에 국민 1인당 연간 평균 쌀 소비량은 120∼130㎏ 선을 넘나들었다. 한 가마니가 80㎏이니 한 사람이 한 해 동안 대략 한 가마니 반을 먹은 셈이다. 1970년대 가구당 평균 인원수가 대략 5명이므로, 한 가구에서 한 해 동안 먹는 쌀의 양은 여덟 가마니 정도였고, 달리 말하면 평균적인 가구에서 쌀 한 가마니를 사도 한 달 반이면 소진됐다는 얘기가 된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쌀 소비는 꾸준히 늘어났다. 박정희 정부는 한편으로는 통일벼를 비롯한 신품종 개발을 통해 생산을 늘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한 절미운동과 혼분식 정책을 밀어붙여 수요를 억제하고자 했다. 절미운동을 강제하기 위한 물리적 수단 중에는 “공깃밥”도 포함됐다. 공깃밥이란 글자 그대로 풀면 공기에 담은 밥을 뜻하지만, 1970년대에 절미운동의 수단으로 공깃밥을 이용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선 그전까지 식당에서 밥은 더 달라면 얼마든지 더 주는 것이었는데, 공깃밥이 제도화된 뒤에는 밥을 한 공기 추가할 때마다 정해진 가격을 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부에서는 꼼꼼하게도 밥공기의 크기까지 관리했다. 서울시는 1976년 표준 스테인리스스틸 밥공기의 규격을 “지름 10.5㎝, 높이 6㎝”로 정했다. 대략 요즘 시판되는 즉석밥 1인분(약 200g) 정도의 양이니 당시 기준으로는 상당히 적었을 것이다. 즉 통상보다 작은 그릇을 밥을 파는 기준 단위로 정해버림으로써 쌀 소비를 조금이라도 줄이고자 한 것이다.

신식 쌀통이 소비자들에게 강조한 것도 이렇게 양을 맞출 수 있는 기능이었다. 신식 쌀통의 특징 중 하나는 쌀독처럼 위에서 퍼내는 것이 아니라 아래쪽의 배출구를 통해 편리하게 쌀을 덜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일명 “절미 계량 쌀통”들은 버튼을 한 번 누르면 1인분, 두 번 누르면 2인분 식으로 정해진 양의 쌀을 내줬다. 1인분은 마른 쌀 부피로 180㎖, 무게로는 150g 정도며, 이것으로 밥을 지으면 약 300g이 나왔다. (밖에서 사 먹는 1인분보다는 집밥 양에 여유를 인정해 줬던 것 같다.)

정점 찍자마자 줄어든 쌀 소비

금속과 플라스틱 등 산업시대의 소재로 만든 새로운 쌀통은 “라이스박스” 같은 상표명으로 스스로를 뒤주나 쌀독과 구별하고자 했다. 전통가옥처럼 “광”을 따로 둘 수 없는 아파트에서도 주방에 놓고 쓸 수 있도록, 외관도 다른 주방가구와 어울리도록 디자인했다.

하지만 개량 쌀통은 도시 핵가족 등에서 잠시 인기를 끌었을 뿐, 보편적인 가재도구로 자리 잡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잊혀 갔다. 가장 큰 이유는 쌀 소비가 1980년대 초반 정점을 찍고는 빠르게 하락세로 돌아선 것이다. 연간 1인당 쌀 소비량은 1980년을 전후로 약 140㎏에 다다른 뒤에는 지속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제성장의 여파로 육류, 낙농품, 과일 등 다양한 식품을 소비하게 되고, 서구식 식생활이 확산되면서 쌀에 대한 의존도가 급격히 낮아진 것이다. 1990년에는 120㎏, 1998년에는 100㎏, 2000년에는 90㎏ 선이 연달아 무너졌고, 2020년 전후로는 60㎏ 선을 넘나들고 있다. 약 40년 만에 절반 아래로 “주곡”의 소비량이 줄어든 것이다.

이렇게 총 소비량이 줄면서 쌀 소비 형태도 다시 한 번 변화했다. 시장의 싸전에서 큰 포대로 쌀을 배달시켜 먹는 이들은 줄어들었고, 자가용으로 대형마트 등에 가서 소포장의 쌀을 직접 사 오는 이들이 늘어났다. 마트에서는 20㎏이 사실상 가장 큰 단위가 됐고, 2017년에는 10㎏ 포장에 담긴 쌀이 전체 판매량의 절반을 넘어섰다.

이렇게 쌀 소비가 줄고 소포장을 사서 바로 소비하는 것이 대세가 되면서 쌀통의 수요도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한 가마니 또는 40㎏ 포장에 맞춰 만든 쌀통은 다 채울 일도 없는데 거추장스럽게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이 됐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 소용량 쌀통도 출시됐지만, 20㎏이나 10㎏ 보관을 위해서는 구태여 쌀통을 살 필요도 없었다.

더욱이 1990년대 이후 대유행한 김치냉장고는 과거 단독주택의 광과 헛간, 그리고 장독대의 기능을 모두 흡수하는 만능 보관소가 됐다. 쌀도 김치냉장고(김치와는 다른 칸)에 보관하면 별도의 보관 장치가 필요 없다고 여기는 이들도 점점 늘어났다.

쌀의 역사를 반영하는 쌀통의 역사

물론 쌀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10∼20㎏의 소형 쌀통은 김치냉장고를 따로 두기 어려운 1인 가구 등에서 여전히 약간의 수요가 있다. 하지만 과거와 같이 신혼 가정의 살림 장만 목록에 들어갈 정도로 비중 있는 물건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쌀통이라는 기술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은 아니다. 한국인이 쌀을 덜 먹게 됨에 따라, 쌀을 잘 보관하고 소비하기 위해 개발했던 기술들도 덩달아 그 중요성이 줄어든 것뿐이다. 그런 점에서 쌀통이라는 기술은 쌀이라는 물건에 의존하는 그림자와 같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고, 한국인의 일상에서 쌀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그 그림자도 옅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아가 쌀통의 짧은 역사에는 한국 현대사의 여러 요소가 스며들어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 핵가족화와 아파트 생활의 확산, 쌀 소비 억제를 위한 절미운동 같은 요소들이 쌀통의 확산에 유리한 여건을 마련했다면, 반대로 식생활의 서구화와 쌀 소비 감소 등은 쌀통이라는 기술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김태호 전북대 교수

■ 용어 설명

절미운동 : 쌀 수요를 억제함으로써 수급의 불균형을 타개하고자 했던 정책. 자발적인 “운동”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관 주도로 전개됐다. 정부에서는 절미운동의 일환으로 식당에서 쌀밥을 팔지 않는 “무미일(無米日)”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는데, 무미일은 처음에는 주 1회(수요일 점심)로 실시됐으나 곧 주 2회(수, 토)로 확장됐고 심지어 서울시는 주 5회 안을 검토하기도 했다. 설렁탕에 소면이 들어가는 것도 절미운동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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