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속의 역사] (50) 진평왕의 고민

강시일 기자 2025. 5. 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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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외세 침략, 귀족의 견제, 불교 정책 강화, 후계자 선정의 고민 하나씩 해결
진평왕이 외세 침략에 대비해 강력하게 쌓아올린 명활산성 북문지.

신라 26대 진평왕은 13세에 미실과 노리부의 권력욕에 따라 어부지리로 왕좌에 앉게 됐다. 이어 미실은 우왕후가 되어 실권을 행세하며 진평왕을 대신해 나라의 살림살이를 좌지우지하며 섭정했다.

진평왕이 성인이 되면서 실권을 행세하는 시기에도 수많은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골몰해야 했다. 약해진 왕권에 도전해오는 귀족세력들의 견제, 백성들을 하나로 이끌어갈 정치이념 불교에 대한 정책 개발도 큰 숙제였다. 또 아들이 없어 54년의 긴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하는 고민에 빠졌다. 왕은 이 모든 고민은 차근차근 하나씩 해결하면서 왕권 강화에 나섰다.

결국 진평왕의 고민은 둘째 공주 덕만이가 해결해 주었다. 덕만 공주가 용 숙부와 혼인을 하면서 용 숙부 형제를 중심으로 귀족세력의 힘을 얻어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하는 기적을 일구어냈다.
최근 경주시가 복원하고 있는 명활산성 발굴도.

◆신화설화: 13세의 어린 왕

진평왕은 579년 진지왕의 폐위에 이어 13세의 나이로 신라 26대 왕으로 즉위했다. 성은 김이고 이름은 백정이다. 시호는 진평이며, 건복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진평왕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맏아들인 동륜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입종 갈문왕의 딸이자 진흥왕의 누이인 만호 부인 김씨이다. 왕비는 복승 갈문왕의 딸인 마야부인 김씨이다. 삼국유사에는 어머니를 만녕 부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승만 부인인 손씨를 후비로 삼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삼국사기 등의 기록에 의하면 진평왕은 태어날 때부터 외모가 범상치 않았고 체격이 컸으며 지혜롭고 의지가 굳고 밝고 활달했다. 그리고 사냥을 무척 좋아해서 병부령 김후직의 간언에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죽은 뒤 무덤 속에서도 간언을 하는 김후직의 충심에 감동해 사냥을 그만뒀다고 전한다.
명활산성의 흔적.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키가 11자나 되었으며 천주사를 방문했을 때 그가 밟은 돌계단이 한꺼번에 3개나 부러지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정란과 황음을 이유로 귀족회의에서 진지왕을 폐위시켰다고 기록돼 있다. 미실과 노리부 등이 결탁해 거칠부를 숙청하고, 화백회의를 열어 진지왕을 폐위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실이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노리부를 앞세워 진지왕을 폐위하고, 어린 백정을 왕위에 오르게 한 것이다.

미실의 횡포에 가까운 권력욕은 하늘을 찔렀다. 상대등을 노리부로 앉히고 인사는 물론 사병들을 부리기 위해 화랑세력까지 손아귀에 넣고, 풍월주를 비롯한 실력 있는 청년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였다. 진평왕은 미실이 나이들어 늙어가면서 서서히 왕권을 회복하고, 친정체제를 구축해 제도를 정비하고, 성을 쌓아 외세의 침략에 대비했다.

삼국유사는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천사옥대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진지왕에서 진평왕으로 왕위 교체 과정에 왕실 내부의 갈등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어린 왕이 차지한 권력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어내기 위해 만들어진 신화일 수도 있다.
경주 보문동의 신라 26대 진평왕릉.

◆흔적: 진평왕릉과 선덕여왕길

삼국사기는 진평왕의 릉을 한지에 조성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기부의 위치를 현재 보문동지역으로 보고 마을 서편의 이름 없는 고분을 진평왕릉으로 비정했다. 지금은 사적지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지금 왕릉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분 형태로 둘레에는 자연석을 보호석으로 쌓았던 것으로 흔적이 남아있다. 이와 같이 자연석을 이용해 보호석으로 쌓은 것은 삼국시대 말기와 통일신라 초기에 나타나는 형식이다.

진평왕릉 주변에는 소나무와 버드나무 등의 고목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어 공원으로 신성시됐다. 지금은 고목들이 많이 쓰러지고, 새로 조성한 초목들이 공원을 이루고 있지만 아직 수백 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고목들이 왕릉 일대에 우거져 있어 웨딩촬영 등으로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진평왕릉의 숲 왕릉 뒤편의 고사하고 있는 고목.

진평왕릉은 1970년 이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고분이지만 육부 가운데 한기부 또는 한지부로 불리던 경주 중심지역의 북쪽에 해당하는 이곳을 진평왕릉으로 비정했다.

최근 경주시는 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까지 이어지는 산책로를 조성했다. 산책로는 황토흙을 깔아 맨발걷기하는 시민들이 동호회를 결성하고 매주 정기적인 걷기에 나서 시민건강 증진에도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산책로 가장자리에는 벚나무와 겹벚꽃을 심어 봄이면 화창한 꽃길이 되면서 핫플레이스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주변에는 맛집과 카페가 줄을 지어 문을 열면서 역사문화거리로 인기다.
진평왕릉의 숲.

◆스토리텔링: 사위 보다는 딸

진평왕은 미실의 섭정에 이어 친정체제로 전환했지만 왕권의 약화로 인한 귀족들의 심각한 견제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여기에 백제와 고구려, 왜 등의 파상적인 공격에 따른 정세 불안과 전쟁 대비, 아들이 없어 후계자에 대한 고민, 진흥왕에 이은 불교의 안정화를 마련해야 하는 산적한 정치적 부담이 컸다.

먼저 외세 침략에 대해서는 접경지역에 성을 쌓는 등으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용수와 용춘 형제 등 왕가 중심인물로 귀족들에 대한 견제세력을 키웠다. 또 불교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당나라에 유학중인 걸출한 인재인 원광법사를 요청해 불러들였다. 원광법사는 남진정책으로 쉴 새 없이 밀고 내려오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수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걸사표'를 보내 황제의 마음을 움직여 진평왕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원광은 탁월한 글 솜씨를 발휘해 국제적인 문서는 물론 궁궐의 제반 문서작성을 담당하며 진평왕을 지원했다.

무엇보다 진평왕의 가장 큰 고민은 왕위를 이을 후계자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에게는 왕위를 물려줄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다. 천명과 선덕, 선화 등 딸들, 공주만 줄줄이 태어나 아버지를 바라봤다. 기쁨이자 슬픔이었다.

진평왕은 할 수 없이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이었던 사촌들에게 눈을 돌렸다. 진지왕이 폐위되기 전까지는 어엿한 왕자로 성골이면서 지혜롭고 용맹스러운 용수와 용춘 형제였다. 그들은 진평왕에게는 사촌이었다.
진평왕이 덕만공주와 왕위 계승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있는 장면을 인공지능 AI가 그린 그림.

왕은 일찍이 성품이 뛰어나면서도 지혜롭고 용맹스런 사촌 용수와 용춘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나라의 일을 맡아보도록 했다. 그리고 진평왕은 용수와 용춘 형제를 천명, 선덕공주와 짝을 지었다. 사위로 맞아 들여 반란의 여지를 없애고 왕위를 물려줄 생각에서 취한 조처였다.

이러한 생각으로 왕이 왕비에게 조용하게 물었다. "공주들이 과년하여 결혼을 서둘러야 할 터인데 마음에 둔 사내들이 있는지 왕비가 넌지시 알아보세요." 왕비는 그러마고 대답하고는 총총걸음으로 공주 천명의 방으로 갔다.

왕비는 공주 입에서 "용 숙부가 좋아요"라며 부끄러워 겨우 끄집어내는 대답을 확인하고는 잰걸음으로 돌아와 왕에게 공주의 뜻을 전했다. 왕은 이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방을 붙여 전국민들에게 공주의 혼인 소식을 알렸다.

그리고 진평왕은 용수와 용춘을 따로 조용히 불러 의중을 물었다. "나에게는 아들이 없다. 그렇지만 사위도 아들이나 다를 바 없으니 네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며 명령하듯 타이르듯이 의중을 물었다.

그러나 용수의 대답은 의외였다. "저는 폐위된 왕의 자식입니다. 나라의 죄인으로 오로지 그 업장소멸을 위해 열심히 일할 뿐입니다. 왕위를 잇는다는 것은 역사에 죄를 더하는 일입니다. 그것만은 아니됩니다"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용춘도 "부마의 자리도 힘에 겨워 어깨가 무너져내리는 듯합니다. 당치도 않으신 하명은 거두어주십시오"라며 용수와 똑같이 왕위를 잇는 일에는 추호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진평왕은 하는 수 없이 용수와 용춘 형제에게 여왕을 받들어 나라가 흔들림 없이 태평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을 당부하며 삼국시대 최초로 공주에게 왕위를 물려줬다.

*이 글은 문화콘텐츠 육성을 위해 스토리텔링 한 것이므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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