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노포기행] 서울 외대앞 50년 전통 중화요릿집 '영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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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가게’는 30년 이상 명맥을 유지하면서도 오래도록 고객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점포 가운데, 중소벤처기업부에서 그 우수성과 성장 가능성을 높게 평가 받아 공식 인증받은 점포입니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신한카드, 그리고 브릭스 매거진이 '백년가게'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요리사이자 작가인 박찬일 요리사와 함께 백년가게 탐방에 나섰습니다. 여러 저서를 통해 '노포'라는 말을 처음으로 대중에 알린 박찬일 요리사와 다양한 지역으로 백년가게 탐방을 떠나보세요.
박찬일  요리사

취재 당일은 가게 앞에 줄이 없었다. 의아했다. 먼지 하나 없는 가게. 깨끗하다. 맛있는 향이 물씬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라드, 즉 돼지 지방 기름의 냄새였다. 여튼, 손님이 없는 이유는?

서울 이문동에 있는 백년가게 '영화장'

“취재하는 날에는 영업 안 해야지요. 손님한테 피해가 가요. 하나만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그래서 휴무일에 취재를 잡았다고 한다. 사람 좋은 주방장 유영승(64) 씨가 웃었다. 그는 요리사처럼 안 보인다. 말하자면, 화학이나 물리학을 연구하는 박사님처럼 보인다.

'영화장'을 운영하는 유영승 대표
박찬일 요리사

“요리도 박사가 되려면 힘들지요. 저는 요리는 자신 있어요.”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요리에 정말 박사급이다. 어딘가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사진이 잘 안 받는 얼굴이다. 팔뚝에 보니, 흉터가 잔뜩이다. 방울방울 둥근 꽃이 피어 있고, 길게 칼날처럼 난 자국도 있다

“아, 이거요. 제가 요리를 직접 하다 보니, 기름이 튀어서. 칼날 자국은 옆에서 볶던 직원이 웍을 돌리는 데 데었어요. 우리는 이걸 훈장이라고 해요.”

유영승 대표의 팔에 난 상처

훈장이다. 벌써 50년 가까운 부엌 인생. 짜장면이 나왔다. 독자분들께 말씀드리자면, 나는 짜장면이라는 주제 하나로 단행본을 쓴 사람이다. 그래서 아는 척을 좀 할 수 있다. 서울 3대 짜장면이라는 이름이 붙은 영화장 짜장면을 만났다.

“다른 건 없어요. 우리 집 짜장에는 설탕을 안 넣어요. 그러니 옛날 맛이 나지요. 미리 볶아 놓지도 않아요. 주문한 만큼 볶아서 써요. 늦게 나와서 손님이 기다려야 해요. 뭐, 다른 뜻은 없고 옛날부터, 우리 어머니부터 그렇게 하던 걸 지금도 하고 있는 거예요.”

'영화장'의 짜장면
짜장면을 맛보는 박찬일 요리사

어머니? 이 집의 뿌리는 어머니라고? 주방복 떨쳐입은 건장한 남자 주사(廚師. 우리 말에는 없고, 중국에서 쓴다. 요리사, 주방장이란 뜻이다)가 이런 노포의 원조 아닌가.

“아, 우리 집은 어머니가 시작하셨어요. 중국에서 건너와서 먹고 살기 위해 작은 중국집을 연 게 시초예요.”

가게 벽에 붙어 있는 할머니 정수지 님의 사진

영화장 벽에는 가계도가 붙어 있다. 시작 1948년, 사천(쓰촨) 출신으로 조선에 온 할머니 정수지가 충남 부여에서 복흥루를 연 게 시초다. 대륙에서 일본군에게 남편을 잃고, 조선 땅에 혼자 와서 일으킨 가게다.

아들 유지곤에게 이어졌고, 현재로서 3대가 계승되었다. 아버지 유지곤은 대한민국 마지막 ‘호떡집’이자 만두 명가였던 명동 취천루의 요리사를 거쳐 지배인을 했다. 전설적인 취천루는 사라진 지 오래다. 호떡집이란 호떡만 구워 파는 게 아니라 만두, 스낵, 중국식 아침 식사 등 요릿집에서 안 파는 걸 취급하는 종합 간이식당을 의미한다. 나중에 호떡만 파는 집으로 변했다.

'영화장'의 변천사

“아버지가 이쪽으로 오셔서 국빈관이라는 중국집을 인수했어요. 이듬해 영화장으로 개명하고 어머니랑 같이 오래 영업하셨지요. 그게 1970년부터입니다. 우리 가게의 역사가 그때부터 시작됐어요. 2003년에 저와 아내가 물려받았습니다.”

영화장 내부

55년 가까이 되는 노포가 되었다. 그는 노포가 주는 부담이 크다고 한다.

“여기 거쳐 간 단골이 지금도 오시고, 아버지 단골도 오세요. 요리도 당연히 제대로 해야지요. 전 주방에서 하루 종일 살아요. 습관이 됐어요.”

옛날 요리 몇 가지를 부탁했다. 그가 불을 피우고 커다란 중화팬을 흔들고 튀겨가며 요리를 준비한다. 하나같이 옛날 맛이 난다.

직접 요리를 해 준 유영승 대표

그는 유명한 이연복 씨와 동급생이다. 건너 건너 다 친구가 되는 사이다. 아마도, 화교 요리사의 거의 마지막 세대다. 60대 이후로는 화교 요리사가 거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 세대가 고단한 요리사를 권하지 않았고, 과거와 달리 다양한 직업을 선택할 수 있게 되면서다.

화교 요리사들의 사진

아버지 유지곤은 아주 재밌는 분이라고 한다. 유영승의 ‘승’자가 ‘중화민국 승리’에서 온 것이란다. 자식들 돌림자가 그런 식이다. 여동생 이름이 ‘영화’여서 가게도 영화장이 되었다.

“거창한 이름이 아니고, 재미있게 지으신 거죠(웃음).”

옛날엔 정말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돈이 가게 바닥에 굴러떨어질 정도였다. 하루에 400만 원씩 판 게 흔했다. 70년대, 80년대 400만 원이면 지금은 열 배로 계산하면 비슷하다.

“전 요리 안 하려고 했어요. 자동차 기술 같은 걸 배우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요리를 해보니 이게 정말 재미있었어요. 서울 시내 고급 호텔, 요릿집에서 배우면서 기술을 늘렸지요.”

직접 면을 뽑는 영화장

아버지는 계속 영화장을 운영했고, 그는 호텔 요리사로 일했다. 프라자, 힐튼 등에서 일했다. 요즘은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고급 호텔 중식당 주방은 화교가 다 장악하고 있을 때였다.

“월급도 많았고, 일도 많았어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편찮아져서 영화장으로 오게 됐죠.”

요리가 하나씩 나오기 시작했다. 전설다운 맛이 이어졌다. 그는 혼자서 대여섯 가지 요리를 전부 준비했다. 직원 쉬는 날, 나오라고 하기 싫었다고 한다.

옛날식 라조기 - 현재의 라조기는 순살 닭고기를 사용한다.
잡채 - 취재를 위해 특별히 복원한 메뉴이고, 현재는 판매하지 않는다.
양저우볶음밥

옛날식 라조기, 잡채, 양저우볶음밥, 삼선백짬뽕 / 현재의 라조기는 순살 닭고기를 사용하고, 잡채는 판매하지 않는다

영화장이 언제까지 이 자리에 있을지 모르겠다. 포스트 유영승은 누가 할지. 한국의 화교 중식당은 거의 대가 끊어지고 있다. 맛있는 노포 요리 먹고 마음이 괜히 무거워졌다.

취재 후기인데, 영화장 취재한 소식을 주변에 알렸더니 흥미로운 반응이 많이 나왔다. 맛있는 노포다, 늘 줄 서야 한다. 사장님과 사모님이 친절하다, 아 오래전 기억을 되살려준다……. 이문동에 살거나 학교에 다녔던 많은 친구들이 호응해줬다. 좋은 가게라는 뜻이어서 뿌듯했다.

글·인터뷰 | 박찬일
사진 | 신태진
기획 |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 신한카드 & 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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