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2026 AVC(아시아배구연맹)컵에서 7전 전승 우승을 달성하며 세계랭킹을 40위에서 31위로 끌어올렸다. 차상현 감독 부임 후 첫 국제대회에서 트로피를 거머쥔 이번 결과는 단순한 대회 우승을 넘어, 김연경·양효진 시대 이후 침체했던 한국 여자배구가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점에서 무게감이 다르다. 한국이 아시아권 국제대회에서 정상에 오른 건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12년 만이며, 김연경 은퇴 이후로는 처음이다.

이번 AVC컵 출전은 한국 여자배구로서는 선택이 아닌 결과였다. 한국은 2025년 FIVB(국제배구연맹) 주관 최상급 대회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 최하위에 그치며 강등됐다. VNL에 잔류하지 못하면서 2026시즌은 VNL 무대 대신 AVC컵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세계 4위)·중국(6위)·태국(23위) 등 아시아 최상위권 팀들이 VNL에 출전 중이었기 때문에, 이번 대회의 전력 구성이 최정예 대결이 아니었다는 점은 냉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맥락이다.
그럼에도 한국 여자배구가 처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번 우승의 의미는 작지 않다. 김연경·양효진·박정아 등 2012 런던 올림픽 4강 주역들이 차례로 대표팀을 떠난 뒤 한국은 세계랭킹 40위까지 추락했다. 아시아에서도 상위권 팀과의 격차가 커졌다는 평가를 받았고, 재건 기간이 길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차상현 감독은 이런 상황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부임 후 첫 국제대회 무대였던 이번 AVC컵에서 차상현호는 조별리그 5전 전승으로 A조 1위를 확보한 뒤, 준결승에서 베트남(세계 29위)을 3-0으로 꺾고 결승까지 올랐다. 조별리그 최종전에서 대만을 상대로 3-2 풀세트 접전 끝에 겨우 승리했던 경험이 결승에서 약이 됐다. 같은 상대를 결승에서 3-0으로 완파하며, 대회 안에서도 경기력이 일관되게 끌어올려졌음을 수치로 증명했다.

14일 필리핀 남일로코스주 캔돈 시티 아레나에서 열린 결승에서 한국은 대만(세계 34위)을 세트 스코어 3-0으로 제압했다. 각 세트 스코어는 25-19, 25-19, 25-22였다.
1세트는 초반 0-3 출발로 대만에 기선을 내줬으나 강소휘(한국도로공사)의 연속 득점과 나현수(현대건설)·정윤주(흥국생명)의 고른 득점포 가동으로 12-12 균형을 맞춘 뒤 역전에 성공했다. 강소휘는 이 세트에서만 공격 시도 10번 중 7개를 성공시키며 7점을 올려 흐름을 주도했다. 블로킹에서 1-5로 밀렸지만 공격 득점 18-11 우위로 상쇄한 구도였다.
2세트는 시작부터 달랐다. 한국은 7-2로 치고 나가며 주도권을 확실히 잡았다. 세터 김다인(현대건설)이 대만이 사이드 공격에 집중하는 틈을 노려 미들블로커 박은진(정관장)과 이주아(IBK기업은행)의 속공·이동공격을 적극 활용했고, 대만은 이 세트에서만 9개의 범실을 기록하며 스스로 무너졌다.

3세트가 고비였다. 대만이 장이지의 강타와 차이유춘의 날카로운 서브로 반격을 가하며 13-8 리드를 뒤집고 19-19 동점까지 따라왔다. 그러나 강소휘가 20-19 상황에서 블로킹 득점을 시작으로 21·22·23점을 연속 공격으로 뽑아내며 균형을 깼다. 이후 이예림(현대건설)의 퀵오픈으로 매치 포인트를 만들었고, 정윤주의 블로킹으로 우승을 확정했다.
개인 수상 내역도 풍성했다. 강소휘는 대회 통산 100득점(득점 순위 2위)을 기록하며 MVP와 베스트 아웃사이드 히터상을 동시 수상했다. 박은진은 베스트 미들블로커상, 나현수는 베스트 아포짓 스파이커상을 각각 받았다. 팀 득점은 강소휘 14점, 나현수 12점, 정윤주 10점, 박은진 8점, 이주아 7점 순이었다. 대만의 이치장이 양 팀 통틀어 최다인 16점을 올렸지만 팀 패배로 빛이 바랬다.

이번 우승이 단순히 고무적인 결과 이상인 이유는 결과보다 과정에 있다. 랭킹 포인트 기준으로 보면 한국은 대회 전 99.53점에서 39.02점을 추가해 138.55점, 31위로 올랐다. 이 수치가 중요한 이유는 내년 예정된 FIVB 월드컵(구 세계선수권)의 참가 요건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32개 팀이 출전하는 이 대회에 진출하려면 랭킹 상위권 유지가 필수적인데, 40위로는 문턱을 넘기 어려웠지만 31위로 도약하며 가능성의 문이 열렸다.
물론 대회 참가국 구성을 외면할 수는 없다. 일본·중국·태국이 빠진 무대에서의 우승이라는 점은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감안하더라도 세대교체를 마친 팀이 국제대회에서 7전 전승을 기록하며 흔들리지 않는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사실은 별개의 문제다. 특히 3세트에서 19-19 동점을 허용한 뒤 강소휘가 4점을 연속 생산하며 고비를 넘긴 장면은 경험과 배짱이 동시에 필요한 상황이었다. 세대교체 팀에서 이런 클러치 능력이 나왔다는 점은, 향후 더 강한 무대를 앞두고도 긍정적인 신호다.

강소휘의 컨디션 회복도 이번 대회의 또 다른 수확이다. 대회 MVP와 베스트 아웃사이드 히터상을 동시 수상하며 팀의 절대적 에이스임을 재확인했다. 아직 김연경 시대의 위상을 논하기는 이르지만, 한국 여자배구에서 당분간 절대적 비중을 차지해야 할 선수가 제 역할을 한다는 확인 자체가 중요하다.
차상현호는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나 진짜 시험은 앞에 있다. 일본(세계 4위)·중국(6위)과 맞붙는 VNL 복귀 무대, 혹은 아시안게임에서의 성적이 이번 우승의 가치를 사후 평가할 진짜 기준이 될 것이다. 한국 여자배구가 이번 AVC컵 우승을 발판으로 삼아 강호들과 경쟁할 수 있는 팀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다음 무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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