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의 둘째 딸 서호정 씨가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자회사인 오설록에 입사했다. 앞서 본사에서 경영수업을 받던 장녀 서민정 씨가 퇴사와 재입사, 결혼과 이혼을 거쳐 장기휴직에 들어간 사이 서 회장의 주식을 연달아 상속 받은 차녀가 경영실무에도 등장한 것이다. 이에 안갯속이던 그룹 후계구도의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4일 아모레퍼시픽에 따르면 서 씨는 이달 1일 오설록 제품개발(PD)팀 신입사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1995년생인 서 씨는 2018년 미국 코넬대 호텔경영학과를 졸업했다. 그가 아모레퍼시픽에 공식 입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녹차 관련 제품개발과 마케팅을 담당할 예정이다. 회사 관계자는 “전공과 연관해서 티(tea)와 티푸드를 다루는 오설록에 신입사원으로 합류했다”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아모레퍼시픽의 후계 레이스에서 장녀와 차녀 간 경쟁이 본격화할 것으로 내다봤다. 당초 무리 없이 후계 1순위로 꼽혔던 서민정 씨가 2023년 7월 휴직한 뒤 2년간 별다른 행보를 보이지 않는 반면, 호정 씨는 지분을 장녀와 비슷하게 끌어올린 데 이어 경영 참여까지 공식화했기 때문이다. 현재 서민정 씨와 호정 씨가 가진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지분(우선주 포함)은 각각 2.75%, 2.55%다. 재계 관계자는 승계구도에 대해 “장녀는 이탈, 차녀는 진입하는 모양새”라고 평가했다.
서민정 씨는 1991년생으로 호정 씨보다 네 살 많다. 같은 코넬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2017년 아모레퍼시픽에 입사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퇴사한 후 중국 장강상학원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수료했다. 그는 2019년 뷰티영업전략팀에 과장급으로 재입사한 뒤 이듬해 홍석준 보광창업투자 회장의 장남인 홍정환 씨와 결혼했다가 8개월 만에 결별했다. 2022년부터 휴직 전까지는 럭셔리 브랜드 부서에 몸담았다.

서민정 씨의 후계자 지위는 오랜 기간 독보적이었다. 서 회장에게 지분을 처음 증여 받은 것도 20여년 전인 2006년이다. 민정 씨는 당시 증여 주식을 지주사에 현물출자했고, 대가로 받은 우선주는 10년이 지나 보통주로 전환됐다. 2016년 그가 서 회장에 이어 아모레퍼시픽홀딩스 2대주주에 오른 배경이다. 서호정 씨가 처음 지주사 지분을 물려받은 시점이 2021년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장녀의 입지는 굳건했다.
분위기 변화의 기점이 된 것은 민정 씨의 이혼이다. 서 회장은 2021년 5월 첫째 사위에게 증여했던 지주사 주식 10만주를 물렀다. 2022년에는 민정 씨가 보유하던 계열사 에뛰드 지분(19.5%)과 에스쁘아 지분(19.5%)이 감자 과정에서 전량 소각됐고, 다음 해에는 그가 들고 있던 이니스프리 지분(18.18%)마저 절반을 사측에 반납했다. 같은 기간 외부에 알려진 적이 없는 호정 씨가 수증(2021·2023년)과 장내매수(2022년) 등으로 지분을 언니와 나란히 확보하자 후계구도가 혼돈에 빠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런 가운데 향후 장녀가 화장품을, 차녀가 비화장품을 맡는 구조의 승계방안도 거론된다. 호정 씨가 본업이 아니라 2019년 분사해 사세를 확장하고 있는 오설록에서 업무를 시작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러한 방향을 염두에 둔 조치라는 분석이다. 여전히 서 회장이 아모레퍼시픽홀딩스 지분을 절반 가까이 가진 가운데 처음 시험대에 오른 호정 씨의 경영역량이 관건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박재형 기자
Copyright © 블로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