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밸류업' 4개월 참여율 0.5%, 단 12곳... 일본은 20배 더 많았다
같은 기간 일본은 참여율 13%에 달해
근본 원인은 '주주에 불친절한 문화'
"당국과 거래소가 물밑에서 노력해야"
단 12개. 2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달 19일까지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공시' 발표 기업은 코스피시장 9개, 코스닥시장 3개뿐이다. 공시 대상 상장사(2,595개)의 0.5% 남짓이다. 고질인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기 위해 금융당국이 야심 차게 꺼내 든 밸류업 프로그램 가이드라인이 시행된 지 4개월여가 지났지만 대부분 기업은 밸류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국 밸류업 프로그램의 '선배'이자 '스승' 격인 일본은 어땠을까. 도쿄증권거래소에 따르면 일본에선 지난해 3월 밸류업 공시 이후 4개월간 대기업 중심 프라임마켓에서 242개(20%), 중견기업 중심 스탠더드마켓에서 32개(4%) 기업이 밸류업 방안을 내놨다. 전체 대상 기업(2,122개) 중 공시 완료 기업은 12.9%, 참여 예고 기업을 포함하면 23.5%다. 같은 기간 우리나라에 비해 20배 넘는 '실적'을 낸 것이다. 1년 5개월이 지난 올해 8월 기준으로는 프라임마켓의 79%, 스탠더드마켓의 31%가 공시를 완료했다. 대상 상장사의 55.5%에 달한다.
밸류업의 중요한 평가지표 중 하나인 주가순자산비율(PBR) 면에서도 상황은 좋지 않다. 19일 기준 코스피시장에서 PBR 1배 미만 상장사 수는 814개 상장사 중 560개(68.7%)였다. 밸류업 프로그램 발표 전인 올해 1월 2일(516개)에 비해 오히려 늘었다. PBR이 1을 밑돈다는 건 회사가 보유한 순자산 대비 시가총액이 저렴하다는 뜻으로, 기업이 저평가돼 있다는 뜻이다. PBR 1배 미만 기업이 주가 부양책을 내놓도록 유도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금융당국의 의도와 반대로 가고 있는 셈이다.
제도보다 문화가 문제
금융당국은 생각보다 부진한 기업 참여에 꽤나 당황하는 모습이다. 김병환 금융위원장은 이달 초 소프트뱅크 등 일본 내 밸류업 공시 우수기업을 방문한 현장에서 '당근(인센티브)과 채찍(페널티)이 따로 없는데도 밸류업 정책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이유'를 집요하게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자율공시라는 점에서 제도상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지만 그 결과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제도보다 문화를 두 국가 간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로 꼽는다. 이남우 한국기업거버넌스포럼 회장은 "지배주주가 주로 있는 우리나라 기업들은 기업의 주인이 주주고 기업이 성장하면 주주에 그 성과를 줘야 한다는 인식이 약하다"며 "대기업이 가만히 있는 건 강제성이 없으면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모호한 사업보고서와 주주총회
한국 자본시장의 불친절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역은 사업보고서다. 미국 유통기업 코스트코는 지난해 사업보고서에 눈에 띄는 도표를 제시했다.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간 △코스트코 보통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 △S&P500 소속 소매업종 △S&P 소속 소매업종에 각각 100달러를 투자해 배당금을 재투자한다고 가정했을 때 누적 총수익률을 비교한 도표다. 한눈에도 코스트코에 투자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투자자가 알 수 있다. 일본 최대 편의점 망을 운영하는 세븐앤아이홀딩스는 사업보고서에 2025년 2월까지 분야별 매출 및 영업이익을 얼마나 달성할지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반면 한국 최대 대형마트인 이마트의 사업보고서에는 구체적인 중장기 목표나 '친절한 도표'를 찾아볼 수 없다.
주주총회도 불친절하긴 마찬가지다. 2022년 애플의 주총 자료는 팀 쿡 최고경영자(CEO)의 보수가 전년 대비 500% 이상 오른 이유에 대해 20쪽 넘는 분량을 할애해 설명했다. 임원 보수 안건은 원안대로 통과됐지만, 찬성률이 64%로 매년 90%대 찬성을 받은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다음 해에 쿡 CEO는 주주들의 반발을 의식한 듯 연봉의 약 40%를 자진 삭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비해 국내 시가총액 1위 삼성전자의 주총장에선 회사 주요 경영진의 보수가 적절한지 전혀 논의되지 않는다. 주총 안건으로 개별 이사들의 보수가 아닌 전체 이사의 보수 한도만 올려 승인받기 때문이다. 황현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기업 주총에서는 실제 임원 보수 지급액보다 과도한 한도로 승인받는 경우가 많다"며 "사업보고서가 주총 직전에 공시돼 검토 시간이 부족한 것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강제력이 아닌 설득과 동참 유도로
일본의 밸류업 성공 배경에 활발한 '주주행동주의'가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행동주의 펀드 영향력이 크다 보니 기업이 주주 눈치를 보면서 적극적으로 밸류업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된 기업만 1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위 관계자는 "일본에선 행동주의 펀드를 '기업사냥꾼'으로 여기기보다 주주 제안을 통해 밸류업에 역할을 하는 '동업자(파트너)'로 보는 인식이 더 강하다"고 설명했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에선 주주행동주의가 아직 초기 단계다.
당국과 거래소의 세심한 물밑 노력 역시 더해져야 한다. 이 회장은 "당국이 기업들에 밸류업 공시의 필요성을 제대로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며 "한 장소에 300명씩 모아 놓고 설명하는 대신 기업에 직접 찾아가는 등의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안하늘 기자 ahn70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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