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유전자·박재항〉죽창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아름다운 아침 안개.'
1945년 8월 초순 일본 서해안 바닷가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 교사의 일기 첫 줄이다. 짭짤하게 소금기 머금은 안개 속에서 그는 무엇을 했을까. 다음 줄에 나온다.
'죽창 500개 제작.'
'대나무로 만든 창(槍)'이라는 건조한 물리적 뜻을 넘어 한국 역사에서 죽창은 정치 성향과 역사관에 따라 다른 의미를 자아낸다. 보수 야당 내에서도 가장 오른편으로 치우쳤다는 평가를 받으며 온몸과 거친 말로 그를 표현하길 서슴치 않는 한 의원이, 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제 3당의 당수가 2019년 일본과의 경제 대립 과정에서 했던 죽창 발언을 국정감사 자리에서 꺼냈다. '죽창을 들자'는 표현이 최근의 중국을 비롯한 해외 국가에 대한 반대 시위에서 나온 말 중에서 역대 가장 폭력적인 언사였다고 규정했다.
'죽창' 운운하는 표현을 1980년대 대학교의 학생운동 유인물에서 꽤 보았다. 총칼이나 대포와 같은 전문 무기를 갖지 않은 민중이 들고 나올 수 있는 대표로 죽창이 나왔다. 조선 말기 민중의 절대다수는 농민이었다. 대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이 남부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 민중의 무기와 근대 화력이 극적으로 대비된 장면이 조선말 전라도에서 발원한 동학농민혁명에서 펼쳐졌다. 지도자들이 잡힌 후에도 뿔뿔이 산속으로 들어간 세력의 저항이 가장 늦게까지 계속 되었던 동네가 내 외할머니의 고향 부근이었다.
김남주 시인의 '노래'라는 시를 개사하여 가사로 삼아 김경주가 작곡하고 가수 안치환이 부른 동학농민혁명을 기리는 노래는 '죽창가'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전남 해안가가 고향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894년에 태어나신 나의 외할머니께서 '난리'라고 할 때,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으면 '동학 난리 때'라고 보충 설명을 해 주셨다. 외할머니의 말을 옮기신 어머니의 말씀으로 사람들이 죽창 들고 '나섰다'고 하셨다. '가슴에 꽂히는'이란 가사가 죽창가에 있는데 그런 살상의 결과를 얼마나 가지고 왔는지는 모른다. 우금치 전투에서 보듯 일본군 200명 정도에 조선군 수백 명의 천 명이 되지 않는 총칼로 무장한 군사들에게 죽창 들고 나선 이들 수만 명이 몰살을 당했다.
없는 자들이 드는 저항의 상징이 죽창이었다. 죽창가를 언급한 것이 가장 폭력적이라고 했던 이는 죽창을 살상의 무기로 본 것 같다. 죽창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건은 이차대전 때의 일본을 기술한 책에서 보았다. 실전 훈련이나 담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하급 병사나 징발된 민간인들에게 중국인이나 미군 포로를 죽창으로 찌르게 시켰다고 한다. 가슴 아프고 비슷한 얘기를 어머니께 들은 적이 있다. 외할머니와 달리 어머니께서 '난리'라고 말씀하시던 바로 1948년 여순사건 때의 일이다.
"○○ 언니라고 내 친한 친구의 언니가 있었어. 여순사건이 벌어졌을 때 아마 6학년이었을거야. 아주 이뻤어. 그 집 아버지가 면장을 했으니까 부자였지. 그래서 여순 때 바로 죽임을 당했어. 정부군이 들어오고 반군을 운동장에 잡아놓고는 원한 맺힌 사람은 나와서 반군을 죽이라고 했어. 그 이쁜 ○○ 언니가 거기에 나간 거야. 그 때 무기가 뭐가 있었겠니? 그 이쁜 얼굴을 하고 죽창으로 사람을 찌르는 거야. 한번 찌르니까 감정이 고조되어 마구 찌르는 거야. 나중에도 내 친구나 다른 친구들이랑 그 때 얘기하면 그 언니가 죽창으로 사람 찌르던 그 장면이 생각나는 거야."
초등학교 시절을 지나 80세가 다되어도 어머니께서 잊지 못하셨던 그 난리, 바로 여순사건이 남긴 참혹한 기억이었다. 사실 이 회고는 항암치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잊으시지 않을까 싶어 내가 드린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이어진 것이었다.
"어머니. 혹시 생애 처음으로 본 영화가 기억나세요?"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셨다. 어떤 영화였는지 여쭙자 바로 말씀하셨다.
"타잔!"
언젠가 말씀을 들은 것도 같았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TV에서 타잔을 정규물로 편성하여 방영을 했었다. 007처럼 타잔 배역도 몇 명이 이어 가면서 했는데 가장 유명한 배우는 수영 종목에서 미국 국가대표를 지낸 죠니 와이즈물러였다. 그가 나온 영화를 어머니께서도 보신 거였다. 옛날인지라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보셨는가 여쭤보니 정색을 하고 아니라고 하신다.
"나름 그래도 영화관이라고 하는 곳에서 봤어"라고 하시며, 보성에서의 국민학교라고 불렀던 학창시절을 추억하다가 얼굴빛이 어두워지며 말씀하셨다.
"타잔을 보면서 재밌게 추억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심한 일을 겪었어."
어릴 때 TV에서 방영되던 타잔을 본 우리들은 동물들을 부르는 소리를 흉내 내고, 숲속에서 놀 때는 가지를 잡고 이 나무 저 나무로 옮겨 타는 타잔놀이를 했다. 같은 타잔을 봤지만, 어린이가 대나무를 보고 죽창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시대를 어머니께서는 겪었다.
죽창가 가사가 원시인 김남주 시인의 '노래'와 다른 부분이 하나 있다. 위에서 가사 중 '가슴에 꽂히는'이란 부분을 언급했는데, 원시에는 '가슴으로 꽂히는'으로 되어 있다. 가슴'에'는 종착지로서 당하는 이에 초점을 맞췄다면, 가슴'으로'는 행위의 주체에 무게를 뒀다. 가슴 앞에 나온 '청송녹죽'을 연결해서 보면, 사실 노래의 '가슴에'는 잘못 고친 거라 생각한다. 청송녹죽이 상징하는 절개와 의지를 지닌 가슴이 상대에게 꽂혀야 한다. 상대가 청송녹죽의 가슴을 가진 건 아니지 않은가.
여순사건 77주기를 맞아 다시 죽창가가 소환되고 있다. 죽창에서 저항이 아니라 살상을 먼저 떠올리게 하려 애를 쓴다. 아름다운 아침 안개의 물기를 머금은 대나무 숲의 청량한 기운을 느끼기 보다, 상대의 피를 부르는 죽창을 만들려는 이들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죽창은 육체적 살상의 무기가 아닌 정신적 저항의 상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