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의 최고봉 일리야 레핀①

[김희은의 울림 깊은 러시아 예술 이야기]
역동적인 붓터치와 민중을 품은 정신
예리한 심리묘사는 사실주의 새 역사
佛서 배운 빛 표현+기막힌 표정묘사
"러시아 미술 전체를 진보시킨 화가"

일리야 레핀(1844~1930), 오! 자유, 1903년, 179 x 284.5cm, 캔버스에 유채, 러시아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 변혁을 꿈꾸는 민중이 하나되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낼 것임을 몰아치는 파도에 실어 보여준다.

톨스토이에 버금가는 러시아 화가

러시아 문학에 레프 톨스토이(1828~1910)가 있다면, 미술에는 일리야 레핀(1844~1930)이 있다. 러시아 미술사에서 레핀이 차지하는 업적은 '문학의 최고봉' 톨스토이가 이룩해 낸 것에 비견된다는 말이다. 역동적인 붓터치가 만들어내는 그림 속 서사는 톨스토이 소설 속에 보여지는 스토리 전개 호흡과 유사하고, 19세기 러시아 민중을 품고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레핀 미술의 예술성은 대우주의 진리를 담고 있는 톨스토이의 문학성과 결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레핀은 한마디로 러시아의 '그림 천재'다. ‘천 만가지 표정 예술의 마술사’,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 ’, ‘러시아 빛 표현의 창시자’. 그를 칭송하는 수식어만 봐도 레핀이 러시아 미술사에 차지하는 존재감이 얼마나 큰 지 바로 알 수 있다.

특히 19세기 이동파를 중심으로 이뤄진 러시아 미술 발전은 ‘제2의 르네상스’라 불릴 만큼 회화사에서의 업적으로 대단한데, 그 최고의 자리에 일리야 레핀이 있다. 그는 평범한 일상에 서사를 덧붙이고, 인간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가장 깨끗한 감정을 끌어내 색깔로 표현한 위대한 예술적 힘을 가진 존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중량감 있는 구성과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화면 속에 러시아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담았다. 또 깊은 사색과 관조를 바탕으로 하는 예리한 심리 묘사는 사실주의 회화에 새로운 역사를 썼다는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다.

일리야 레핀(1844~1930), 쿠르스크 지방의 성행렬 1880-1883년, 캔버스에 유채, 175X280,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역사의 주인공이 민중임을 보여주는 러시아 최고의 풍속화

민중을 가슴깊이 사랑한 화가

우선 레핀이 러시아 미술사에 남긴 가장 큰 업적은 '러시아다운 민족 회화'를 구축했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진정한 러시아 회화는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누구도 명확한 정의를 내릴 순 없지만, 레핀 만큼 러시아 민중을 가슴 깊이 사랑하며 그들의 진솔한 모습과 시대의 아픔을 보여주려 한 작가는 없다. 이는 아마 세계 미술사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는 일리야 레핀 만의 업적일 것이다.

필자의 이런 단호함에 의구심을 품는 분들도 많겠지만, 레핀은 평생의 작업을 통해 러시아 민중이 역사와 혁명의 주인공임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또, 예술성의 부재로 자기 반성에 빠져 있던 이동파 그림에 미술적 가치를 입히며,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가 찬란하게 빛나도록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레핀이 만들어 놓은 이런 예술적 토대가 20세기 탄생할 러시아 아방가드르, 즉 현대 모더니즘의 밑거름이 된다.

“레핀의 모든 그림은 레핀 개인만의 진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 미술 전체의 진보였다. 그의 모든 그림은 사건이다”라고 말한 러시아 역사화가 미하일 네스테로프(1862~1942)의 극찬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예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라는 19세기 시대 화두에 일리야 레핀은 그렇게 러시아 민중을 주인공으로 하는 가장 러시아다운 그림으로 화답한다.

'이콘' 화가로 출발한 일리야 레핀

일리야 레핀(1844~1930), 자화상 1878년 종이에 붓과 펜, 17.8 X 13.3 ,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레핀은 우크라이나의 작은 도시 추구예프 출신이다. 열다섯 살 때부터 이콘 화가 부나예프의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본격적인 미술 수업을 받게 됐다. 당시 그는 러시아인의 삶에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는 이콘화(종교·신화 등의 관념체계를 바탕으로 특정한 의의를 지니고 제작된 미술양식 혹은 작품)를 제작하며 자연스럽게 민중의 삶과 예술이 가져야 할 사회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대표 화가들의 이력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이콘 화가로서 경력을 갖고 있다. 그만큼 러시아 전통화에 대한 감각이 그들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다. 말레비치, 샤갈, 칸딘스키도 초기 작품을 보면, 러시아 전통 예술품의 문양이나 색채, 또 이콘화에서 얻은 여러 아이디어가 그림에 포함되어 있다.

크람스코이·스타소프와의 운명적 만남

1863년, 열 아홉살의 레핀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예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평생의 스승이며 이동파의 수장인 이반 크람스코이를 만나 화가로서 기본기를 연마한다. 또 당대 최고 예술 비평가 스타소프와 교류하며 러시아 인텔리겐챠로서  ‘예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당시 철학을 깊게 받아들이며 러시아 민족 화가로서의 바탕을 구축했다.

레핀은 당시를 회상하며 자서전 『멀고도 가까운 것』에서 “기진맥진할 때까지 유화 제작에 매달렸다. 솔직히, 말하는 법을 잊어먹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작업에는 진전이 있었다”고 했다. 예술에 대한 천재 화가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게 레핀은 러시아 화단에 혜성 같이 등장해 어린 나이에도 중견 작가들에 필적할 만큼 재능을 인정받으며 천재 화가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일리야 레핀(1844~1930), 야이로 딸의 부활 1871년, 캔버스에 유채, 229x382, 러시아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특히 1871년 졸업 작품전에서 그는 출품작 <야이로 딸의 부활>로 최고상을 받으며, 6년간 해외 유학이라는 특전을 얻게 됐다. <야이로 딸의 부활>은 성경 중 『루카복음』 8장에 나오는 말씀을 그린 그림으로, 레핀이 사랑했던 누나 우스카의 죽음 앞에 그녀의 부활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일주일 밤낮으로 그려낸 그림이었다. 깔끔한 구도와 색채의 조화, 주제를 표현해 내는 집중력 등은 레핀의 타고난 예술적 능력이 엄청난 것임을 제대로 보여준다.

레핀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일리야 레핀(1844~1930),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1870-1873, 캔버스에 유채, 131.5x281cm, 러시아 박물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레핀은 그림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로 일약 스타 작가 반열에 올라선다. 이 작품은 러시아 민중을 핍박 받는 가련한 존재로만 표현하는 당시의 리얼리즘 회화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으로, 민중이 지닌 존엄함을 철저하리만큼 사실적으로 표현한 수작 중의 수작이었다.

이 그림을 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칭찬만 보아도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이 갖는 의의는 대단하다 할 수 있다.

도스트옙스키는 “그림 속의 그 누구도 관람객을 향해, ‘이것 보시오, 나는 불행하오, 당신들은 민중에게 빚을 지고 있소!”라고 소리치지 않는다. 일반 민중들을 이렇게 당당하게 그려낸 것은 레핀의 위대한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다”라며 극찬한다. 이렇게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로 주목을 한 몸에 받은 레핀은 유럽으로 유학의 길을 떠나 거장의 반열에 올라설 준비를 한다.

프랑스 파리, 그리고 빛을 만나다

일리야 레핀(1844~1930), 벤치에 앉아서 1876년, 캔버스에 유채, 36X55.5cm, 러시아 미술관, 상트 페테르부르크. 레핀이 인상주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이다.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일리야 레핀은 인상주의의 빛 표현에 흠뻑 취해 <바다 왕국의 사드코>(1876)와 <벤치에 앉아서>(1876)등을 잇달아 발표한다. 그러나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주로 그리는 파리지엔느의 치마 자락에 투영되는 화려한 빛과 세느 강을 수놓는 윤슬은 너무 아름답지만 현재 곤궁에 빠져 있는 러시아 현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빛이라 생각하고 그림 공부를 중단하고 러시아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면서 프랑스에서 배워온 화려한 빛을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에 적용시켰다. 이후 레핀 그림 전반을 관통하는 찬란한 빛 표현은 예술의 혁명 그 자체라 평가받을 만큼 대단한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림 앨범 1편 , 2편에서 이어질 그림이야기에서 상세히 보실 수 있다.)

천 만가지 표정 '예술의 마법사'

일리야 레핀(1844~1930), 무소르그스키의 초상, 1881년, 캔버스에 유채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이 그림은 작곡가 무소르그스키가 세상을 달리 하기 직전에 그린 그림으로 복수가 차오른 병든 육체의 작곡가지만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을 예술에 대한 천재 음악가의 열정이 눈빛 가득 빛나고 있다. 레핀의 눈빛 표현은 '러시아 초상화의 꽃'이라 불릴 만큼 위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레핀은 수백 점이 넘는 초상화를 그려내며 심오한 인간사의 여러 감정들을 표현하기도 했다. '천만가지 표정 예술의 마법사'답게 레핀이 그린 초상화 그림 속 모델들은 생명력 있고 예리한 지혜와 인간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렇게 초상화마다 개성 있게 표현된 모델들의 내면 묘사는 우리를 천천히 그리고 차분히 화폭 속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듯하다. 한 편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드라마틱하고 강렬한 느낌이다. 대표적인 초상화로 <무소르크스키 초상화>, <스타소프의 초상화>, <트레챠코프의 초상화>, <톨스토이의 초상화> 등이 있다.

역사화가로서 일리야 레핀

일리야 레핀(1844~1930), 노보제비치 수도원에 감금된 지 1년 된 황녀 소피아 알렉세예브나-1698년 그녀의 친위병을 처형하고 추종자들을 고문하고 있을 때 1879년, 캔버스에 유채, 201.8x 145.3,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1879년에 열린 제 7회 이동파 전시를 통해 레핀은 첫 역사화 < 소피아 공주>를 발표하면서 러시아 역사화 기법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다.

특히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은 탁월한 심리 묘사와 주제 표현은 '천재적'이라는 칭송까지 받았고 러시아 회화사에 최고의 역사화로 인정 받기에 이른다. 또 생동감 넘치고 낙천적인 인물 표현이 압권인 <터키 술탄왕에게 편지를 쓰는 카자크인들>도 전시되었는데, 레핀은 이 그림을 통해 무거운 역사적 주제를 풍자와 위트로 펼쳐 보이는 능력으로 높은 찬사를 받게 된다.

이같은 그림을 통해 레핀은 황실의 반쪽짜리 행정을 찬양하기에 급급하던 아카데믹한 역사화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내밀고 서유럽의 맹목적 표방만을 강조하던 표트르 대제의 급진적 개혁주의 문제점과 당시 간과되고 있던 슬라브 민족의 위대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인정받았다.

'혁명화가'로서 일리야 레핀

일리야 레핀(1844~1930), 선동가의 체포1878,1880-1889, 1892,캔버스에 유채 , 34.8 × 57cm,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하지만 1880년대는 러시아 역사에서 참혹한 암흑기였다. 1881년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고 황실은 소통보다는 '반동' 통치를 강화했다. 민중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개혁으로 나아가 해결해야 할 시대적 문제가 산재한 러시아 현실 앞에, 황실은 오히려 빗장을 꽁꽁 걸어 잠근 셈이었다.

이런 러시아의 답답한 현실을 참담하게 생각했던 레핀은 일련의 혁명화를 그림으로써 시대를 보여주려 했다. <압송하는 길에서>, <고해를 거부하는 사형수>, <어느 선동가의 체포>, <집회>,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등이 대표작인데, 이런 그림들이 그려진 1880년대가 레핀의 일생 중 '최고 황금기'라 평가 받는다.

레핀의 그림을 관통하는 단어는 한마디로 '리얼리즘'이라 할 수 있다. 그 바탕에는 '사람과 삶'을 읽어내는 뜨거운 피가 흐른다. 눈에 보이는 사실만을 기술적으로 복제하여 전달하는 그런 그림이 아니었다. 러시아 사람들에게 가장 가치있는 미를 찾고, 그들의 일상을 보여주며 불합리한 민중의 삶을 어떻게 구원해야 할지를 그려냈다. 이같은 그의 노력은 예술이 사회와 현실에 미치는 영향 중 가장 긍정적 결과로서 러시아 예술이 갖는 독특한 모습이라 할 것이다. 참된 미는 현실을 딛고 일어서게 만드는 에너지임을 그림을 통해 정확히 보여준 것이다.

소련이 붕괴된 1980년대 이후 레핀의 그림이 처음 세계에 알려졌다.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도 1996년 '일리야 레핀 광주 특별전'을 통해서였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와 러시아 그림의 생소함 때문에 전시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30년이 흐른 지금에도 아주 드물게 당시 레핀 그림의 강렬한 인상을 추억하는 분들을 필자는 간혹 만난다. 러시아 그림은 그만큼 힘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종식되고 한국과 러시아 간의 왕래가 자유로워져 러시아 그림 관련 전시가 자주 열리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지금은 아쉽지만 <더 칼럼니스트>의 칼럼 통해 러시아 그림을 만나는 것으로 일단 만족하고자 한다. 상세한 그림 이야기는 후속편에.


김희은은 20년 가까이 아트 딜러, 전시기획자, 큐레이터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서울과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그림 전문 '갤러리 까르찌나'를 운영중이다. 일반인들에게 그림 이야기를 전하는 도슨트 활동도 열심이다. 러시아 트레챠코프 국립 미술관과 푸쉬킨 박물관 전문 도슨트다. 저서로 <소곤소곤 러시아 그림 이야기>, <미술관보다 풍부한 러시아 그림 이야기>가 있다. 유튜브 채널 <갤러리 까르찌나>를 운영하며, 러시아 예술의 한국 대중화를 위해서도 애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