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편의 드라마처럼, 시작은 우연이었다

1953년 서울,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경희 씨. 미군부대 공사를 도맡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부터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다.
다섯 살 때부터 발레를 배우며 유럽 유학을 꿈꾸던 소녀는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장난처럼 본 방송국 탤런트 시험에 덜컥 합격하게 된다.

그렇게 연극영화과 진학, 배우 수업에 집중하던 20살 어느 날, 그녀 인생의 흐름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날은 파티가 있던 날이었다. 모임을 마치고 버스를 놓칠까 뛰던 김 씨 앞에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섰고, 그 안에서 내린 남자는 조용히 “태워주겠다”고 말했다.
그는 정주영이었다. 무려 서른여덟 살 연상, 이미 가정을 가진 남자였지만, 그때 그녀는 아무것도 몰랐다. 단지 예의 바른 호의라 생각했고, 감사한 마음으로 연락처를 건넸다.

이후 정 회장은 자주 김 씨에게 연락을 해왔고, 몇 번의 만남 끝에 김 씨 어머니에게 “딸을 맡겨달라. 평생 밥은 굶기지 않게 하겠다”고 말했다.
결혼식도 없었고, 혼인신고도 없었다. 하지만 김 씨는 정 회장을 ‘아빠’라고 불렀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함께 살아가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청운동 집 근처로 이사 오라 권했고, 김 씨는 “그 집에는 부인이 있다”며 이를 거절했다.
대신 정 회장은 울산 조선소 영빈관으로 김 씨를 자주 초대했고, 처음 산 요트에도 “첫 번째로 태워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만큼 애정을 표현했던 사람이었다.

1979년, 정 회장과 만난 지 6년째 되는 해. 김 씨는 미국에서 첫째 딸 그레이스를 낳았다.
2년 뒤 둘째 엘리자베스도 태어났다. 정 회장은 매달 1,000달러를 보내줬지만, 미국 생활은 빠듯했고, 결국 김 씨의 어머니가 손녀들을 뒷바라지하게 된다.

두 딸이 자라면서 김 씨는 학업 문제로 프랑스 유학을 시도했지만, 언어의 장벽과 문화적 차이로 곧 미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때 김 씨는 부동산 자격증을 따고 중개업자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자녀 교육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고, 정 회장에게 영재학교 진학을 건의했지만 “아이들은 평범하게 자라야 한다”는 이유로 단칼에 거절당했다.

1992년, 정 회장의 대선 출마 소식이 들려오면서 관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김 씨는 아이들을 호적에 올려달라고 요구했고, 정 회장은 “대선 끝나면 해주겠다”며 이를 회피했다.
이후 김 씨는 정 회장과의 연락이 끊기고, 대신 그의 변호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소통해야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1년, 정 회장의 별세 소식이 전해진다. 김 씨는 충격에 휩싸였고, 결국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법적 절차를 밟기로 결심한다.

정 회장이 타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 씨는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한다.
두 딸을 데리고 병원을 찾았고, 정 회장의 부인과 아들들도 함께 혈액 검사를 진행했다. 검사 결과, 두 딸은 정 회장의 친자가 맞다는 판정이 내려졌고, 정식으로 법적 인정을 받는다.
이후 유산 상속 절차가 시작되고, 딸들에게 약 56억 원이 돌아간다. 그러나 김 씨는 만족하지 못했다. “가족 같은 대우”를 요구하며 다시 한 번 현대 측과의 조정에 나섰고, 결국 40억 원을 추가로 받으며 소송을 마무리한다.

김 씨는 제삿날 참석하기 위해 두 딸과 함께 정 회장의 집을 찾았지만, 제사는 이미 끝나 있었고, 준비된 자리는 외부 손님을 위한 별채 방.
상처받은 딸은 그날 밤 통곡했고, 결국 병원에 실려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후 김 씨는 “다시는 가족이라 부르지 않겠다”며 새로운 소송을 준비하게 된다.

한때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땅값까지 합쳐 700억 원대 자산을 보유했던 김 씨.
여기에 유산으로 받은 100억 원까지 더하면 800억이 넘는 자산가였다.
그러나 김 씨는 사업 실패와 사람들의 접근으로 모든 재산을 잃는다. “빌려달라”는 말에 거절하지 못한 결과였다.
김경희 씨의 이야기는 단순한 스캔들이 아니다. 사랑이었고, 희생이었고, 외로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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