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규의 클래식 공감] 그저 지휘자일 뿐입니다
설 무대 없자 교향악단 만든
女음악인들 의지 있었기에
더이상 남성들 전유물 아냐

클래식 음악 방송을 9년째 진행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는 일이다. 아무리 방송 경험이 많아도 상황에 맞는 가장 좋은 단어를 선택하는 일은 언제나 어려운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내가 사용하던 '여성 지휘자'라는 말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지휘자'라는 말 앞에 '여성'을 붙이는 순간, 여성이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된다는 것이 이례적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지휘자'라는 직업이 여성에게 적합지 않다는 편견이 있어 왔다. 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여성 지휘자 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현재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활동 중인 김은선을 비롯해서 장한나, 성시연 등 한국의 여성 음악가들이 세계 무대에서 지휘자로 두각을 보이고 있고, 최근에 홍콩 출신의 지휘자 엘림 찬이 미국의 명문 오케스트라인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의 차기 음악감독으로 내정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또한 마린 올솝, 요아나 말비츠, 미르가 그라지니테틸라, 수산나 멜키 등 여성으로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한 지휘자는 매우 많다.
지난 세기까지만 해도 여성이 전문 지휘자가 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1902년 네덜란드 태생의 안토니아 브리코는 그 시대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지휘자로 주목받았지만, 일생 동안 '여성은 지휘할 수 없다'는 편견과 싸워야 했다. 브리코는 버클리에서 공부하며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감독의 조수로 활동했고, 이후 베를린 국립음악원에 입학해 1929년에 미국인 최초로 지휘 마스터 클래스를 졸업한 후 전문 지휘자로 성장했다. 1930년에 세계 정상급 베를린 필하모닉을 지휘한 데 이어 1938년에는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해 호평을 받았지만 비평가들은 브리코의 실력보다는 "여성이 지휘했다"는 사실 자체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는 음악계의 구조 속에서 브리코는 상임 지휘자직을 얻지 못한 채 불안정한 생활을 견뎌야 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브리코는 여성 음악가들이 안정적인 연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1934년에 '여성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브리코의 여성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저명한 정치인들의 관심을 끌면서 안정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었으나 이 오케스트라에 남성 연주자들의 합류를 허용하고 악단 이름도 '브리코 심포니'로 변경하자, 남성 단원 영입을 이유로 이사회가 재정 지원을 철회했다.
이후 브리코는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지휘 활동을 이어가다가 1942년에 덴버에 정착하게 된다. 덴버의 전문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리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임 지휘자 자리가 남성에게 돌아가는 바람에 그는 다시 생계를 위해 피아노 레슨과 교회 연주 활동을 이어가며 근근이 생활했다. 하지만 지휘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은 브리코는 1948년에 덴버 지역의 직장인들과 전문 음악가들이 함께 참여하는 '덴버 비즈니스맨 오케스트라'를 창단했다. 이후 그는 40년간 음악감독으로 활동하면서 덴버 지역의 음악 문화에 활기를 더했고, 오늘날 이 오케스트라는 '덴버 필하모닉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정기적인 연주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처럼 지휘자 브리코의 일생은 좌절의 연속이었지만, 좌절의 순간마다 그는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기회가 없다면 스스로 만든다'는 그의 불굴의 의지가 있었기에 오늘날 여성 지휘자 전성시대가 도래한 것이 아닌가 싶다. 브리코는 1975년에 한 강연에서 "저를 '여성 지휘자'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그저 지휘자일 뿐입니다"란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제 나도 '여성 지휘자'라는 말을 쓰지 말아야겠다. 지휘자는 결코 남성만의 직업이 아니므로.
[최은규 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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