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는 쪽도 웃게 만드는 1인자가 있다. 프랑스 세송세비녜의 글라즈 아레나, 10월 26일 저녁(한국시간) 코트 위에서 그 장면을 봤다. 안세영이 마지막 셔틀을 바닥에 꽂아 넣은 뒤, 네트 너머로 손을 내밀자 왕즈이가 환하게 웃었다. 그 미소가 중국 온라인에서 불씨가 됐지만, 현장 공기는 달랐다. 여제 앞에서 진 선수가 웃을 수 있었던 이유, 경기를 넘어서는 한 사람의 품격이 눈앞에서 또렷했다.

이번 프랑스오픈은 결과만 보면 익숙한 결론이었다. 안세영은 결승에서 세계 2위 왕즈이를 21-13, 21-7로 눌렀다. 42분, 단 한 번도 주도권이 흔들리지 않았다. 전 주 덴마크오픈 결승에서도 같은 상대를 21-5, 24-22로 눌렀던 흐름이 그대로 이어졌다. 두 대회 연속 결승 대진, 두 번 연속 2-0, 그 사이에 스코어는 더 명료해졌다. 이번 우승으로 올 시즌 9번째 트로피. 2025년 10월 현재, 여자 단식은 ‘군웅할거’가 아니라 ‘안세영 일극’이라는 사실을, 현장에 있던 누구도 부인하지 않았다.
서사는 그보다 더 길고 촘촘했다. 8강에서 가오팡제를 상대로 78분 동안 끓는 물처럼 압박을 걸어 쥐고 흔들었고, 4강에서는 예전의 ‘천적’으로 불렸던 천위페이와 87분 혈투 끝에 고개를 들었다. 체력 소진을 근거로 왕즈이의 우위를 점치던 전망은 결승 코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틀렸다. 인터벌마다 표정과 호흡이 말했다. 리드가 벌어져도 욕심내지 않고, 수비와 전환의 비율을 미세하게 조절해가며 상대의 공격 타이밍만 지워나갔다. 2게임 초반 5-0, 그 시점에서 승부의 방향은 이미 기울었다.

중국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어떻게 지고도 웃느냐’는 목소리가 올라왔고, ‘절박함이 없다’는 비난도 있었다. 하지만 현장의 기자들과 중국 칼럼은 정반대의 각도를 제시했다. 왕즈이의 미소는 체념이 아니라 예의였다고, 그 대상은 ‘사람 안세영’이라고. 천위페이의 몸 상태를 먼저 묻고, 상대의 컨디션을 챙기고, 시상대에서는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습관 같은 품격. 결승 직후 안세영이 자신의 SNS에 남긴 “세 번째 프랑스오픈 타이틀, 같이 경기해 준 왕즈이 선수에게 감사, 다음에 제가 저녁을 사겠다”는 한 줄은 그래서 설득력이 있었다. 덴마크오픈 직후에도 그랬듯, 승부가 끝나면 위험을 나누고 감사로 마무리하는 태도. 스코어로 설명되지 않는 지점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다.
물론 이 모든 미담 위에 쌓인 건 체계적인 경기력이다. 덴마크오픈 결승에서 ‘21-5를 먼저 내고도 22-24까지 가는 고비’를 정리하는 법을 보여줬고, 6월 인도네시아오픈에서는 9-17의 벼랑을 뒤집는 역전 시나리오를 구현했다. 큰 점수차를 다루는 냉정을 갖췄다는 뜻이고, 그 뒤엔 수비 각도와 하프 스매시 선택, 네트 이후 첫 발의 방향 같은 아주 작은 기술적 합의가 쌓여 있다. 그래서 길게 끌어도 이기고, 짧게 끝내도 이긴다. 왕즈이와의 올 시즌 맞대결만 7전 전승, 통산 15승 4패. 예전부터 길게 엮였던 천위페이와는 통산 14승 14패로 균형을 이루지만, 2025시즌만 놓고 보면 안세영이 5승 2패로 앞선다. 한웨와는 올해 1승 1패, 통산 9승 2패. 숫자는 건조하지만, 그 숫자가 쌓인 방식은 건조하지 않다. 상대의 강점을 지워가는 과정에서 팬들은 ‘왜 저기서 속도가 아니라 각을 택하는지’ ‘왜 저 타이밍에 끊어치지 않고 다시 띄우는지’를 자연스럽게 배운다.

중국 현지에서 ‘공안증’이라는 신조어가 돌기 시작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남자 축구에서 ‘공한증’이 상징하던 감정의 복합체가 이제 여자 배드민턴 코트로 옮겨온다는 진단. 프랑스오픈 하나만 보더라도 8강 가오팡제, 4강 천위페이, 결승 왕즈이까지 톱랭커 3명을 연달아 넘겼다. 한 대회 안에서 같은 나라 강호들을 차례로 상대하면, 전술이 노출되고 리듬이 읽힐 위험도 커진다. 그럼에도 매 매치 플랜이 달랐다. 가오팡제전은 길게, 천위페이전은 들쑥날쑥한 템포 전환으로, 왕즈이전은 초반부터 목줄을 단단히 죄는 속공형으로. 상대가 준비한 해법을 경기 도중에 갈아엎게 만드는 종류의 압도는 상대국 팬 심리에 남는다. 그래서 분노가 먼저 나오고, 시간이 지나면 인정이 뒤따른다.
재밌는 건 그 인정의 시작점이 기술이 아니라 태도였다는 점이다. 시상대 위에서 함께 웃는 표정 하나, 손을 맞잡는 제스처 하나가 온라인의 격한 단어들을 무력화했다. “우정이 먼저고 경쟁은 그 다음”이라는 중국 팬들의 댓글이 올라오기 시작했고, “2등을 물어뜯는 나쁜 습관을 고치자”는 자성의 목소리도 뒤따랐다. 최강은 상대를 낮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 태도는 팀에도 번진다. “예전에는 중국 선수 서너 명과 홀로 싸우는 기분이었다”던 안세영이 “이제는 감독님과 트레이너 선생님들이 옆에 있다”고 말한 변화는, 코트 밖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의 증거다. 혼자가 아니면 더 오래 간다. 그래서 연속 우승이 연속 우승으로 이어진다.

바깥의 기록은 차분히 올라가고 있다. 말레이시아오픈, 인도오픈, 일본오픈, 오를레앙 마스터스, 전영오픈, 인도네시아오픈, 중국마스터스, 덴마크오픈, 프랑스오픈. 2025년에만 9개의 정상이다. 결승에서 만난 중국 선수에게 올 시즌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전영오픈에서 이미 가오팡제–천위페이–왕즈이를 차례로 넘었던 기억을 프랑스에서 다시 소환했다. 이제 다음은 기록의 문장부호를 바꾸는 일이다. 2년 전 세웠던 단일 시즌 최다 우승, 그리고 자신이 그린 ‘뒤집기’의 레퍼토리를 더 확장하면, 숫자는 자연스럽게 새로 고쳐진다. 내달 중순 호주오픈 일정이 잡혀 있고, 컨디션만 받쳐준다면 시즌의 마지막 챕터에 느낌표가 하나 더 붙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결승 뒤의 장면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스코어만 보면 싱겁다. 하지만 그 싱거움이 만들어지기까지의 문장들은 길었다. 중간중간 쉼표를 길게 찍어야 했고, 때론 느낌표가 필요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마침표 대신 웃음이 있었다. 왕즈이가 웃을 수 있게 만든 선수, 지고도 고개를 들 수 있게 한 승자. ‘여제’라는 단어가 과장처럼 들리지 않는 순간이었다. 스포츠는 결국 사람이 한다. 최고는 실력으로 증명되고, 인격으로 완성된다. 안세영의 10월이 그 교과서였다.
그래서 이번 논쟁의 끝은 의외로 간단하다. 경기장에서 이미 답을 보여줬다. 왕즈이가 왜 웃었느냐고 묻는다면, 안세영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빠른 발보다 더 빠른 판단으로, 강한 스매시보다 더 강한 태도로. 중국 팬덤의 온도가 흔들리는 사이, 중국 언론이 먼저 침착하게 정리한 이성의 문장도 기록해둔다. “좋은 친구이자 마땅히 누려야 할 최고의 선수.” 이 말은 칭찬이 아니라 사실 확인이다. 그리고 그 확인이 쌓여 한 시대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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