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뒷면에 ‘남병철’이 있다
달의 뒷면에는 ‘남병철’이 있다. 8월14일 국제천문연맹(IAU)은 심사를 거쳐 달에 있는 한 충돌구(Crater)에 ‘남병철 충돌구(Nam Byeong-Cheol Crater)’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남병철(1817~1863)은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다.
국제천문연맹에 이 충돌구 명명을 신청한 곳은 경희대 우주탐사학과의 ‘다누리 자기장 탑재체 연구팀(연구책임자 진호 교수)’이다. 이 충돌구에 이름을 붙일 만한 과학적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연구팀은 한국천문연구원의 추천·협의를 거쳐 ‘남병철’이라는 이름을 신청했다. 연구팀의 박현후 연구원과 한국천문연구원 양홍진 박사의 도움말 등을 통해 관련 내용을 문답으로 정리했다.
Q. 달의 충돌구에 한국인 이름이 붙은 것은 처음?
A. 충돌구는 소행성과 혜성 등이 부딪치면서 생긴 구덩이를 말한다. 수십억 년에 걸쳐 생성되기 때문에 달에는 방대한 수의 분화구가 있다. 연구팀에 따르면, 직경이 1㎞보다 큰 분화구가 적어도 50만 개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직경이 20㎞보다 큰 분화구는 9000개 이상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이 가운데 이름이 붙은 충돌구는 1659개다. 달에 있는 지형에 한국인 이름이 붙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누리 자기장 탑재체 연구팀’은 이언 게릭베셀 미국 산타크루즈 대학 교수와 국제협력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연구팀은 달 표면의 자기이상 지역(특이한 자기장 분포를 가진 지역)을 연구한다. 연구팀은 충돌구 내외부 자기장이 차이를 보이는 한 충돌구에 주목했다. 지름이 132㎞인 이 충돌구는 ‘충돌구 내부의 자기장이 주변보다 강한 세기를 가지고 있는’ 특징을 갖고 있다. 통상 중심부의 자기장 세기가 약하고 주변이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연구팀은 과학적 의미가 있는 이 충돌구에 아직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충돌구는 2021년에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이름 없는 충돌구’로 표시된 바 있다. 연구팀은 국제천문연맹에 이름을 부여해달라고 신청하기로 했다. 연구책임자인 진호 교수가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센터의 양홍진 박사에게 이 충돌구의 이름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Q. 다른 행성·위성의 지형에 붙은 ‘한국’ 관련 이름은?
A. 국제천문연맹 홈페이지에 따르면, 한국과 관련한 행성·위성의 지형 이름은 25개다. 예를 들어 수성에는 조선시대 시인 윤선도와 정철(1979년 명명)의 이름이 붙은 충돌구가 있다. ‘윤선도 크레이터’는 1976년에 이름이 부여되었다. 금성에는 황진이(1991), 사임당(1991), 연옥(1997), 연숙(1997)이라는 이름이 붙은 충돌구들이 있다. 각 행성·위성의 충돌구, 협곡 등 지형마다 이름을 붙이는 규정이 있다. 예컨대 정치적·군사적·종교적 의미가 있는 이름은 사용할 수 없다(19세기 이전의 정치인 이름은 예외). 사망한 지 3년이 지난 사람의 이름에 대해 신청서를 낼 수 있다는 조항도 있다.
같은 충돌구라도 어느 행성·위성의 충돌구인지에 따라 붙일 수 있는 이름 종류가 다르다. 수성의 충돌구에는 뛰어난 예술가의 이름을 붙인다. 윤선도와 정철은 시인 자격으로 명명된 것이다. 금성의 충돌구에는 자기 영역에서 뛰어난 기여를 한 여성(지름이 20㎞ 이상인 경우)이나 평범한 여성(지름이 20㎞ 미만인 경우)의 이름을 붙인다. 황진이나 사임당은 전자이고, ‘연옥’이나 ‘연숙’은 후자다. 화성의 작은 충돌구 이름에는 도시 이름을 붙이는데, 화성에는 ‘진주 충돌구(1976)’ ‘나주 충돌구(1979)’ 등이 있다. 달 충돌구에는 ‘과학자, 엔지니어, 탐험가뿐만 아니라 천문학, 행성·우주 연구와 관련해 해당 분야에 탁월한 공헌을 한 인물’의 이름을 붙인다. 남병철이 여기에 해당한다.
Q. 왜 ‘남병철’이라는 이름으로 신청했나?
A. 한국천문연구원 고천문연구센터의 양홍진 박사는 옛 조상들의 관측 기록을 연구하는 천문학자다. 양 박사는 “지난 4월에 연구팀으로부터 역사적으로 훌륭한 과학자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어떤 이름이 어울릴까, 고민이 시작됐다. 우선 ‘세종’이나 한국을 대표할 만한 이름 혹은 잘 알려진 학자 이름은 배제했다. “달의 뒷면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면이다. ‘세종’ 같은 큰 이름을 달의 뒷면에 있는 충돌구에 붙이면 나중에 아쉬울 것 같았고, 다음에 좀 더 좋은 기회에 이름을 쓰면 좋겠다 싶었다.”
양홍진 박사는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의 공동연구에서 달 충돌구 명명이 시작되었다는 점, 관측기기를 활용한 달 자기장 연구라는 점을 고려해 ‘남병철’이라는 이름을 추천했다. 남병철은 조선 후기 예조판서·대제학을 역임한 문신으로 천문학자·수학자로도 업적을 남겼다. 그가 쓴 〈의기집설〉에는 기존 혼천의를 보완하고 관측에 편리하도록 개량한 ‘남병철 혼천의’의 제작법이 담겨 있다. 혼천의는 지구, 태양, 달의 움직임과 위치를 측정하는 기기다. 기존 혼천의는 북극 고도를 관측지에 맞게 한번 설치하면 더 이상 변경할 수 없었다. 남병철 혼천의는 장소를 옮겨가며 천체를 관측할 수 있도록 관측의 기준이 되는 북극 고도를 조정하는 기능을 갖추었다. 올해 2월 한국천문연구원은 문헌에만 남아 있던 ‘남병철 혼천의’를 복원·제작하기도 했다.
양홍진 박사는 “남병철은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천문학 별자리를 우리의 전통 별자리와 융합해 학문으로 정리한 천문학자다. 또 기존에 쓰던 혼천의를 개선하고 그 기록을 남겼다. ‘동양과 서양의 융합, 관측기기’라는 두 가지 점에서 이번 충돌구의 이름으로 어울린다고 판단해 그 이름을 추천했다. 개인적으로도 이 명명 작업에 관여한 건 드문 경험이었다”라고 말했다.
Q. ‘남병철 충돌구’ 명명의 의미는?
A. 물론 달의 충돌구에 이름을 붙인다고 소유권이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연구팀은 ‘다누리 달 궤도선으로 한국의 우주탐사가 열리는 시점에서 달에 조선시대 학자 이름이 있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었다는 상징이라고 본다’라고 밝혔다. 박현후 연구원은 “2022년 8월에 발사한 다누리가 달 궤도 고도의 100㎞에서 돌고 있다. 그 고도에서 측정한 달 자기장 세기는 약하다. 2025년 이후에 50~60㎞로 내려오면 자기장 세기를 지금보다 잘 측정할 수 있어서, 달 충돌구의 자기장 연구도 진척되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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