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는 변화, 미래에는 일상

한겨레21 2022. 9. 28.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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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음의 과학]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 변한 모습이 미래 세계에는 익숙한 상수
미래는 미래에 맡기고 현세대의 잘못을 책임져야
2019년 서울 종로구 세장로소공원에서 ‘927 기후를 위한 결석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손팻말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 백소아 기자

2008년 미국 예일대학 경제학 교수 에보냐 워싱턴은 미 하원의 자료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여성’ 관련 법안에 어떤 ‘남성’ 의원들이 더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지는 그 남성 의원에게 딸이 있는지가 긍정적 요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찾아냈습니다.(‘Female Socialization: How Daughters Affect Their Legislator Fathers’ Voting on Women’s Issues’, American Economic Review, 2008년)

또한 2012년 덴마크에서 이뤄진 연구에서는, 기업 최고경영자(CEO)에게 딸이 있는 경우, 특히 첫째로 딸을 낳은 경우, 여직원의 임금과 처우에 더 관대해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줬습니다.(‘Fatherhood and Managerial Style: How a Male CEO’s Children Affect the Wages of His Emplyees’,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ly, 2012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저널리스트 애너벨 크랩은 저서 <아내 가뭄>에 이 사례들을 인용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행정 중심지에 전략적으로 여자아이들을 투하하면 여성에 대한 사회환경이 개선되지 않을까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요.

아이들이 덜 상처받고 덜 고생하려면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이 덜 상처받고 덜 고생하고, 더 행복하고 더 즐겁게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그 바람을 부모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도 어느 정도 충족할 수 있습니다. 갓난아기에게 세상의 범위는 가정과 부모, 몇몇 친척과 지인으로 국한되니까요. 하지만 아이가 자라면서 세상의 범위는 어린이집과 유치원과 학교와 직장(아들의 경우 군대까지)과 사회 전반으로 확대됩니다. 그러니 자신이 겪은 부조리함과 불합리함이 자녀 세대까지 전해지는 게 두려워, 전반적으로 세상에 좀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관심은 꼭 생물학적으로 부모가 돼야만 가지는 건 아닙니다. 아이가 있다면 좀더 직접적 계기가 되겠지만, 비혼이거나 아이가 없더라도 책임 있는 성인으로서 자각하는 사람이라면 다음 세대를 생각할 것입니다. 특히 어린 세대가 앞으로 겪어야 할 세상의 부당함이 이전 세대의 잘못에 따른 것이라면, 미안한 마음에 좀더 적극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솟아오르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사회적 부조리든, 구조적 불합리든, 전 지구적 변화이든, 앞으로 살아갈 세대를 생각하면 어른들이 좀더 나서고 바뀌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위가 한창이던 2022년 8월, 대구에서 열린 한국생물과학협회 정기 학술대회에 참가했습니다. 학회 주제는 ‘기후위기와 뉴노멀 시대의 생명과학 연구와 교육의 방향성’이었고, 학회 마지막 날 이를 주제로 토크쇼가 예정됐습니다. 공교롭게도 학회 일정은 당시 수도권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집중호우가 발생해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한 직후였습니다.

8월8일 시작된 집중호우는 단 하루 만에 국지적으로 최대 870㎜ 넘는 기록적인 폭우로 이어졌고, 이 때문에 곳곳에서 침수와 산사태, 도로 유실이 일어났습니다. 소중한 목숨을 잃는 안타까운 비극도 일어났고요.

그런데 중부지방에서 참담한 물난리가 일어나던 바로 그 시간, 일부 지역에선 강풍주의보, 남부 지역에선 폭염경보가 발효될 정도로, 각 지역의 기상 상황은 극단적이었습니다. 최근 몇 년간 기후변화와 이로 인한 기후위기를 꾸준히 경고했지만, 많은 사람이 이를 애써 부정하거나 무시해왔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외면하려 애써도, 세 가지 색깔로 입혀진 한반도의 기상도(그림 참조)가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확했습니다. 기후위기는 이미 시작됐다고 말이죠.

당시는 이 이상 폭우 현상이 중부지방에서 점차 남부지방으로 내려오는 중이었기에, 토크쇼는 다소 무거운 분위기로 시작됐습니다. 참여한 패널들은 저마다 최신의 통계 수치와 자료 화면과 연구 결과를 제시하며 현재 전세계의 기후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설파했지요.

바다에서 먹잇감을 얻지 못해 참솜깃오리 둥지의 알을 깨서 먹는 북극곰. 노른자로 앞발의 털이 누렇게 물들었다. 유튜브 채널 갈무리

최근 가장 더웠던 20년과 7년

국립과천과학관의 이정모 관장님은 지난 100여 년간 가장 평균기온이 높았던 20년은 최근 스무 해이고 가장 더웠던 7년은 바로 최근 일곱 해라며,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7년을 인생 초입부터 겪어야 했던 세대라며 안쓰러움을 표했습니다.

며칠 전 북극에서 귀국한 극지연구소의 이유경 박사님은 빙산 대신 푸른 물결이 넘실대는 북극의 바다와 따뜻해진 바다에서 먹잇감을 찾지 못해 대신 육지에서 새의 알을 훔쳐 먹는 북극곰과 이를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어미새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여주며, 기후변화의 바로미터인 극지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기존에 북극곰은 기후변화의 최대 피해자로 알려져서 북극곰을 살리자는 캠페인은 기후위기 극복의 가장 유명한 캐치프레이즈였죠. 하지만 영상에서 본 북극곰의 모습은 사뭇 달랐습니다. 원래 일생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살아 해양동물의 일종으로 여겨졌던 북극곰은 육지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자 가뜩이나 다양성이 부족한 극지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가 되어 무서운 생태계 교란자가 돼버렸습니다. 절대 북극곰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테지만, 기후변화는 북극곰을 악당으로 만들었습니다.

국립생물자원관의 곽명해 연구관님은 지난 몇 년간의 국내 기후변화와 식생 변화를 보여주며, 동물과 달리 이동성이 극히 떨어지는 식물은 기후변화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음을 알렸습니다. 기후변화에 따른 식생 피해의 결과가 극지나 열대지방처럼 먼 곳이 아니라, 우리 산천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았지요. 여러 자료가 보여주는 현실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했기에, 그 자리에 선 이들은 대부분 묵직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그때 한국생물과학협회 협회장인 신영준 교수님은 즉석에서 이런 기후변화의 시대를 직접 맞닥뜨려 더 오랜 세월 살아갈 세대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제안했고, 이에 대학원 첫 학기를 맞이한 20대 중반의 젊은 연구자가 청중석에서 연단으로 올라왔습니다.

“국내에서 발견된 열대 곤충 새롭게 연구”

순간 무대 위 패널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습니다. 이 청년 연구자가 대표하는 미래세대에게 미안한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던 것이죠. 하지만 연단 위에 올라온 청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습니다. 기후위기가 심각한 것은 이제 기정사실이 됐고, 자신들은 어쩌다보니 그런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때문에 누구를 원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는 거시적 사건이고 일종의 태생적 조건이므로, 적어도 자신은 이를 변수가 아닌 상수로 받아들인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연구자로서 하고 싶은 연구를 하고 자신이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살아갈 것이라고 담담히 말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오히려 열대지방에서만 살던 곤충을 국내에서 발견했다며 이를 통해 새로운 연구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말할 때는, 새로운 것을 찾아냈을 때 자신도 모르게 피어오르는 과학자의 순수한 기쁨까지 엿보였습니다.

패널들을 비롯해 토크쇼 사회를 맡은 저도 약간 충격받았습니다. 물론 그가 속한 세대의 전부를 대표하는 의견이 아님을 알지만,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었기에 약간은 당황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기존 세대에게 작금의 상황은 ‘변화’된 결과이지만, 이미 인류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스무 해만을 기억하는 이들에게 지금 상황은 ‘일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러니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을진대, 그걸 인식조차 못했던 것이죠. 그랬기에 더욱 미안해졌습니다. 저들과 저들보다 더 어린 제 아이들의 세대가 겪을 세상이, 과거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변해버린 모습이 그들에게는 이미 너무나도 익숙한 상수가 됐다는 사실이 말이죠.

미래는 미래세대에게 맡기고

온통 세로줄만 있는 방 안에서 갓난 고양이를 키우면, 다 자란 고양이는 가로줄을 보지 못합니다. 고양이의 뇌에서 가로줄을 인식하는 신경세포의 회로가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지금껏 이어온 인류의 각 세대가 그랬듯, 지금 세대도 앞으로 아이들의 세대도 각자 주어진 세상을 상수로 받아들여 그에 맞춰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들의 미래는 그들이 만들어가고, 모든 세대가 그러했듯 나름 잘 꾸려갈 겁니다. 다만 그들보다 먼저 삶을 살아 더 오랜 기억을 가진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그들에게 애초에 주어지지 않은 가로줄에 대한 책임일 겁니다. 현명하게 나이듦은, 미래는 미래세대에게 맡기고 과거의 잘못에 책임지는 것일 테니까요.

이은희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늙음의 과학: 나이 들어가는 당신은 노화하고 있나요, 노쇠하고 있나요. 과학커뮤니케이터 이은희의 나이 드는 것의 과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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