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이대론 5년마다 세대간 '연금 전쟁' ..국민연금판 '재정준칙' 만들자
역대 정부 '폭탄 돌리기'에 미래 세대 3~4배 더 부담
2092년 누적적자 '2경'..재정 안정 장치 법제화해야
70년 재정목표 설정·수지균형 실천 로드맵 제시 필요
기초연금 인상은 역주행, 취약층에 집중 재설계를
“국민연금이 2047년 고갈된 후 부과식으로 전환됨에 따라 필요한 보험료 수입은 2050년 급여액의 30%, 2070년에는 39.1%에 이른다. 고령화에 대비해 안정적인 노후 소득을 보장하려면 앞으로도 부단한 연금 개혁이 요구된다.” 2007년 대통령 직속 정책기획위원회가 발간한 ‘연금 개혁 백서’에 기술된 내용이다. 노무현 정부가 2007년 2차 국민연금 개혁을 통해 소득 대체율을 60%에서 50%로 이듬해부터 낮추고 매년 0.5%포인트씩 줄여 2028년까지 40%로 하향 조정했음에도 연금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세대 간 연금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었다는 자체 평가였다.
1998년 1차 개혁 당시 5년마다 장기적(70년) 재정 상태를 추산하는 내용의 국민연금법 개정이 이뤄진 게 2차 개혁의 토대가 됐다. 국민연금법에 ‘급여 수준과 보험료는 연금 재정이 장기적으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정돼야 한다’는 조항(제4조)이 신설됐다. 하지만 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는 기금 재정이 빠른 속도로 악화하고 있음에도 개혁 과제를 차기 정부에 떠넘겼다. 직무 유기를 넘어 ‘장기 균형’을 법제화한 국민연금법을 위반한 것이나 다름없다. 연금 포퓰리즘에 휘둘린 탓이다. 현행 9% 요율은 1998년 이후 24년째 요지부동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보험료율(18.3%)의 절반밖에 안 된다. 국제 비교에서 통계 기준의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받는 돈에 비해 내는 돈이 너무 적다. 현행 소득 대체율(40%)은 선진국(OECD 평균 42.2%)과 엇비슷하다. OECD가 최근 한국 연금 보고서에서 “가능한 빨리 요율을 인상하라”고 권고한 이유다.
연금 개혁의 시계추가 2007년 이후 멈춰선 결과는 재앙에 가깝다. 70년 뒤인 2092년 국민연금의 누적 적자가 2경 2650조 원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분석도 있다. 고갈 시점도 재정 추계 때마다 점점 빨라져 이번 5차 추계에서 또 얼마나 앞당겨질지 우려스럽기만 하다. 이창수 한국연금학회장은 “한 해 백만 명씩 태어난 1·2차 베이비붐 세대가 모두 수급자로 진입하는 2030년대에는 수습 불가능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국민연금을 ‘폰지게임’에 비유해 파장을 낳은 보험 수리 통계 전문가다.
기금 고갈이 현실화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선택지는 두 가지다. 2007년 연금 개혁 백서에 언급된 ‘부과식’ 전환이 첫 번째다. 부과식은 한 해 지출액만큼 한 해 보험료를 거두는 방식을 말한다. 이렇게 되면 기금의 고갈 시점인 2057년(4차 추계 기준)부터 보험료율을 9%에서 30~40%쯤으로 올려야 한다. 현 세대는 ‘먹튀’ 오명을, 미래 세대는 ‘독박’을 뒤집어쓰는 구조다. 젊은 세대의 보이콧 사태로 연금제도의 존립 기반마저 붕괴될 우려가 크다.
두 번째는 공무원·군인연금처럼 해마다 적자분을 국가 재정, 다시 말해 세금으로 메우는 방안이다. 한데 재정 보조 금액이 상상을 초월한다. 국회예산정책처가 펴낸 공적 연금 재정 추계(2020~2090년)에 따르면 국민연금은 2039년부터 수입보다 지출이 더 많아지고 시간이 갈수록 적자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적자액은 2040년 14조 원에서 2050년 80조 원, 2070년 178조 원으로 급증한다. 직역 연금 적자분 보조까지 합치면 30년 뒤부터 예산의 20%가량을 투입해야 하므로 나라 살림이 거덜 나는 것은 시간문제다. 두 가지 모두 극단적 시나리오지만 이런 재앙적 상황에 맞닥뜨리기 전에 서둘러 국민연금을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준다.
기금 고갈 없이 미래 세대가 현 수준으로 연금을 받으려면 9%인 요율을 당장 두 배 수준으로 올려야 한다. 낸 돈 대비 받는 돈을 의미하는 수익 비율이 현재 2배 안팎이어서 수지 균형을 맞추려면 보험료율을 두 배가량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꺼번에 두 배 인상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5년마다 세대 간 연금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고 이런 갈등이 부담스러운 정권 입장에서는 폭탄 돌리기를 되풀이할 공산이 크다.
전문가들은 5년마다 실시하는 재정 추계와 정권 출범 주기가 일치한다는 점을 주목하면서 “정권 부침에 상관없이 점진적 요율 인상과 지속적 개혁을 위한 항구적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차피 극복해야 할 과제라면 사회적 합의로 재정 안정의 기틀을 닦아놓자는 것이다. 핵심은 구속력 있는 국민연금판 ‘재정 준칙’을 세우는 데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ID) 출신 윤희숙 전 국민의힘 의원은 “70년 기간을 추계한다면 70년 뒤에도 1년 치 급여를 줄 수 있는 적립 배율 1배라는 재정 목표부터 설정해야 한다”며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로드맵을 제시해야 의미 있는 개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는 “현 세대의 문제는 현 세대에서 해결해야 한다”며 “연금 추계 주기인 5년 단위로 보험료를 2%씩 인상하도록 법제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요율을 20년에 걸쳐 17%로 올리자는 주장이다. 요율 17%는 소득 대체율 40%를 유지하는 수지 균형선이다. 그는 “소득 대체율을 더 낮추기보다는 수급 연령을 늦추는 방안이 바람직하다”고 덧붙였다.
또 다른 방안은 어느 정도 ‘더 내는’ 개혁을 한 뒤 저출산·고령화 속도에 맞춰 ‘덜 받는’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는 것이다. OECD 회원국 중 70%가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형태는 제각각이다. 독일은 수급자 대비 가입자 수의 변화를 반영한 ‘지속성 계수’를 도입했다. 가입자가 줄고 수급자가 늘어나면 급여 수준을 차츰 감축하는 방식이다. 스웨덴은 미래 적립금과 미래 연금 지급액의 관계를 기준으로 한 제도를 마련했고 핀란드는 기대 여명이 늘어나는 만큼 소득 대체율을 삭감한다.
정치권의 섣부른 기초연금 인상론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칫 연금 개혁을 물타기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전액 세금으로 지원되는 기초연금이 40만 원으로 인상되면 국민연금 평균 급여보다 더 많은 역진 현상이 발생한다. 더불어민주당은 한 발 더 나아가 기초연금 40만 원 인상 외에도 전 노인 지급과 부부 감액 폐지를 추진하고 있다. 이른바 ‘이재명표’ 기초연금이다. 이렇게 되면 노인 부부의 수급액은 80만 원으로 국민연금 1인당 평균 급여액인 58만 원을 훨씬 웃돌게 돼 국민연금 불신을 가중시킬 우려가 크다. 연금 개혁 과정에서 기초연금 인상이 꼭 필요하다면 국민연금조차 가입하지 못했거나 적게 받는 취약층에 더 많이 주는 방식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OECD도 그런 방향을 권고하고 있다. 원래 기초연금의 전신인 기초노령연금을 도입한 목적은 국민연금 개혁으로 낮아진 소득 대체율을 보전해주자는 데 있다. 이런 취지를 살린다면 두 연금의 구조 개혁이 한 묶음으로 진행됐어야 함에도 국민연금은 일체 손대지 않은 채 기초연금만 대선을 치르면 10만 원씩 인상돼왔다. 기초연금을 ‘정치 연금’으로 부르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국민연금과 직역 연금의 통합 등 구조 개혁도 피할 수 없다. 이 학회장은 “공적 연금 통합이 가야 할 방향인 것은 분명하다”면서도 “직역 연금의 재정 안정 조치를 취해 각 연금의 요율과 소득 대체율을 엇비슷하게 맞춘 뒤 통합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밝혔다. 하나금융경영연구소장을 지낸 배현기 웰스가이드 대표는 “개혁 전선을 지나치게 확대하면 이도 저도 안 될 우려가 있다”며 “국민연금 개혁은 재정 안정을 위한 모수 개혁(요율 조정 등)에 초점을 두되 구조 개혁은 기초·국민연금의 관계 재설정에 초점을 맞추고 직역 연금 통합은 방향성만 제시하는 것이 차라리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권구찬 선임기자 chans@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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