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찬,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다!

결자해지.

비를 맞으며 뛰고 있는 황희찬(울버햄턴)의 머릿속에는 그 문구밖에 없었다.

석연치 않은 오심에 희생됐다. 28일 영국 울버햄턴 몰리뉴. 울버햄턴과 뉴캐슬의 2023~2024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10라운드 경기. 1-1로 맞서고 있던 전반 말미 앤서니 테일러 주심은 휘슬을 불었다. 울버햄턴 문전 안에서 황희찬이 파울을 범했다고 선언했다. 페널티킥이었다.

VAR이 가동됐다. 중계 화면에서는 황희찬의 파울 의심 장면을 계속 보여주고 있었다. 파울이 아니었다. 황희찬의 첫 터치가 다소 길었다. 볼을 걷어내려 했다. 그때 뉴캐슬 파비안 셰어가 달려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부러 넘어지고 있었다. 주심을 속이려는 다이빙에 돌입한 것이었다. 황희찬은 이를 인지했다. 볼을 차려다가 멈췄다. 빌미를 주면 안 됐다. 황희찬의 오른발은 볼이나 셰어의 몸 대신 땅을 찼다. 셰어는 그 이전에 무게 중심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땅에 철퍼덕 넘어졌다. 프랑스 칸에서 초청할 정도의 엄청난 연기였다. 봉준호 감독의 캐스팅 리포트 첫 줄에 들어가고도 남을 만했다.

테일러 주심은 특유의 근엄한(자기 혼자만 자신이 '명판관 포청천'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울버햄턴 선수들의 항의를 물리쳤다. 귀에 꽂힌 무전기로 VAR과 소통했다. 그 순간만이라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99%가 악평이지만)를 즐기는 듯한 모습이었다. 온 필드 리뷰도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자신의 오심에 대한 가능성은 1%도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판결했다. 페널티킥. 원정 응원을 온 뉴캐슬의 팬들을 제외하고 몰리뉴에 있는 모든 팬은 야유를 퍼부었다. 그럼에도 테일러 주심은 미동도 없었다.

칼럼 윌슨이 키커로 나서 골로 연결했다. 뉴캐슬이 2-1로 앞서나갔다. 황희찬으로서는 마음의 부담을 한껏 안고 라커룸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후반 26분 울버햄턴의 미드필더 토티 고메스가 오른쪽 측면에서 볼을 몰고 아크 서클 인근으로 들어갔다. 이 모습을 본 황희찬은 조엘링턴과 댄 번 사이로 뛰어들었다. 고메스가 패스를 찔렀다. 페널티 지역 안에서 볼을 잡았다. 뉴캐슬 수비수 댄 번이 달려들었다.

그 순간...

#2년의 세월 힘들고 힘들었다.

2021년 9월 22일 몰리뉴 앞. 울버햄턴과 토트넘의 카라바오컵 32강전 취재를 위해 울버햄턴으로 향했다. 팬들 그리고 기자들과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황희찬이 주제였다. 현지 기자들의 반응은 당시만 해도 좋지 않았다. 이 경기에 앞서 열렸던 왓포드전에서 프리미어리그 데뷔골을 넣었다. 이어진 브렌트포드 전에서는 저돌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독일 무대에서 보여준 것이 없었다. 라이프치히에서의 실패에 걱정 어린 평가가 많았다. 입단 초기 황희찬을 향한 분위기는 냉정했다.

초반 6경기 4골. 황희찬은 폭발했다. 독일 무대에서 뛰지 못했던 한을 제대로 풀었다. 울버햄턴은 황희찬을 붙잡았다. 1월 겨울 이적 시장에서 완전 영입에 성공했다. 황희찬은 이제 울버햄턴의 선수가 됐다.

팬들과 언론의 반응도 달라졌다. 황희찬은 울버햄턴의 스타가 됐다. 여기에 언제나 팬들에게 자상하게 대하는 그의 태도에 팬들은 열광했다. 언론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황희찬은 어려움을 겪었다. 우선 부상이 찾아왔다. 컨디션 조율이 쉽지 않았다. 6경기 4골 후 18경기에서 1골을 넣는 데 그쳤다. 32라운드 뉴캐슬 원정에서 부진하자 영국 현지 매체는 '울버햄턴이 황희찬의 완전 영입 옵션을 이르게 발동시켰다. 이는 과한 행동'이라며 비난했다.

2022~2023시즌 초반 황희찬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브루노 라즈 감독 아래에서 제대로 경기에 뛰지 못했다. 벤치에서 대기하다가 조금 뛰거나, 선발로 나섰다가 이르게 교체되곤 했다. 8월 23일 홈에서 열린 카라바오컵 2라운드 프레스턴 노스 엔드전에서는 자신이 얻은 페널티킥을 실축하고 말았다. 팀은 승리했지만, 황희찬은 고개를 숙였다.

이적설이 나왔다. 잘츠부르크 시절 은사였던 제시 마치 감독이 황희찬을 리즈로 불렀다. 당시 황희찬도 심각하게 이적을 고민했다. 그러나 황희찬은 잔류를 선택했다.

8월 28일 4라운드 홈경기 뉴캐슬전. 황희찬은 후반 39분 교체로 투입됐다. 후반 막판 황희찬은 수비에 가담했다. 볼을 클리어링했다. 이 볼이 공교롭게도 뉴캐슬 공격수 알랑 생막시맹에게 향했다. 생막시맹은 그대로 발리슛을 때렸다. 그의 인생에 길이 남을 대단한 슈팅이었다. 골로 연결됐다. 울버햄턴은 패배했다. 울버햄턴 팬들은 황희찬에 대한 분노를 드러냈다. 황희찬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벼운 부상이 계속되며 몸 관리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포르투갈 라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당시 울버햄턴은 포르투갈 텃세가 심했다. 누누 산투 감독에 이어 브루노 라즈 감독도 포르투갈인이었다. 팀 내 포르투갈 선수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주앙 무티뉴나 후벵 네베스, 다이넬 포덴스, 페드로 네투 등등 황희찬에게 볼을 공급해줘야 하는 선수들이 죄다 포르투갈 선수들이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황희찬이 좋은 위치에 가 있을 때 이들 포르투갈 선수들은 같은 국적의 선수들 혹은 라틴 계열의 선수들부터 찾았다. 오랫동안 발을 맞춘 선수들 쪽으로 먼저 볼이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한숨만 나왔다.

#훌렌 로페테기 감독의 등장

2022년 카타르 월드컵. 황희찬은 포르투갈전 결승골로 자신감을 충전했다. 그리고 감독도 바뀌었다. 훌렌 로페테기 감독이 부임했다. 그는 울버햄턴을 바꾸어 나갔다.

우선 인적 쇄신을 단행했다. 파블로 사라비아, 마리오 레미나, 크레이그 도슨, 주앙 고메스, 마테우스 쿠냐 등을 영입하면서 팀 내 국적 다변화를 꾀했다. 팀 스타일도 바꿨다. 라즈 감독 아래에서 울버햄턴은 특별한 전술이 없었다. 앞쪽에 있는 선수들을 달리게 했고, 거기에 맞춰 패스를 찔러주었다. 2차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로페테기 감독은 선수들의 빌드업을 강조했다. 패스를 주고 공간으로 빠졌다. 볼이 돌아나온 후 다시 공간을 만들고 그쪽으로 찔렀다.

황희찬은 여기에 녹아들었다. 경기 뿐 아니라 훈련에서도 황희찬은 늘 로페테기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로페테기 감독은 황희찬에게 전술적인 움직임을 가르쳐주고 조언해 주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만난 황희찬은 언제나 "감독님이 잘 가르쳐주셔서 큰 힘이 되고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12월 21일 질링엄과의 카라바오컵 경기에서 황희찬은 교체 투입되어 페널티킥을 유도했다. 여기에 쐐기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2023년 1월 8일 FA컵 3라운드 리버풀 원정경기. 황희찬은 교체로 들어가 골을 넣었다. 시즌 1호골이었다. 3월 12일 뉴캐슬 원정. 황희찬은 리그 1호 득점을 신고했다. 4월 15일 브렌트포드전.  리그 2호 득점에 성공했다. 5월 20일 에버턴과의 홈경기. 리그 3호 득점을 기록했다. 반전의 발판을 확실히 마련했다.

#갑작스러운 리더십 교체, 황희찬은 흔들리지 않는다

올 시즌을 앞두고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8월 8일 로페테기 감독이 사임했다. 자신이 원한 선수를 구단 수뇌부가 사주지 않았다. 결국 로페테기 감독이 떠났고 게리 오닐 감독이 울버햄턴에 부임했다.

오닐 감독 아래에서도 황희찬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닐 감독은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하기보다는 로페테기 감독이 구축해 놓은 바탕을 유지했다. 특히 황희찬의 저돌성과 오프 더 볼 움직임 그리고 공격 효율성을 적극 활용했다. 황희찬, 쿠냐, 네투로 이어지는 삼각 편대도 완성했다. 황희찬은 뉴캐슬전이 열리기 전까지 리그에서 5골을 몰아쳤다. 그는 이제 외부에서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선수가 아니었다.

다시 뉴캐슬전. 황희찬은 볼을 잡고 오른발 슈팅을 할 기회를 잡았다. 뉴캐슬 수비수 댄 번은 슬라이딩 태클에 돌입했다.

황희찬은 예상 밖의 선택을 했다. 오른발로 접지 않고 왼발로 볼을 살짝 돌려세웠다. 댄 번은 미끄러지며 황희찬을 지나갔다. 황희찬은 그대로 왼발 슈팅을 때렸다. 


동점골.


이 움직임에는 황희찬의 다사다난했던 2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힘든 과정을 다 이겨내고 한 단계 더 발전한 황희찬의 축구를 이 순간에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결자해지에 성공했다. 억울한 오심으로 희생당할 수 있었던 경기였다. 다들 괜찮다고 했지만, 황희찬 본인은 나쁜 영향을 받을 수도 있었다. 흔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황희찬은 그 오심 사건이 일어나고 불과 26분 만에 멋진 골로 구속을 벗어던졌다. 그리고 환호했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제 황희찬은 흔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