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훈의 한반도톡] 김정은 자기모순…'선대 지우기' 딜레마

장용훈 2024. 10. 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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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연호·태양절 사라지고 통일·민족 지워…北주민 정체성 변화 수용 미지수
북한, 새해 첫 기록영화 공개…김일성 가족사진 (서울=연합뉴스) 조선중앙TV가 2일 '영원히 가리라 백두의 행군길을' 제목의 새 기록영화를 방영했다. 영화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백두산 등정 여정을 소개하면서 김일성 주석과 그의 부인인 김정숙,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등장하는 가족사진을 보여줬다. 2020.1.2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장용훈 기자= 세습을 통해 권력을 이어받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선대 수령의 노선과 존재를 지우는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어 사실상 자기모순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김 위원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후계자로 최고지도자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김일성 주석에서 시작된 이른바 '백두혈통'이기에 가능했다.

그런데 선대를 부정함으로써 정치적 정통성의 근간을 훼손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선대 부정의 가장 최근 사례가 김일성 주석을 기리는 '주체 연호' 사용 중단이다.

주체 연호는 북한을 대표하는 신문인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뿐 아니라 북한이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각종 성명과 담화 등에서도 모습을 감췄다.

김정은 위원장의 지난 10일 담화와 11일 밤 나온 외무성 중대성명에는 각각 '주체 113(2024)'이라고 적시됐지만, 12일 밤에 나온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담화부터는 주체 연호 없이 '2024년'이라고만 적혔다.

이후 나온 김여정 담화와 15일 조선인권연구협회 대변인 담화도 마찬가지로 주체 연호 없이 예수가 탄생한 해를 원년으로 삼는 서기력을 사용했다.

주체 연호는 1997년 7월 8일 김일성 3주기를 맞아 그가 태어난 1912년을 주체 1년으로 하는 방식으로 제정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노동당 총비서에 추대되면서 공식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주체 연호 제정이 김정일 위원장이 선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보여주기 위해 삼년상을 마치고 노동당 총비서 자리에 오르기 직전에 취한 조치로 보이는데, 김정은 위원장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셈이다.

북한이 올해부터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북한 각지에서 김일성 생일 111주년 경축행사 (서울=연합뉴스) 북한 김일성 주석의 생일 (태양절·4월 15일) 111주년을 기념하여 각지에서 경축행사들이 진행됐다고 조선중앙TV가 15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화면] 2023.4.15 [국내에서만 사용가능. 재배포 금지. For Use Only in the Republic of Korea. No Redistribution] nkphoto@yna.co.kr

작년 말 노동당 전원회의와 올해 초 최고인민회의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공식화한 '통일 지우기'도 선대 수령의 업적 부정이라는 성격을 가진다.

김정은 위원장은 작년 12월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 교전중인 두 국가관계'로 정의하고, 이어 올해 1월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 시정연설에서는 "우리 공화국의 민족력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버려야 합니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북한은 조국통일3대헌장기념탑을 철거했으며 개성공단과 금강산의 남측 시설들을 없애고 있고 최근에는 남북을 잇는 경의선·동해선 철도 도로를 폭파했다.

조국통일3대헌장은 평화·통일·민족대단결의 조국통일 3대 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고려민주연방제 통일방안 등 김일성 주석이 제시한 통일원칙을 일컫는 것으로 이 탑은 김일성의 '통일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 탑의 철거는 김일성의 업적에 대한 부정인 셈이다.

또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사업, 남북 철도 도로 연결사업은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해서 이룬 협력사업이라는 점에서 김정일의 업적에 대한 부정으로 읽힌다.

최근 북한은 '우리민족제일주의' 대신 '우리국가제일주의'를 주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선대의 지도담론을 김정은 시대의 담론으로 대체하는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우리민족제일주의는 19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하는 와중에 여타 사회주의 국가들과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는데 이용됐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는 남북관계를 뒷받침하며 우리민족끼리 등으로 진화했다.

우리국가제일주의는 2017년 11월 핵무력 완성 선언 이후 등장한 김정은 시대의 담론으로, 우리민족제일주의와 혼용되다가 지금은 북한의 핵심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북, 동해선 도로 일부 폭파 장면 (서울=연합뉴스) 북한이 15일 경의선·동해선 남북 연결도로 일부 구간을 폭파했다고 합동참모본부가 밝혔다. 합참은 이날 국방부 출입기자단에 보낸 문자메시지를 통해 "북한군은 오늘 정오께 경의선 및 동해선 일대에서 (남북) 연결도로 차단 목적으로 추정되는 폭파 행위를 자행했으며, 현재는 중장비를 투입해 추가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사진은 우리 군 CCTV에 잡힌 동해선 도로 폭파 장면. 2024.10.15 [합참 제공 영상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kane@yna.co.kr

전직 정보분야 고위관계자는 "김정은은 세습으로 권력을 물려받았지만, 쇠락한 국가를 물려준 선대에 대한 불만이 컸던 것으로 알고 그런 입장이 간부들에 대한 질책 등 짜증스러운 태도로 이어졌다"며 "이런 불만이 선대 지우기를 통해 나와 선대는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제는 과연 이런 김정은 위원장의 시도가 북한 사회에 뿌리내릴 수 있겠느냐는 대목이다.

북한에서 후계자가 갖춰야 할 제1의 덕목으로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꼽고 있고 주민들도 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그런데 선대수령에 대한 부정은 이런 조건을 스스로 깨는 것으로, 주민들로서는 선뜻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북한이 당 중앙위, 중앙군사위, 국방위, 내각, 중앙인민위 5개 기관의 공동결정서 발표를 통해 대대적으로 강조했던 주체 연호 사용과 태양절 지정을 슬그머니 사용하지 않는 것도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또 7∼8일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해 통일 조항을 손보고도 이를 공개하지 않는 것도 민족과 통일 개념에 익숙한 주민들의 정체성을 고려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장용석 인제대 초빙교수는 "주민들의 정체성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바뀌긴 어렵다는 점에서 김정은의 시도가 과연 성공적일지는 미지수"라며 "대외적으로 긴장을 키우고 주민들을 묶어내는 노력이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jy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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