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복과 손잡고, 세계의 미술관으로]
도쿄 인근에 유럽성(城) 닮은 미술관
아름다운 정원과 입구의 조각품 '인상적'
마크 로스코 작품 7점 배치...램브란트도
내년 3월 폐관전에 꼭 둘러봐야할 곳
숨어있는 일본의 '알짜 미술관'
일본은 일찍 문호를 개방한 덕분에 서구와 교류가 활발했죠. 특히 19세기 중후반 일본 판화가 유럽 미술계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합니다. 자연스럽게 일본 부호들은 일본 판화의 영향 속에 꽃핀 인상주의 회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요. 그러다 보니 일본 컬렉터들의 서양회화 수집의 역사는 1백 년이 넘습니다. 수집품의 질과 양도 엄청나고요. 게다가 아름다운 풍광, 독특한 건축물, 맛있는 식사, 친절한 서비스 등 우리와 비슷한 듯하지만 너무나 다른 개성과 매력이 넘치는 나라죠. 오늘은 내년 3월 문을 닫는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리는 도쿄 인근의 DIC 가와무라 미술관으로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DIC 가와무라 미술관은 도쿄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어 도쿄 가는 길, 혹은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가는 것이 좋습니다. 도쿄에서는 미술관 가는 버스가 오전에 있고 나리타공항에서는 20분 정도 기차를 타고 게이세이사쿠라역에 내리면 미술관 가는 셔틀버스가 있습니다. 셔틀버스는 무료이고 미술관까지 30분 소요됩니다.

버스에서 내려 입장권(1,800엔)을 산 다음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DIC 가와무라 미술관'의 매력적인 정원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조금 더 내려가니 단아한 건물이 나오는데, 이곳은 휴식 겸 도시락이나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도록 미술관이 준비해둔 공간입니다. 물론 미술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식사를 할 수도 있지만 시간관계상 잠깐 쉬거나 간단하게 요기를 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에 감동했습니다. 게다가 샌드위치를 먹으며 바라보는 풍광은 초록의 향연을 펼쳐줍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건축물과 호수
점심을 먹고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미술관 건축물과 호수, 꽤 넓어 보이는 정원이 나타나는데, 보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DIC 가와무라 미술관은 치바현 사쿠라시에 있습니다. 세계최대의 인쇄잉크 제조회사인 DIC 주식회사의 2대 대표였던 가와무라 가츠미(1905-1999년)가 수집한 미술품을 전시하기 위해 1990년 5월에 문을 열었죠.

미술관은 마치 유럽의 성(城)을 떠올리게 하는 두 개의 원통형 건물이 입구 안쪽 로비를 이루고 있고 전시실은 전시된 작품에 따라 각각 크기와 모양이 다 다릅니다. 다음 전시실로 이동할 때 미술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과 건축물도 큰 감동이고요.

프랭크 스텔라와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들
미술관 들어오기 전 입구에서는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 1936~2024)의 <뤼네빌 Lunéville>(1994)과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 1898~1976)의 <붉은 거미 The red Spider>(1976)가 관람객을 맞이하는데요. <뤼네빌>은 서울 강남 테헤란로에 있는 포스코 센터 앞의 <꽃이 피는 구조물>(1998)을 연상시킵니다.
스테인레스 스틸과 알루미늄으로 제작된 동그라미와 직선, 찌그러진 덩어리들이 금방이라도 무너지거나 솟아오를 것 같은 불안정한 형태로 고전적인 건축물과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묘한 긴장을 만들어냅니다. 미술관 안에서도 스텔라의 작품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요. 다양한 색면 추상 회화와 벽에 걸린 조각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대담하게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실험적인 작업을 이어갔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칼더의 <붉은 거미>는 미술관 입구 왼쪽에 있습니다. 움직이는 조각, 모빌 작품을 많이 선보인 칼더의 움직이지 않는, 스테빌 작품입니다. 칼더가 많이 썼던 시그니처 색깔인 빨간색으로 된 미니멀한 형태는 오른쪽에 있는 스텔라의 조각과 대비를 이뤄 두 조각을 비교해보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미술관에는 렘브란트의 <챙이 큰 모자를 쓴 남자>(1635)를 포함해, 모네, 드가, 르누아르, 팡탱 라투르, 보나르, 피카소, 마티스, 샤갈, 마리 로랑생, 브라크, 칸딘스키, 막스 에른스트, 르네 마그리트, 장 뒤뷔페, 이브 클랭, 앤디 워홀 등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마크 로스코의 일곱 작품들
무엇보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가 미국의 시그램 빌딩의 레스토랑을 위해 그렸다가 작품이 설치된 것을 보고 실망해 계약을 파기했던 작품 서른 개 중 일곱 작품이 이곳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전세계의 현대 미술관에는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얼마 전 제 칼럼에서 다뤘던 '워싱턴 D.C.의 필립스 컬렉션'에 있는 전시실은 아담한 크기의 방으로 작품에 집중하게 하는 매력이 있습니다.
필립스 컬렉션에 비하면 DIC 가와무라 미술관의 7각형으로 생긴 전시실은 꽤 큰 편입니다. 그 어디서도 경험하기 어려운 독특한 시간을 관람자에게 선사하는 곳입니다. 어둡도록 낮춘 조도, 벽면을 가득 채우는 큰 크기의 그림들, 전체적으로 어두운 붉은 색과 검은 색으로 이루어진 색감 등에서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장엄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됩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는 “그림은 경험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하나의 경험”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은 비극이나 황홀, 파멸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인 감정을 단순하게 표현할 뿐이고 감상자가 그림을 바라봄으로써 그림이 확장되고 성장한다고 말합니다.
마크 로스크가 권하는 그림 바라보는 방법
관람자가 교감하지 않으면 그림 자체가 존재한다고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그림을 45cm 앞에서 보라고 권고합니다. 이번에 DIC 가와무라 미술관에서 저는 마크 로스코의 권고대로 거대한 캔버스 바로 앞에 서서 그림을 보았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림을 보며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주 어두운 색깔 아래에서 안개가 피어오르듯 다른 색깔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죠. 그림에 따라 폭이 다르긴 하지만 가운데 부분 양쪽으로는 가느다란 세로 선이 다른 색깔로 길게 이어져있는데요. 눈 바깥쪽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던 선들도 색깔끼리 융합하면서 핵폭발하듯이 주변으로 번져나가며 섞여드는 듯 보였습니다.
세포가 왕성하게 분열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우주의 대폭발 현장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고요해보이던 색면 그림이 생명과 우주의 무한한 에너지를 교향악처럼 펼쳐주었습니다. 모든 작품이 다 그렇지만 어떤 작품을 깊이 느끼려면 작품 앞에 오래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경험이었습니다.

싸이 톰블리를 만나는 곳
깊은 어둠에 잠겼던 106번방을 나와 바로 위층의 200번방에 가면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양쪽의 통창을 통해 정원의 나무들이 그대로 미술관 내부로 들어와 한폭의 그림을 선사합니다.
평소 이 전시실에는 싸이 톰블리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요. 2024년 9월 14일부터 1월 26일까지는 니시카와 카츠히토의 미니멀한 작품이 벽을 수놓고 있었습니다. 이 방은 DIC 가와무라 미술관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공간, 예술, 자연이 바로 그것입니다. 의자에 앉아 한참 공간의 매력에 잠겨 있다 보니 원주에 있는 뮤지엄 산(SAN: Space, Art, Nature)이 떠올랐습니다.
뮤지엄 산 역시 자연과 어우러진 공간과 예술의 세계를 매력적으로 펼쳐주는 곳이죠. 뮤지엄 산이 교통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연 20여 만명의 관람객을 끌어들이며 승승장구하는 것과 대비되게 DIC 가와무라 미술관이 내년 3월에 문을 닫는다고 하니 아쉬운 마음이 큽니다.
정원과 미술관 유지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은데 반해 입장료는 저렴하고 도쿄 시내 미술관들에 비해 접근성이 떨어진다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데서 나온 결정인 듯한데요. 아무쪼록 방법을 찾아 이 멋진 미술관이 계속 관람객을 맞이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문을 닫을 경우 언제 다시 방문할 수 있을지 모르니 내년 3월이 가기 전에 서둘러 가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가시게 되면 들어가는 길에 꼭 정원에 있는 레스토랑 벨베데레에 예약을 하고 떠나기 전 들러 식사나 커피, 디저트를 드시기 바랍니다. 정원뷰를 통창으로 보며 맛보는 미술관 카페에서의 여유는 아무리 바빠도 포기하기 어렵죠.
※ 정연복 미술평론가는 서울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았으며, 프랑스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현재 중앙대에서 예술사 강의를 한다. 사조의 이해나 단순지식보다는 직관적인 경험으로서의 예술이해에 관심이 많다. 삶에서 예술이 나오고 예술이 곧 삶이 된다는 것,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느끼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림과 미술관에 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