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수 부상 분석 보고서'가 시사하는 것
올해 메이저리그 화두 중 하나는 '투수 부상의 급증'이었다. 특히 선발 투수들이 시즌 초반부터 쓰러졌다. 셰인 비버(클리블랜드)를 비롯해 스펜서 스트라이더(애틀랜타) 유리 페레스(마이애미) 등이 시즌 아웃됐다. 지난해 사이영상 수상자 게릿 콜(양키스)도 부상 때문에 시즌 초반을 결장했다. 선발 투수 부상에서 자유로운 팀이 없었다.
후유증은 시즌 내내 이어졌다. 또 시즌이 끝나서도 여파가 계속 되고 있다. 올해 월드시리즈 우승팀 다저스도 포스트시즌에서 선발 구성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팀들은 이번 스토브리그에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하면서 선발 투수를 영입하고 있다.
주요 선발 투수 계약 (기간)
맥스 프리드 - 2억1800만 (8년)
블레이크 스넬 - 1억8200만 (5년)
네이선 이볼디 - 7500만 (3년)
루이스 세베리노 - 6700만 (3년)
기쿠치 유세이 - 6367만5000달러 (3년)
프랭키 몬타스 - 3400만 (2년)
매튜 보이드 - 2900만 (2년)
이 와중에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1년 동안 진행한 '투수 부상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전직 프로 선수와 외과의, 트레이너, 생체역학 전문가 등 200명 이상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62페이지에 해당하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골자는 이렇다.
사무국 주관으로 시행된 이 조사에서 투수 부상을 가장 유발하는 요소는 '구속'이다. 투구 추적이 시작된 2008년 패스트볼 평균 구속은 91.3마일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94.2마일까지 상승했다. 더 빠른 구속을 쟁취하려는 욕심이 화를 불러왔다.
심지어 최근에는 구속만 중시하지 않는다. 보고서에서도 명시됐듯이 'Stuff'가 있다. 구속을 비롯해 공의 움직임을 만들기 위한 회전수 등이 통칭된 '구위'다. 더 강력한 공을 던지기 위한 접근법이 투수들의 몸을 갉아먹고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에 불펜 투수들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선발 투수에게도 '긴 이닝'보다 '확실한 이닝'을 요구하고 있다. 그 확실한 이닝을 막기 위해 선발 투수도 모든 공을 강하게 던진다. 오죽하면 익명의 전직 메이저리그 투수가 "선발 투수들도 불펜 투수의 마음가짐을 갖게 됐다"고 꼬집었다. 빠르고, 강한, 전력 투구가 투수 부상의 주된 원인이다.
더 큰 문제는 '인식'에 있다. 이러한 피칭이 마치 정답처럼 굳어졌다. 그러다 보니 정답을 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외부 사설 기관들을 방문하게 된다. 그곳에 마련된 최첨단 시스템을 통해 구위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한다. 모체로 볼 수 있는 '드라이브라인 베이스볼'이 성공을 거두자 이와 비슷한 곳들은 더 늘어났다.
기술의 발전을 탓할 순 없다. 초고속 카메라 엣저트로닉(Edgertronic)과 공의 비행을 추적하는 트랙맨(TrackMan)은 피칭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투수가 어떻게, 어떤 공을 던지는지 잘 이해하게 됐다. 과거에는 단순히 공이 어땠는지 물었지만, 요즘 투수들은 공에 담긴 정보들을 궁금해한다. 예컨대 패스트볼의 순수 백스핀을 파악해 중력에 반하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따져본다.
공을 던진 후 최신식 기계로 살펴보는 장면은 이제 생소하지 않다. 그러나 일각에선 이 시스템이 공의 위력 향상만 몰두하는 현상을 경계한다. 초반에는 달라진 결과를 즉각 보여야 한다는 이유였지만, 이후에도 한쪽으로 치우치면서 우려를 사고 있다.
프로는 경쟁 사회다. 돈이 얽혀있는 이상 경쟁은 불가피하다. 메이저리그는 야구를 바탕으로 하는 거대 스포츠 산업으로 성장했다. 덕분에 성공하면 더 좋은 대우를 받는다. 미 4대 프로스포츠(MLB NBA NFL NHL)에서 7억 달러 계약이 나온 유일한 종목이다. 참고로 메이저리그 제외 최대 계약은 NFL 패트릭 마홈즈의 4억5000만 달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은 투수들의 부상을 가속화시켰다.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특별함을 갖춰야 한다. 투수에게 그 특별함은 구위로 대변된다. 구위를 키우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희생도 감수한다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만연해졌다.
이 배경에는 토미존 수술의 보편화가 있다. 원래 토미존 수술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막다른 길에 몰렸을 때 어쩔 수 없이 하는 선택이었다. 그 당시에는 긴 재활 기간으로 복귀를 장담할 수 없어서 수술 자체를 기피했다. 하지만 수술법이 보강되면서 토미존 수술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 수술 후 복귀 확률이 높아진 점도 진입 장벽을 낮췄다.
여기까지는 긍정적이다. 그런데 토미존 수술이 하나의 통과 의례가 되는 여론이 형성됐다. 강하게 던져서 보상 받고, 설령 다친다고 해도 수술을 받으면 그만이라는 입장이다. 부상자 명단에 있어도 급여를 받고 서비스타임이 인정되면서 심적인 부담도 덜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굉장히 위험한 발상이다. 수술 후 복귀 확률은 100%가 될 수 없다. 90%에도 미치지 못한다. 한 외과의는 "돌아오지 못한 20%를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술은 위기에서 대책이 돼야할 뿐이지, 계책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더 심각한 건 이 분위기가 아마추어 리그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어린 아마추어 투수들의 실태가 이번 보고서의 핵심이다. 그들을 보호하는 가이드라인이 무너진 상태다.
'성적만능론'이 아마추어 리그를 관통한 건 당연했다. 프로 지명에 유리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가려면 당장의 성과가 요구된다. 유소년 때부터 더 빠르고 강한 공을 던지도록 부추겼다. 아직 골격이 제대로 성장하지도 않았는데, 무리하면 몸이 버틸 재간이 없다. 성장판이 인대보다 약한 탓에 팔꿈치에서 뼈가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참관하는 '퍼펙트게임 쇼케이스'는 청소년들에게 중요한 무대다. 그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는데, 그러면 일단 구속으로 보여줘야 한다. 한 대학 감독도 대학 장학금이나 높은 지명권을 따내려면 "구속이 왕"이라고 말했다.
빨라진 구속은 '퍼펙트게임 쇼케이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0년 전만 해도 95마일 이상 찍은 투수가 5명뿐이었다. 2019년까지 한 자릿수가 유지됐다(8명). 그러나 지난해 20명을 넘기더니 올해는 36명까지 치솟았다. 10년 만에 7배를 훌쩍 넘긴 것이다.
구속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어쩌면 메이저리그가 다른 리그와 가장 차별화를 둘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구속에 집착한 나머지 야구계 전체가 병폐화됐다. 애슬레틱스 단장 데이빗 포스트는 지난 11월 단장 미팅에서 14세 소년의 사례를 소개하며 "청소년들의 팔 부상은 토미존 수술 여부와 상관없이 그 자체로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밝혔다.
구속과 구위, 그리고 전력 투구는 이미 트렌드가 됐다. 이번 보고서로 각 팀들과 투수들이 해온 것을 중단할 리는 만무하다. 그 또한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다. 선발 투수가 한 경기에 150개를 던지고, 한 시즌에 300이닝 가까이 소화하는 것도 비정상적이다. 혹사와 낭만은 분명 다르다. 관리를 외치면서, 관리가 되지 않는 시대로 돌아가는 건 모순이다.
매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보고서는 유연한 훈련법을 포함해 긴 이닝을 책임진 투수에게 '인센티브를 보장'하고, 투수 로스터를 줄이며,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 '이동 횟수 제한'을 내세웠다. 인위적으로 투수들이 더 많은 이닝을 막게 하자는 취지다. 이건 지난번 롭 맨프레드 커미셔너가 논란을 야기한 '선발 6이닝 의무'와 궤를 같이한다. 사태가 잠시 완화될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지는 의문이다.
물론, 이번 보고서는 조사 기간이 길지 않았다. 전문가들도 추가 연구가 계속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한 단축 시즌의 파장도 변수였다. 루틴이 깨짐으로써 부상이 일시적으로 증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표본이 더 있어야 한다.
하지만 보고서에 명시된 부상 요인들은 새로운 사실들이 아니다. 누구나 다 추측할 수 있었다. 심증에서 물증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아마추어 리그의 현실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대로면 다가올 미래가 어둡고, 현재도 밝다고 할 수 없다.
<ESPN> 제프 파산은 이 보고서가 "변화의 시작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냥 짚고 넘어가지 말고, 짚고 고쳐야 한다. 답이 발견되지 않을지언정, 답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필요하다.
그게 이번 보고서가 남긴 '진짜' 교훈이다.
- 이창섭
현 <SPOTV> MLB 해설위원
전 <네이버> MLB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