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뀌어버린 우선순위에 대하여[탱고에 바나나]

행복 호르몬에 푹 담가진 날이었다. 출산은 2주가 채 남지 않았고, 동글동글 귀여운 남편의 생일이기도 했다. 자연 진통을 기다리는 나는 남편 생일 선물로 예쁜 아가를 떡 하니 낳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아서 남편이 좋아하는 요가복 브랜드에서 속옷 6장을 사줬다. 남편은 요일별로 입겠다며 어린아이처럼 신나했다.

아기는 예정일을 채워서 나올 생각인지 뱃속에서 딸꾹질도, 발차기도 야무지게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 탱고는 잠시 쉬고 있다. 그래도 가끔 드라이브를 하면서 탱고 음악을 듣는데 그럴 때면 뱃속 아기도 좋은지 열심히 태동을 한다. 나중에 태어났을 때 응애응애 울면 동요 말고 탱고 음악을 틀어줘야 하나 싶다.


탱고를 쉬고 있는 우리 부부를 위해, 반가운 홍콩 친구들이 무려 경기도인 우리 동네까지 놀러 왔다. 친구들 역시 탱고를 추는지라 숙소는 탱고로 핫한 홍대입구역 근처지만, 남편의 생일 파티를 위해 무려 경기 남부까지 달려온 것이다. 친구들은 전날 새벽 4시까지 밀롱가에서 놀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정오에 택시에 몸을 실었다. 실컷 춤추고 퀭한 얼굴로 나타난 친구들은 우리와 종일 논 후에 밤에도 밀롱가에 갈 거라며 눈을 초롱거렸다.

홍콩 사람이지만 런던에서 자라 중국어에는 아주 ‘바나나(대강 바보라는 뜻)’라며 자책하는 L과 이탈리아 탱고 여행을 같이 갔던 귀여운 새신랑이자 곧 아빠가 되는 J. 둘은 마중 나온 우리에게 달려와 왈칵 포옹을 했다. 만날 때마다 동화 속에 들어간 것처럼 마음이 몽글해지고 행복해지는 친구들이다. 둘 다 올해 결혼했는데, 사정이 있어 새 신부 두 명은 올 수 없었다. 다들 나와 동갑이거나 위아래로 한두 살 차이가 나는 또래들로 모두 탱고를 춘다.


생일 주인공인 남편이 고른 초코 케이크를 챙겨서 평소 좋아하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 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걸 좋아하는 남편에게 초록초록한 넓은 정원이 있는 이 식당이, 사진을 찍기에도 맛있는 음식을 먹기에도 제격이었다. 우리는 트러플 향 가득한 만조 리조또와 스테이크가 포함된 세트 메뉴를 시키고 본격적으로 밀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한국은 배우자 출산 휴가가 어떻게 돼? 우리는 고작 5일이야. 비용이 저렴한 인도네시아인 헬퍼가 올 거긴 하지만(우울)…”

J는 출산 후 배우자 휴가가 5일밖에 되지 않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도네시안 헬퍼가 오기로 했다는 말을 하면서도 근심이 많아 보였다. 정부 지원의 인도네시안 헬퍼 비용을 듣고는 저렴한 가격에 쓸 수 있다며 나는 친구 속도 모르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J와 L은 그런 정부 지원 헬퍼가 아니라면 우리나라보다 훨씬 비싼 비용을 치르고 아주머니를 고용해야 한다며, 헬퍼와 함께 생활하면서 오는 불편함에 대해서 걱정했다.

“그래도 아이를 둘은 낳고 싶어. 근데 연년생으로 낳으면 아내 몸도 힘들 테고, 내년에는 용띠 해라서 엄청나게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기 때문에 아기가 내년에 태어나면 쭉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야 할 거야. 우선 아내 몸이 회복된 후에 다시 생각해보겠지만.”

우리 부부도 아기가 두 명은 있어야 아이들이 둘만의 세계를 이루고 지낼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고 있는 터라 친구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역시 연년생을 생각하는 건 아니고 말이다.

출처 @Abrazo.photo

J의 이야기를 듣던 L은 부부 둘 중 누가 더 청소를 잘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최근에 프로젝트 때문에 어마무시하게 바쁘게 일하는 아내를 둔 L은 완전히 일에 몰입되어 있는 아내의 사진을 보여주며 눈썹이 슬프게 내려갔다. 퇴근 후에도 자기 전까지 일에만 집중하는 아내가 걱정되면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기가 힘들다고 했다.

한참을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표정이 닮아지다 보니 식사가 끝났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챙겨준 예쁜 접시와 포크를 챙겨서 바로 옆 식물 카페에 갔다. 음료를 판매하는 곳은 아니고 식당에 온 손님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식당에서 기르는 파릇한 야채나 직접 만든 아기자기한 그릇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우락부락한 남편과 친구들에게 미리 준비해간 노랑색, 분홍색, 빨간색 땡땡이 꼬깔 모자를 씌우고, 케이크에는 하트 눈의 스마일 초를 꽂았다. 원래 귀여운 편인 나는 시크한 검정색 땡땡이 꼬깔 모자를 썼다. 한껏 상큼해진 남자 셋은 박수를 치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나는 그 모습을 부지런히 영상에 담았다.

친구들에게 받은 작고 아기자기한 다육이 선물과 아기용품을 챙겨서 동네로 왔다. 친구 L은 강남에서 다른 약속이 있어 먼저 자리를 떠났고, J와는 저녁 시간을 조금 더 보냈다. 귤도 까먹고, 초콜릿도 먹으면서 수다를 떨다가 J의 와이프에게 줄 선물도 바리바리 챙겼다. 곧 태어날 친구의 아기에게 줄 태명을 새긴 애착 인형이나 출산 후 사용할 스킨케어 용품을 미리 준비해 두었던 터였다.


신기하게도 오늘 우리는 종일 붙어 있으면서도 탱고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예전의 우리였다면 ‘다음번 탱고 여행은 어디가 될지, 요즘에는 어떤 탱고 마에스트로가 한국에 오는지, 어떻게 하면 탱고가 널리 퍼질 수 있을지‘에 대해 뜨겁게 이야기했다면, 이번 우리의 만남에서는 낯설게도 탱고 이야기가 없었다. 임신 기간의 고충, 결혼을 하면서 새롭게 겪게 된 여러 가지 이슈들, 홍콩과 한국의 출산 복지 차이 같은 우리네 일상에 대해 나눴다.

이전에는 탱고가 우리들 전부라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번에는 어쩐지 일상과 탱고가 분리되어 간극이 생긴 것 같다. 친구를 바래다 주는 길에 오랜만에 차 안에서 탱고 음악을 들었다. 밀롱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의 구성으로 찾아 들었다. 친구는 차 안에서 잠이 들고, 남편과 나는 아까 미처 마치지 못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한국도 살기 어렵다지만 홍콩도 아기를 낳고 기르기에 여건이 만만치 않다며 말이다.

서울로 향하는 밤거리 차 안에는 탱고 음악이 우리를 휘감고 있었고, 우리는 탱고가 아닌 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생각해 보니 늘 그랬다. 홍콩 친구들 결혼식에 가서 들러리를 했을 때에도, 넷이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가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산책을 할 때에도, 맛있는 음식에 와인을 마실 때에도 우리의 뒤에는 ‘배경’처럼 탱고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결혼 전에는 인생의 우선순위를 꼽으라고 하면 ‘일-탱고-연애’의 순이라고 생각하고는 했는데, 적지 않은 시간 사이에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듯하다. 이제는 '가족, 사랑, 일상', 그리고 그다음이 '탱고'. 탱고가 뒷전이라기보다 탱고만큼, 아니 탱고 이상으로 소중한 것들이 생겼다고 하는 게 맞겠다. 어쩌면 묵묵하게 우리네 일상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는 탱고의 새로운 모습에 우리도 조금씩 적응하고 있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 글쓴이 - 보배

탱고 베이비에서 탱린이로 변신 중. 10년 정도 추면 튜토리얼 단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여, 열심히 고군분투...하다가 출산 준비 중입니다. 공저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세상의 모든 청년>에 참여했습니다.

Brunch: https://brunch.co.kr/@sele

해당 글은 뉴스레터 <세상의 모든 문화>에 연재되고 있는 글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화>는 총 20여명의 작가들이 매일(주중)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는 뉴스레터로, 다양한 분야의 작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가는 무료 레터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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