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다 가진 욕심쟁이" 기아 레이EV [시승기]
기아 레이EV가 본격적으로 출시되며 경차 시장에도 전동화 바람이 시작됐다. 레이EV는 기존 레이의 장점인 뛰어난 공간 활용성은 그대로 간직한 채 단점으로 지적받던 가속력이나 불안한 무게중심을 해결하며 가성비 도심형 전기차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옵션 포함 3000만원대라는 가격 탓에 '그 돈을 주고 경차를 사야 하나'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과연 레이EV는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자동차일까. 레이 가솔린과 레이EV를 비교 시승해 봤다.
외모는 거의 차이가 없다. 내연기관 기반 전기차는 특유의 디자인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 아쉬웠는데, 레이EV는 오히려 티내지 않아 더 만족스럽다. 전면부에서 다른 점은 그릴 뿐이다. 내연기관은 가로 무늬를 넣었지만, EV는 매끈하게 처리해놨다.
배터리 충전구는 여느 현대차그룹의 전기차처럼 전면부 그릴 가운데 마련됐다. 뒤에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폭이 좁은 경차인 만큼 전면 주차가 어렵지는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뒷면 역시 내연기관 모델과 똑같다. 실물이 공개되기 전 테스트카가 돌아다닐 때만 하더라도 배터리나 모터 등 복잡한 부품이 들어가며 엉덩이가 '오버펜더' 튜닝을 한 것처럼 벌어질 것이란 루머가 있었는데, 실물을 보니 기존 레이 특유의 박스카 디자인이 그대로 유지됐다.
외모와 달리 실내는 꽤 많이 변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부분은 10.25인치 디지털 클러스터다. 국산 경차로서는 처음 적용된 사양이다. 사실 기존 레이나 캐스퍼의 계기판도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풀 디지털 클러스터와 번갈아 가며 보니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실시간 에너지 소모량이나 회생 제동량 등을 보기 좋게 표시해 주기 때문에 더욱 만족스럽다.
센터 콘솔 가운데 위치하던 커다란 기어봉은 스티어링 휠 뒤의 컬럼식 기어노브로 바뀌었다. 기아 EV9이랑 똑같은 모양인데, 디지털 클러스터와 어우러져 최신 전기차를 타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든다. 기어봉이 사라진 자리에는 스마트폰을 넣을 만한 수납공간이 마련됐다.
가장 좋았던 점은 바닥에 배터리가 깔려있음에도 시트포지션이나 머리공간에서의 손해가 없다는 것이다. 그간 내연기관차를 기반으로 만든 전기차는 바닥이 높아져 불편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심했던 차는 제네시스 G80 전동화 모델인데, 이 차는 바닥이 높아지며 룸미러가 눈높이보다 낮아지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레이EV는 키가 183cm인 성인 남성이 앉아도 머리 위로 주먹이 두 개 반은 들어갈 정도로 광활하다. 옆문을 연 채 바닥 두께를 살펴봐도 내연기관 모델과 같다. 배터리 용량이 35.2kWh로 작다고는 하지만, 내연기관 모델과 이렇게 똑같을 수 있다는 점이 신기하다.
실내외를 둘러본 뒤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안전벨트를 매고 전원 버튼을 누르니 전기차답게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차가 깨어난다. 컬럼식 기어 레버를 앞으로 돌리면 움직일 준비를 마치게 된다. 주차 브레이크를 발로 밟아 해제할 필요도 없다. 전자식 주차 브레이크가 적용되며 자동으로 해제되기 때문이다.
가속 페달을 지그시 밟으니 경쾌하게 나아가기 시작한다. 함께 시승한 레이 가솔린은 엔진회전수를 높게 쓰며 3기통 특유의 소음이 실내를 휘몰아쳤는데, 레이EV는 고요하고 더 빠르게 속도를 붙인다. 정지 상태에서 60km/h까지 가속 시간을 재 보니 가솔린은 무려 8.2초나 소요됐는데 전기차는 4.9초 만에 도달한다.
가속력뿐만 아니라 승차감도 더 뛰어나다. 훨씬 무거운 차체를 짊어져야 하는 만큼 서스펜션이 어느 정도 단단하게 설정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부드럽다. 요철을 밟거나 과속방지턱을 지나가도 금세 평온함을 되찾는다. 바닥에 배터리가 있는 만큼 노면 소음도 덜 올라오는 느낌이다.
또다른 차이점은 무게중심이다. 가솔린 모델의 경우 깊지 않은 코너를 돌 때도 한 번씩 스티어링 휠을 보타하며 균형을 잡아줘야 했는데, 레이EV는 진입한 그대로 끝까지 돌아나가도 불안함이 없다. 곡선을 달리며 오히려 속도를 높여봐도 밑에서 잡아당기는 듯 안정감을 유지한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행 보조 사양이다. 물론, 긴급 제동이나 차로 유지 보조 등은 모두 지원한다. 그러나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이 불가능하다. 이는 기존 내연기관 모델에도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존 내연기관에 없는 디지털 클러스터나 컬럼식 기어 레버, 전자식 파킹 브레이크까지 새로 넣을 정도인데, 기왕이면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까지 넣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이날 연비는 1kWh당 무려 6.9km를 기록했다. 공인 연비(5.1km/kWh)는 물론 시내 연비(6.0km/kWh)보다도 훨씬 우수한 수치다. 배터리 용량(35.2kWh)에 단순 대입했을 때 240km 이상을 달릴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리튬-인산철(LFP)배터리가 탑재된 만큼 겨울철에도 우수한 주행거리를 발휘하는지 추후에 살펴볼 생각이다.
레이EV는 올해 출시될 전기차 중 가장 기대했던 자동차다. 물론 더 넓은 공간을 가진 전기차로는 기아 EV9이 있고, 더 큰 차를 원하는 사람에게 가성비 전기차로는 테슬라 모델Y RWD가 있다. 하지만, 경차 특유의 실용성에 레이만의 공간 활용성, 여기에 기존 단점이던 답답한 가속 성능과 불안한 무게중심까지 해결된 레이EV는 기대 이상으로 뛰어난 자동차였다. 여기에 보조금 포함 2000만원 초반대라는 최강의 가성비까지 갖췄으니 도심형 전기차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 차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