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가치함과 싸우는 사람들”…박해영의 익숙하지만 낯선 세계

정덕현 문화평론가 2026. 5. 3. 11:0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성과로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시대의 불안
균열 속에서 관계의 가능성을 묻다

(시사저널=정덕현 문화평론가)

박해영 작가가 돌아왔다. 이번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다. 제목만 봐도 박해영 작가 특유의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작품을 통해 박해영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은 그가 지금까지 그려온 세계와 어떻게 이어지고 있을까.

JTBC 토일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이하 《모자무싸》)는 제목 그대로, 세상과의 대결 의식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는 '무가치함'이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무가치하다고 느끼게 만들고, 그 감정으로 상처받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마다의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만드는 걸까. 이 드라마는 그 무가치함을 대변하는 인물로 20년째 데뷔하지 못한 영화감독 황동만(구교환 분)과, 어린 시절 버려진 경험으로 유기 공포를 트라우마로 지닌 변은아(고윤정 분)를 등장시킨다.

두 인물은 모두 자신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세상에 맞선다. 그러나 그 방식은 전혀 다르다. 황동만은 자신을 '생산성 없는 존재'라고 규정하는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 싸운다. 반면 변은아는 세상과 싸우기보다는 그 분노와 절망감, 무력감을 안으로 축적하며 살아간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코피를 흘리는 그의 모습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타인의 날 선 한마디에 얼마나 깊은 내상을 입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스틸컷 ⓒJTBC

각자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사람들

이들을 무가치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결국 세상이다. 20년째 시나리오를 쓰며 좌절 속에서도 버텨온 황동만은 '직업이 뭐냐'는 질문 앞에서 영화감독이라고 당당히 말하지 못한다. 데뷔 여부로 가치를 판단하는 세상 속에서 그는 여전히 '무직'이기 때문이다. 애써 버티고 있지만, 그는 언제든 세상에서 완전히 지워질 수 있다는 '불안 공포'에 시달린다.

그래서 그는 아무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이야기를 쉴 새 없이 쏟아낸다. 뒷동산에 올라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자신의 이름을 목청껏 외친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불안한 상황을 버텨낼 수 있어서다. 하지만 그런 그의 모습은 이미 영화감독으로 데뷔해 성공한 지인이나 동료들에게는 그저 끔찍하게만 느껴진다. 결국 그들은 그를 자신들의 커뮤니티에서 밀어내려 한다.

하지만 변은아는 다르다. 그는 황동만의 불안을 이해한다. 자신 또한 유기 공포라는 트라우마 속에서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버리는 불안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변은아는 세상의 기준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내 인생이 왜 네 마음에 들어야 하냐"고 맞서는 황동만의 태도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을 지키는 그의 모습에서 변은아는 희미하게나마 희망을 느낀다. 어쩌면 자기 역시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작은 희망이다.

《모자무싸》가 보여주듯, 박해영 작가의 세계 속 인물들은 세상의 시스템과 싸우고 있다. 이번 작품이 '생산성'이라는 기준으로 인간의 가치를 서열화하고, 그 바깥에 있는 존재들에게 지워질 것 같은 공포를 안기는 시스템과의 싸움이라면, 전작 《나의 해방일지》는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이 겪는 욕망과 좌절을 통해 사회 시스템이 제시하는 위선적인 행복을 진짜 행복으로 믿고 살아가라는 세상과의 승부였다. 모든 것이 도시 중심으로 설계돼 도시에서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말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박해영 작가는 특유의 풍자적인 유머를 더해 《나의 해방일지》라는 독특한 작품으로 가감 없이 꺼내놨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스틸컷 ⓒJTBC

《나의 해방일지》 속 염씨네 가족 역시 이 무가치함의 감정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간다. 도시로 나가야만 일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그들은 하루 대부분을 출퇴근에 소모한다. 문화적으로도 고립된 삶은 관계조차 쉽게 맺지 못한다. 주말농장 같은 한가로움은커녕, 가족 모두가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밭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그들을 짓누른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말한다. 신세를 한탄하고, 서로를 향해 감정을 쏟아낸다. 갖가지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염창희(이민기 분)나 염기정(이엘 분)이 그렇고, 자신보다 더 무력해 보이는 구씨(손석구 분)에게라도 "나를 추앙해요"라고 명령하듯 말하는 염미정(김지원 분)이 그렇다. 이들은 모두 변방의 '무가치함'이라는 시스템에 맞서 저마다 치열한 싸움을 벌인다.

《나의 해방일지》는 그러면서도 '도시로 나가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이야기한다. 물론 염씨네 가족은 결국 도시 외곽에서 살게 되지만, 적어도 이들이 겪은 분투는 우리로 하여금 무조건적인 도시의 낭만적 행복만을 생각하게 만들지 않는다. 도시냐 변방이냐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중심에서 밀려나 소외된 이들이 겪는 '변방'의 감정이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 스틸컷 ⓒtvN

환대가 열어주는 해방의 감정

그렇다면 박해영 작가가 보여주는 이 싸움은 승리로 귀결될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박해영 작가는 그 시스템으로부터 이탈하는 관점의 전환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대안을 제시한다. 《나의 아저씨》에서 박동훈(이선균 분)이 처한 상황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하는 중년의 위기 그 자체다. 회사에서도 위태롭고, 가정도 무너진 상태다. 그는 흔들리는 건물의 안전진단을 하는 건축구조기술사지만, 자신 또한 흔들리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너 그러다 나 된다"며 겁주는 형은 어떻게든 회사에 붙어있는 게 살길이라지만, 박동훈은 그런 안간힘이 과연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회의한다. 그의 마음은 출가한 오랜 친구 겸덕(박해준 분)을 자꾸만 찾는다.

자신을 내동댕이치는 세상 앞에서 그걸 어떻게든 붙잡고 살아남으려 하기보다 그는 그 손을 놓고 '편안함에 이르는' 길을 선택한다. 정희네 술집에 모인 사람들처럼, 세상의 기준으로는 실패한 인생일지라도 서로를 받아들이고 지탱해 주는 관계 속에서 다른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것은 세상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삶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인정받는 삶이다. 세상의 잣대로 망한다고 해도 어디든 환대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믿음이다. 그들이 있다면 나름으로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다.

이 흐름에서 보면 《모자무싸》의 황동만과 변은아가 고군분투하는 '무가치함'과의 싸움이 어떤 결말로 나아갈지 궁금해진다. 그들은 이미 서로를 바라보면서 해답의 단서를 발견했다. 황동만의 불안은 변은아의 경청 속에서 잠시 멈추고, 변은아의 유기 공포는 황동만이라는 존재를 통해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얻게 된다. 두 사람은 서로를 환대함으로써 서로가 마주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 제목에 담겨 있는 것처럼,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것은 황동만과 변은아 같은 특정 인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황동만과 정반대에 서있는 것처럼 보이는 박경세(오정세 분)가 대표적이다. 그는 영화 다섯 편을 개봉했지만, 작품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짜 싸워야 할 대상은 무엇일까. 각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렇게 느끼게 만드는 시스템 자체와 맞서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밀어내는 대신,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환대하는 마음으로.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