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해마다 겨울이면 쌀 20포대를 사길래.." 남편 장례식장에 찾아온 낯선 할머니들

부부로 수십 년을 살아도 상대의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매일 같은 밥상에 마주 앉고 같은 이불을 덮어도, 사람의 마음속에는 끝내 꺼내 보이지 않은 방 하나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 방의 문은 때로 그 사람이 떠난 뒤에야 비로소 열리기도 합니다.

전북 익산에 사는 김순덕 씨는 올해 예순아홉입니다. 남편 박재근 씨와 함께 45년 동안 시골 마을에서 벼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재근 씨는 말수가 적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습니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누가 뭐라 해도 끝까지 했고, 자기 일에 대해서는 좀처럼 설명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두 사람은 아들 둘을 키워 도시로 보냈습니다. 큰아들은 전주에서 회사를 다녔고, 작은아들은 서울에서 식당을 했습니다. 자식들이 떠난 뒤 부부는 넓은 논과 작은 텃밭을 일구며 단둘이 조용히 살았습니다.

재근 씨는 자식들에게도 다정한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 학교 운동회에 한 번도 오지 않았고, 아들들이 대학에 붙었을 때도 "잘했다" 한마디가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등록금 날이 되면 어김없이 논 한 귀퉁이를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순덕 씨는 그런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속으로는 믿었습니다.

그런데 순덕 씨에게는 오래전부터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남편이 읍내 정미소에서 쌀 20포대를 따로 사 오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 농사지은 쌀이 창고에 가득한데도 남편은 꼭 정미소에서 새로 산 쌀을 트럭에 싣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저녁 늦게 돌아왔습니다.

"그 쌀은 다 어디다 쓰는 거요?" 순덕 씨가 물으면 재근 씨는 짧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알 거 없소. 내 용돈으로 사는 거니 신경 쓰지 마시오."

처음 몇 해는 그냥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순덕 씨의 마음에는 의심이 자라났습니다. 쌀 20포대면 적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농사지어 버는 돈이 빠듯한 형편에 매년 그 돈이 어디로 나가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답답했습니다.

한번은 순덕 씨가 몰래 정미소 주인에게 물어본 적도 있었습니다. "우리 그이가 쌀을 사 가서 어디 쓰는지 혹시 아시오?" 정미소 주인은 난처한 얼굴로 웃기만 했습니다. "형수님, 그건 형님한테 직접 물어보셔야지요. 나는 쌀만 팔았소." 그 말이 오히려 순덕 씨의 의심을 키웠습니다.

동네 여자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습니다. 재근 씨의 트럭이 겨울마다 옆 마을 쪽으로 가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었고, 어떤 이는 옆 마을 어느 집 앞에 트럭이 서 있더라고 했습니다.

순덕 씨는 애써 모른 척했지만 마음이 편할 리 없었습니다. 그날 밤 남편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당신, 옆 마을에 누구 있소? 사람들이 다 수군대는데."

재근 씨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담배를 꺼내 물며 한마디만 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 아니오. 그냥 믿어 주시오."

그 뒤로 순덕 씨는 더 묻지 않았습니다. 45년을 함께 산 남편을 믿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의 서운함과 의심은 끝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겨울마다 트럭이 대문을 나설 때면 순덕 씨는 부엌 창문 너머로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자식들이 명절에 내려오면 순덕 씨는 가끔 지나가는 말처럼 그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너희 아버지는 겨울마다 쌀을 사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큰아들은 "아버지가 무슨 일이 있으시겠어요" 하며 웃어넘겼지만, 순덕 씨의 얼굴에는 그늘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지난해 1월, 재근 씨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눈 내린 아침, 쌀 포대를 트럭에 싣다가 뇌출혈로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병원으로 옮겼지만 재근 씨는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사흘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장은 읍내 작은 병원 지하에 차려졌습니다. 두 아들 내외와 친척들, 마을 사람들이 빈소를 지켰습니다. 순덕 씨는 남편의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끝내 그 쌀이 어디로 갔는지 말도 안 해 주고 가는구려.'

빈소에 앉아 있으니 지난 45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습니다. 신혼 시절 단칸방에서 연탄불을 피우던 일, 첫아들을 낳던 날 남편이 병원 복도를 서성이던 모습, 큰 홍수에 논이 잠겼을 때 밤새 둑을 쌓던 남편의 젖은 등. 순덕 씨는 그 모든 기억 사이사이에 끼어 있던 겨울 트럭의 뒷모습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장례 둘째 날 오후, 빈소 입구가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 여섯 명이 지팡이를 짚고 줄지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모두 낯선 얼굴이었습니다. 할머니들은 영정 앞에 서자마자 하나같이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습니다.

순덕 씨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할머니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할머니가 순덕 씨에게 다가와 손을 꼭 잡았습니다.

"사모님이시지요? 우리는 옆 마을 혼자 사는 늙은이들이오. 박 씨 아저씨가 20년 동안 겨울마다 우리 집에 쌀을 갖다 줬소."

순덕 씨는 숨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랬습니다. 20년 전 겨울, 재근 씨가 옆 마을을 지나다 눈 속에서 장작을 줍는 할머니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남편을 잃고 자식들도 연락이 끊긴 채 혼자 사는 할머니였습니다. 그날 이후 재근 씨는 해마다 첫눈이 오면 그 마을 혼자 사는 노인들 집을 돌며 쌀 한 포대씩을 내려놓고 갔습니다.

"처음엔 셋이었는데 해마다 늘어서 나중엔 스무 집이 넘었소. 이름도 안 남기고, 고맙다고 하면 손사래만 치고 가 버리데. 우리끼리는 그 양반을 쌀 아저씨라고 불렀소."

다른 할머니가 눈물을 닦으며 덧붙였습니다. "올겨울엔 쌀이 안 와서 우리끼리 무슨 일이 있나 했지. 그러다 부고를 들었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이렇게 와서 절하는 것밖에 없어서..."

할머니들은 가방에서 꼬깃꼬깃한 봉투를 하나씩 꺼내 부의함에 넣었습니다. 천 원짜리 몇 장, 오천 원짜리 한 장이 든 얇은 봉투들이었습니다. 순덕 씨는 그 봉투들을 바라보며 그 자리에 무너지듯 앉아 버렸습니다.

20년 동안 남편을 의심했습니다. 겨울마다 트럭이 대문을 나설 때 그 뒷모습을 원망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시간 동안 눈길을 헤치며 외로운 노인들의 겨울을 지켜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큰아들이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왜 말씀을 안 하셨을까요." 순덕 씨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네 아버지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생색내는 걸 제일 싫어했지. 말하면 그게 자랑이 될까 봐 그랬을 거다."

장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날, 순덕 씨는 남편의 낡은 작업복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수첩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스물세 명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름 옆에는 '허리 아픔', '손자 연락 끊김', '보일러 고장' 같은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못 가게 되면 우리 순덕이한테 부탁할 것. 그 사람 마음이 나보다 더 넓으니까.]

순덕 씨는 수첩을 가슴에 안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남편은 끝까지 아내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첩 사이에는 영수증도 몇 장 끼워져 있었습니다. 정미소 쌀값 영수증과 함께 보일러 수리비, 연탄 배달 영수증이 섞여 있었습니다. 쌀만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은 고장 난 보일러를 고쳐 주고, 연탄을 들여 주고, 아픈 노인을 병원에 태워다 주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해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 순덕 씨는 두 아들과 함께 정미소에서 쌀 23포대를 샀습니다. 큰아들이 트럭을 몰고 작은아들이 쌀을 날랐습니다. 수첩에 적힌 집을 하나하나 찾아갈 때마다 할머니들은 순덕 씨의 손을 붙잡고 울었습니다. "쌀 아저씨 각시가 왔네. 아저씨가 보냈구먼."

마지막 집에서 돌아오는 길, 세 식구는 읍내 국밥집에 들러 뜨끈한 콩나물국밥을 먹었습니다. 작은아들이 말했습니다. "어머니, 내년부터는 제가 식당에서 쌀값 보탤게요. 아버지가 하시던 일, 저희가 이어 갈게요." 순덕 씨는 국밥 그릇을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미국 작가 트리나 폴러스의 책 제목 『꽃들에게 희망을』 속 애벌레는 남들을 밟고 올라가는 대신 고치 속에서 조용히 자신을 내어 줄 때 비로소 나비가 됩니다. 재근 씨의 삶도 그랬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나눈 쌀 한 포대가 스무 명이 넘는 노인들에게 겨울을 견딜 희망이 되었습니다.

가까운 사람의 침묵 뒤에는 우리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의심이 들 때 한 번만 더 믿어 주면, 그 믿음은 언젠가 생각지도 못한 진심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진짜 선행은 자랑하지 않을 때 가장 오래 남습니다.

올겨울에도 순덕 씨는 첫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당 감나무 가지 너머로 들판이 끝없이 펼쳐지고, 해 질 녘 하늘은 남편이 좋아하던 붉은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창고 한쪽에는 남편이 쓰던 트럭이 깨끗하게 닦인 채 다음 겨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출처 : '꽃들에게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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