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악몽 또 재현됐다…한국 혼성계주가 계속 꼬인다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계주는 늘 ‘실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종목이다. 잘 타다가도 한 번의 접촉, 한 번의 넘어짐, 한 번의 꼬임으로 모든 그림이 바뀐다. 그래서 더 잔인하고, 그래서 더 아쉽다. 한국 혼성계주 2000m가 이번에도 그 잔인함을 정면으로 맞았다.

준결승 흐름은 나쁘지 않았다. 최민정이 스타트를 안정적으로 끌고 갔고, 김길리가 받자마자 순위를 끌어올리며 레이스를 살렸다. 황대헌과 임종언도 뒤에서 버티며 “이대로만 가면 결승도 보인다”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 ‘이대로’가 가장 어려운 게 쇼트트랙 계주다.

결정적 장면은 레이스 막판에 터졌다. 미국의 코린 스토다드가 앞에서 단독으로 미끄러지며 넘어졌고, 그 뒤를 쫓던 김길리가 피할 틈 없이 충돌했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은 기술이 아니라 운과 공간이 지배하는 구간이었다. 넘어지는 걸 피할 수 있었느냐를 따지기 전에, 그 장면 자체가 선수에게는 그냥 재난이다.

더 마음이 무거운 건 김길리의 반응이다. 넘어지자마자 옆구리를 부여잡았고, 간신히 다음 주자 최민정에게 터치를 이어갔다. 끝까지 레이스를 놓지 않으려는 그 한 번의 손짓이 더 아프게 남는다. 쇼트트랙은 때로 이렇게, 노력의 모양이 ‘득점’이 아니라 ‘버팀’으로만 기록된다.

결국 한국은 준결승 3위로 결승 A조를 놓쳤고, 파이널 B로 밀렸다. 파이널 B에서는 김길리 대신 노도희가 투입됐고, 한국은 2위로 들어왔지만 최종 순위는 6위였다. 네덜란드가 동메달 결정전에서 앞서가며 흐름을 가져갔고, 미국은 또 레이스 중 넘어지며 어수선한 장면을 남겼다.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남이 넘어졌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넘어졌을 때 회복할 시간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왜 어드밴스가 없었냐”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계주의 판정은 냉정하다. 명백한 고의 접촉이나 반칙이 아니면 실격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고, 어드밴스 역시 조건이 맞아야 한다. 심판이 “불운”을 구제해주는 스포츠가 아니라, “불운도 경기의 일부”라고 말해버리는 스포츠가 쇼트트랙이다. 그래서 더 열받고, 그래서 더 허탈하다.

이번 장면이 특히 씁쓸한 이유는, 혼성계주가 한국에게 아직 ‘편한 종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2 베이징에서도 넘어짐이 나오며 흐름이 끊겼고, 이번에도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같은 종류의 불운이 찾아왔다. 혼성계주는 남녀가 섞이는 만큼 교대 타이밍과 속도 차, 라인 선택이 더 촘촘하게 얽히는 종목이다. 그러니 사고가 한 번 나면 남자 5000m, 여자 3000m보다 회복이 더 어렵다.

그렇다고 “운이 없었다”로만 정리하면 너무 쉬워진다. 냉정하게 보면, 혼성계주는 애초에 자리 싸움이 더 격렬하고, 접촉 위험이 큰 종목이다. 즉, ‘운’이 개입할 여지가 원래 크다. 그래서 강팀은 운이 나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하는 레이스를 준비한다. 더 바짝 붙을지, 한 템포 간격을 둘지, 바깥 라인으로 도망갈지, 교대 직전 속도를 어떻게 만들지, 이런 디테일이 결국 “사고를 덜 당하는 팀”을 만든다.

하지만 이번 건을 두고 선수 탓을 하기엔 너무 가혹하다. 김길리는 피할 공간이 거의 없었고, 올림픽 준결승 막판의 속도에서 앞사람이 넘어지면 뒤사람은 사실상 선택지가 없다. 그럼에도 김길리는 넘어지고도 터치를 이어갔고, 그게 한국이 완전히 멈춰 서지 않게 만든 마지막 버팀이었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선수는 할 만큼 했다고 말해도 된다.

이제 걱정은 두 가지로 남는다. 하나는 김길리의 몸 상태다. 옆구리를 부여잡았다는 건 단순 타박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신호다. 다른 하나는 팀 분위기다. 계주는 개인전과 다르게, 한 번의 사고가 팀 전체의 감정선을 흔든다. 다음 경기를 준비하는 선수들 입장에서는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가장 큰 적이 된다.

그래도 올림픽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쇼트트랙은 다음 종목에서 금방 판이 뒤집힌다. 오늘 못 이룬 걸 내일 만회하는 장면이 가장 자주 나오는 종목이 쇼트트랙이다. 다만 그 만회를 위해선 분노보다 정리가 먼저다. 판정에 대한 감정, 사고에 대한 억울함, 몸 상태에 대한 불안을 한꺼번에 끌고 가면 다리보다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혼성계주는 또 놓쳤지만, 이 실패가 한국 쇼트트랙의 실력이 부족해서 생긴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올림픽 계주가 얼마나 비정한지”를 다시 확인한 밤이다. 김길리가 무사하길 바라고, 최민정·황대헌·임종언·노도희가 다음 종목에서는 더 단단한 레이스로 돌아오길 바란다. 한 번의 불운이 올림픽 전체를 설명하게 두면 안 된다. 그게 강팀이 남은 경기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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