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냉면 vs. 함흥냉면, 뜨거운 승부의 역사

냉면

차게 해서 먹는 국수. 흔히 메밀국수를 냉국이나 김칫국 따위에 말거나 고추장 양념에 비벼서 먹는데, 예전부터 평양의 물냉면과 함흥의 비빔냉면이 유명하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시작하기 전에

  • 지지난 주 올해 첫 냉면을 개시했습니다. 평양냉면을 처음 먹어보는 친구와 함께 평양냉면을 먹었죠. 맛이 괜찮냐고 물어보는 저에게 괜찮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겨자와 식초, 무를 넣어 먹더라고요. 아, 물론 저는 비빔 냉면 시켰습니다.
  • 첫 냉면도 개시했으니 냉면의 역사를 찾아봐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이번에도 괜찮은 책을 찾았어요. 『냉면열전』이라는 책인데, 냉면의 역사에 대해 너무 잘 설명되어 있어 이번 뉴스레터는 이 책을 그저 읽고 요약만 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책은 절판되었더라고요.

1. 최초의 냉면은 오미자 냉면

최초의 냉면은 자주색이었습니다. 17세기 문헌인 『계곡집』에는 자장냉면이 등장하는데, 자줏빛으로 묘사되고 있죠.

이는 당시 냉면 육수에 동치미 국물, 참깨 국물, 콩물, 꿀물, 오미자 국물 등을 넣었기 때문입니다. 규합총서와 동국세시기에서 동치미 국물을 사용하는 냉면이 등장하죠.

1917년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에서는 여름냉면과 겨울냉면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겨울냉면은 동치미 국물에 국수와 김치, 무, 배 등을 넣은 것이죠.

여름냉면은 두 가지가 있는데, 가게에서 파는 냉면은 고기나 닭을 이용한 육수에 수육과 각종 고명을 얹은 것이었고 집에서 하는 냉면은 장국이나 깻국이나 콩국에다가 국수를 말고 고명을 얹은 것이었죠.

2. 왕실의 음식

김준근의 「국수 누르는 모양」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

냉면은 면을 만들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우선 메밀의 겉껍질을 맷돌로 벗겨내야 하고요. 고운체로 쳐서 겉껍질과 메밀가루를 분리해야 합니다.

메밀가루로 반죽하는 것도 쉽지 않죠. 점성이 별로 없어 뜨거운 물로 익반죽해야 하거든요. 또 한꺼번에 반죽해 두는 것이 아니라 먹을 때마다 즉석에서 반죽해야 은은한 메밀 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만들어진 메밀 반죽은 단단했기 때문에 국수로 뽑아내려면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죠.

그런데 왜 이렇게 만들기 힘든 메밀면을 사용했을까요? 밀가루라면 면으로 만들기 훨씬 쉬웠을 텐데 말이죠.

사실 밀은 고온에 약해 우리나라에서 잘 자라기 어려운 곡물입니다. 그래서 고려시대부터 밀을 우리나라에서 재배하지 않고 중국에서 수입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주 귀할 수밖에 없었죠. 반면 메밀은 조선팔도 어디에서나 잘 자랐기 때문에 메밀면을 사용하게 된 것이었죠.

그럼에도 메밀면은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냉면은 벼슬 높은 사람들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습니다. 특히 고종이 냉면을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궁중 잔치에도 따뜻한 국수 대신 냉면을 올릴 정도였어요.

수라간 상궁들은 겨울이 되면 고종에게 올릴 냉면 육수를 위해 배를 많이 넣어 달콤한 동치미를 담갔습니다. 이 배동치미에 편육과 수저로 얇게 뜬 배와 잣을 올려 냉면을 만들었죠.

3. 시카고에서 평양냉면 먹은 안창호

조선경성 명월관본점 ⓒ수원광교박물관

1890년이 되어서야 냉면은 서민의 음식이 됩니다. 서민의 음식이 된 결정적인 계기는 조선의 마지막 궁중 최고 음식 책임자인 안순환 덕분이었습니다.

조선이 망하면서 직업을 잃게 된 그는 궁 안의 요리사를 불러 1903년 지금의 서울 세종로 동아일보 자리에 ‘명월관’이라는 고급 요릿집을 차립니다.

명월관의 메인 메뉴는 여럿이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교자상이었고, 그다음이 냉면이었습니다. 고종 황제가 즐겨 먹던 배동치미 냉면을 판매했는데요. ‘고종이 드시던 배동치미 냉면을 이제 명월관에서도 먹을 수 있습니다.’라는 광고 문구로 냉면을 선전했고, 큰 인기를 끌게 되죠.

이후 평양 및 인천 등지에서 평양냉면집이 생겨났죠. 한국에만 생긴 것도 아닙니다. 도산 안창호가 미국 시카고에서 한인들에게 이렇게 말한 적 있죠.

십 년 전에 이곳을 지나갈 때 장 씨에게 냉면을 대접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말로 미루어 1915년에 미국 시카고에도 평양냉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냉면은 한국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음식이었습니다. 냉면이 인기를 끌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외식 메뉴가 설렁탕 외에 딱히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죠. 6.25전쟁 이후에는 북에서 남으로 피난 온 사람들에 의해 냉면이 더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4. 겨울 음식에서 여름 음식으로

남북적십자회담 ⓒ조선일보

냉면은 석빙고를 이용할 수 있는 궁중에서도 여름에는 사실상 먹기 힘든 음식이었습니다. 1910년대 제빙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1920년대 냉장고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냉면은 본격적으로 여름 음식이 되죠.

하지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여름마다 식중독이 자주 발생하게 되는데요. 식중독이 자주 문제가 되자 1960년대 정부에서는 ‘냉면집 여름철 영업 정지’라는 강경 조치를 취하기도 했습니다.

가장 손님이 많은 여름 장사를 못 하게 하니 평양냉면집은 동치미 국물을 포기하고 육수를 사용하게 됩니다. 육수는 동치미와 달리 끓여서 식중독을 그나마 예방할 수 있었거든요. 참고로 냉면에 식초와 겨자를 치는 것도 식중독을 예방하기 위해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렇게 식중독으로 위축되었던 평양냉면은 1970년대 초 성사된 남북적십자회담을 계기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5. 배달 음식의 원조, 냉면

속초 '함흥냉면옥'의 창업주 고 이섭봉씨가 자전거를 타고 냉면을 배달하는 장면 ⓒ중앙일보

1920년대에는 이미 냉면을 파는 집이 많았습니다. 아예 냉면을 배달해 주는 '냉면 배달부'도 있었죠. 조선 시대 양반들은 음식을 남이 보는 앞에서 먹는 것을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배달시켜 먹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달부들의 입김이 꽤나 셌습니다.

1926년 평양냉면집 자전거 배달부 16명이 4일간의 동맹 파업을 벌여 일급 60전을 1원으로 올려받은 일이 있었고요.

1929년에도 평양의 냉면 배달부 160명이 임금을 올려달라며 파업했는데, 냉면집이 160여 명을 모두 해고해 버리는 강수를 두는 일이 있었습니다. 결국 평양 경찰서장이 중재에 나서 냉면 배달부를 다시 채용하라고 명령하며 사태가 끝났죠.

참고로 당시 냉면 그릇은 세숫대야 냉면 그릇만큼 컸다고 합니다. 배달부들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서 냉면 그릇의 크기가 지금처럼 작아진 것이라고도 하죠.

6. 평양냉면에서 MSG냉면으로

1909년의 아지노모토

1910년대에는 일본에서 개발된 MSG인 아지노모토가 국내에 들어왔습니다. 아지노모토는 식민지였던 조선에 적극적인 마케팅을 합니다. 주요 타겟은 냉면집이었죠.

당시 냉면 육수는 고깃국물이나 동치미 국물을 썼는데요. 여름철에 뜨거운 고깃국물을 내는 일은 고역이었고 금방 상했죠. 동치미 국물 역시 동치미 무가 없는 여름철에는 만들기 어려웠고요.

이런 상황에서 MSG는 고생할 필요 없이 냉면 육수와 비슷한 맛을 낼 수 있는 마법의 가루였습니다. 당시에는 꽤 비싼 가격이었음에도 아지노모토를 이용한 냉면집이 늘어갔습니다.

1937년에 이미 평양, 경인, 함경, 황평, 부산, 평양, 원산, 인천 등에서 아지노모토회가 결성되어 있어, 전국적으로 냉면에 아지노모토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죠.

7. 함흥냉면은 함흥 음식이 아니다!?

서울 종로구 오장동에 있는 원조 함흥냉면집ⓒ오장동흥남집
속초에 있는 함흥냉면옥 ⓒ지역N문화

함흥에는 원래 함흥냉면이 없었습니다. 함흥에는 냉면처럼 메밀로 만든 면이 아니라 감자녹말로 만든 면에 고추 양념을 넣고 맵게 비벼 먹는 비빔국수가 있었죠. 여기에 녹말의 북한 사투리인 농마를 붙여 농마국수라고 불렀어요.

조선시대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메밀을 재배해 국수로 만들어 먹었는데요. 유독 함흥에서는 메밀국수가 발달하지 않고, 감자국수가 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선 함경도는 산이 깊고 험해 메밀을 재배하기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곧바로 감자로 국수를 만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감자는 1820년대 한반도에 들어왔죠. 국수를 만들려면 가루로 만들어야 하는데 감자 가루를 만드는 것은 과정이 복잡했거든요. 가루를 만들고 나서도 문제였습니다. 감자 가루 반죽은 치대면 치댈수록 단단해지거든요.

1930년대 기계식 제면기가 등장하면서 단단한 감자 가루 반죽으로도 국수를 뽑아낼 수 있게 되었죠. 때마침 일제가 개마고원 개발에 나서면서 함흥 지역에 감자 재배 면적을 엄청나게 늘려 감자 가격도 저렴해졌고요. 여기에 바다를 인접하고 있어 근해에서 많이 잡히는 홍어나 가자미 등을 매콤하게 무쳐 국수에 비벼 먹은 것이죠.

이 함흥의 농마국수가 ‘함흥냉면’이 된 사연은 6.25전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1.4 흥남 철수 때 피난선에 올랐던 함경북도 흥남 출신 한혜선은 부산을 거쳐 서울의 을지로 오장동 판자촌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서 고향의 농마국수를 팔기 시작했고 이내 큰 인기를 얻게 됩니다.

6.25전쟁 직후 서울에서는 평양냉면이 큰 인기를 얻고 있었죠. 육수를 부어 먹는 메밀국수는 평양냉면이라 하니, 한혜선은 이를 본떠서 농마국수에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렇게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이 탄생했죠.

한편 을지로 오장동이 아닌 강원도 속초에서 함흥냉면이라는 이름이 처음 탄생했다는 주장도 있어요. 속초에는 1951년 문을 연 ‘함흥냉면옥’이라는 곳이 있거든요. 이곳 역시 흥남 철수 때 피난 온 이섭동이 연 가게입니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함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북한과 가까운 속초에 냉면집을 연 것이 시작이라고 하죠.

이곳은 함흥식 냉면처럼 가자미식해를 쓰는 것이 아니라 속초에서 잡히는 명태식해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죠.

8. 냉면과 친척, 밀면과 막국수

밀면의 원조, 부산 우암동의 내호냉면 ⓒ문화관광

● 밀면

밀면의 탄생도 역시 6.25 전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1919년부터 함경북도 내호지방에서 동춘면옥이라는 국숫집을 운영하던 이영순은 전쟁이 터지면서 부산 우암동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죠. 이곳에서도 고향의 이름을 딴 내호냉면을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메밀을 구하는 일이었습니다. 남쪽 지방은 이북처럼 메밀을 많이 재배하지도 않았고, 전쟁이라 메밀 가격도 아주 비쌌죠.

그래서 미군이 구호물자로 공급한 밀가루에 고구마 전분을 섞어 면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찰기가 없는 메밀 대신 밀가루를 넣으니 면이 쫄깃쫄깃하면서 부드러웠고, 무엇보다 저렴했죠.

이 냉면은 밀가루로 만들었기 때문에 밀냉면이라 불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밀 주이소, 밀면 주이소’라는 식으로 줄여 말하면서 밀면으로 정착되었다고 하죠.

● 막국수

막국수는 메밀의 거친 겉껍질을 벗겨내지 않고 껍질과 속살을 그대로 갈아내서 거무스름한 메밀국수죠. 금방 불기 쉬운 메밀국수를 ‘빨리’ 비벼 먹었다고 해서, 혹은 거칠게 빻아 대충 만들어 먹은 국수라고 해서 막국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하죠.

막국수의 탄생은 허준과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는 흉년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선조는 명나라에서 메밀을 가져와 심게 했습니다. 그런데 메밀을 먹고 난 사람들이 몸이 붓고 배가 아픈 증상을 호소하자 선조는 허준에게 해결책을 의뢰합니다.

허준은 메밀에 독성이 있어 돼지고기와 달걀을 곁들여 먹으면 증상이 사라질 것이라 했고, 사람들이 메밀국수에 동치미 국물을 곁들이고 돼지고기 수육과 삶은 달걀을 올려 먹기 시작하면서 막국수가 탄생했다는 것이죠.

이후 막국수는 강원도를 중심으로 한 화전민들이 주로 먹었습니다. 1970년대 초 화전민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춘천 소양강댐 공사를 할 때 막국숫집들이 영업했고, 전국에서 몰려든 인부들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죠.

마치며

어릴 적 먹던 냉면은 항상 매콤한 비빔냉면 아니면 식초와 겨자 맛이 느껴지던 시원한 물냉면, 그러니까 함흥냉면이었습니다. 고깃집에 가서 비빔냉면 위에 고기 한 점을 올려 먹지 못하면 고기를 제대로 먹지 못한 기분도 들었죠.

그러다 평양냉면이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군대를 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유행이라니까 먹으러 갔었죠. 아, 평양냉면을 처음 먹었던 날의 그 느낌을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이게 진짜 맛있다고 생각해서 맛있다고 말하는 걸까?
이 맛을 알아야 맛잘알이라고 하는 프레임, 어쩌면 홍대병의 끝 아닐까?

심지어는 당시 아이돌 노래를 듣는 친구들에게 '음알못'이라고 말했던 저의 학창시절까지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반성했죠. 이제는 평양냉면도 잘 먹게 되었습니다만, 찾아 먹지는 않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다른 냉면이 있기에 매니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매니아라는 것은 소수 세력일 때 더 잘 생기거든요. 당시 주류였던 함흥냉면은 졸지에 악역을 맡게 되어버렸던 것이죠.

그런데 냉면의 역사를 찾아보니 평양냉면이 거의 항상 주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평양냉면은 잠시 비주류가 된 그 잠깐도 참지 못해 함흥냉면을 음해했던 것이죠. 냉면의 역사를 조사하지 않았더라면 평양냉면의 횡포도 알아차리지 못할 뻔했습니다. 역사를 아는 게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제는 평양냉면이 주류가 되어버린 것 같으니, 저는 앞으로 함흥냉면 매니아를 자처해 볼 생각입니다.

참고문헌

· 백헌석, 최혜림. (2014). 냉면열전.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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