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시인' 하이네와 사치에 빠진 아내

[홍성광의 독일 작가들의 사랑 이야기]
낭만주의 혁명시인 하인리이 하이네
사촌동생과의 첫사랑 실패후 아내 만나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결혼식 만류했지만
첫 사랑에 울고, 마지막 사랑에 또 울고

'혁명 시인' 하이네

독일 시인 중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만큼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시인도 드물 것이다. 그는 넘치는 열정과 정의감, 철두철미한 인권 의식을 가지고 시와 신문 기사, 산문을 썼다.

하이네는 『노래의 책Buch der Lieder』으로 세계적인 시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 시집에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 「로렐라이」도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 때문에 하이네는 흔히 사랑과 사랑의 고통을 노래한 낭만주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칼 마르크스의 친구로서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꿈꾼 '혁명 시인'이기도 했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유명한 표현도 실은 하이네가 마르크스보다 10년 앞서 한 말이었다.

하이네의 어머니는 소위 독일판 강남 엄마의 원조격이다. 야심적인 그녀는 장남인 하이네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얻기를 희망했다. 그런데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아들이 교수, 변호사 같은 전문직을 얻는 데 번번이 실패하자 크게 상심한다. 맏형의 인생 실패를 남동생 둘이 크게 성공하여 만회해주었다. 하이네는 어머니의 헌신적인 사랑과 배려에 대해 고마워하는 「어머니에게 드리는 시」를 쓰기도 했다.

“늘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나는 한 번도 사랑을 얻지 못하고

병들고 지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럴 때 어머니는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아! 어머니의 눈에서 흘러내린 것은

오랫동안 갈구해 온 감미로운 사랑이었다.”

사촌동생인 아밀리에 하이네.

사촌 아말리에와의 사랑

'혁명 시인' 하이네에게는 잘로몬 하이네(Salomon Heine, 1787~1844)라는 함부르크의 부호이자 은행가인 삼촌이 있었다. 잘로몬은 1844년 사망할 때까지 조카를 재정적으로 지원했지만, 조카가 문학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이네는 삼촌 소유 은행의 수습생 생활을 하면서 그의 딸인 예쁘고 영리한 사촌 아말리에(Amalie Heine, 1800~1838)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는 사촌과 결혼하는 것이 비윤리적인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아말리에도 하이네의 사랑에 응답했지만, 삼촌은 법학 공부를 하지 않고 문학을 하겠다는 하이네의 결심이 마음에 들지 않아 둘의 관계를 허락하지 않았다. 하이네는 자신이 삼촌 집에서 점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아말리에가 동프러시아의 지주와 결혼하자, 하이네는 사랑의 고뇌와 아픔을 다룬 시들을 썼는데, 그 시들을 모은 시집이 『노래의 책』이다.

“마음아, 참을성 많은 내 마음아

배신을 원망하지 마라

견디고 용서해라.

사랑스러운 바보가 저지른 일을.”

시인은 여자의 배신을 '바보가 저지른 일이니까 참고 용서하겠다'고 자위한다. 하이네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말리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심정을 토로한다. 그는 시에서 자신을 가장 괴롭히고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한 그녀가 자신을 전혀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하이네는 아말리에가 결혼하고 함부르크를 떠난 것을 두고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나 성문들은 내 사랑이

조용히 달아나게 내버려뒀어.

어리석은 여자가 원하는 건

성문은 뭐든 다 들어주거든.”

시인은 성문이 어리석은 여자의 소원을 들어주어 그녀가 조용히 성을 빠져나갔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실연한 사내는 애인이 살았던 집을 찾아갔는데, 거기서 고통에 휩싸인 자신의 분신을 본다. 창백한 시인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졌다.

“너 분신이여, 이 창백한 녀석아!

왜 내 사랑의 고통을 흉내 내느냐?

허구한 밤 바로 이 자리에서

한때 내가 시달렸던 그 고통을.”

하이네는 아말리에의 여동생 테레제(Therese)와도 새로운 사랑에 빠져들었다. 이번에도 그는 삼촌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양화점 판매원 출신인 아내 마틸데

하이네는 어떻게든 직업을 잡아보려고 신교로 개종하기까지 했으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번번이 원하는 직업을 얻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그는 1831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파리로 이주했다. 당시 프랑스는 독일과는 달리 귀족이나 사제의 특권이 사라졌으며 시민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었다.

1833년 하이네는 파리에서 양화점 판매원인 마틸데(Mathilde, 1815~1883)를 알게 되어 곧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는 1834년 10월부터 마틸데와 동거에 들어갔지만 7년 후에야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녀는 단순하고 쾌활한 성격의 예쁜 소녀로, 지식이 많거나 정신적 능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아적인 인상을 주었지만, 하이네는 그녀의 휘파람새 같은 목소리에 매료되었다. 시집 『아타 트롤』에 나오는 줄리에트는 마틸데를 지칭했다.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프랑스 여자 줄리에트는

겉으로 보기에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녀의 눈동자는 달콤한

빛의 그물이다. 그 그물코에 걸리면

사람들은 마치 작은 물고기처럼

사로잡혀 귀엽게 파닥이게 된다.”

하이네의 아내 마틸데.

사치스러운 마틸데

하이네는 자연스럽게 마틸데와 사랑에 빠진 것으로 보이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포함한 많은 혁명가 친구들은 그가 단순하고 삶을 즐기는데만 관심갖는 이 여성과 관계 맺는 것을 만류했다. 그러나 하이네는 오히려 마틸데가 자신의 지적 환경과 대조적인 계층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하이네를 처음 만날 당시 프랑스어를 읽고 쓸 줄도 몰랐다. 그래서 연애 초기에 하이네는 시골 출신인 그녀의 교육을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노력했다. 그의 권유로 마틸데는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그는 젊은 여성을 위한 교육 시설에 여러 차례 머물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녀가 얼마나 세상을 몰랐는지, 남편이 '위대한 시인'인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마틸데는 파리에서 하이네가 여태까지 교류해 온 세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자 하이네는 점차 외부와 고립되어갔고 사상은 점점 과격해졌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에 부인이 어떻게 살아갈까 염려해서 돈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마틸데는 요즘 말로 '경제 관념이 부족한' 여자였다. 그녀는 구두 쇼핑과 유명 관광지 여행을 좋아해 돈을 물 쓰듯이 썼다. 하이네는 돈을 제법 많이 벌었음에도 늘 쪼들리는 생활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둘의 공동생활은 때때로 문제가 터졌다. 마틸데가 돈을 펑펑 쓰는 바람에 두 사람은 종종 격렬한 부부싸움을 벌였다가 화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이네는 어쩔 수 없이 견뎌야만 했다.

침대 무덤 생활

프랑스어를 간신히 배운 마틸데는 독일어는 더 할 줄 몰랐고, 시인으로서의 하이네의 명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그 때문에 하이네는 그녀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남편은 계속 시를 썼지만, 나는 그것이 그다지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이 자신의 시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틸데는 남편의 신상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게 없었다. 하이네가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평생 숨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이네는 마틸데가 자신을 저명한 시인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사랑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둘의 뒤늦은 결혼식은 1841년 8월 31일 가톨릭 의식에 따라 파리에서 열렸다. 하이네가 1797년 생이니까 44세 되던 해였다.

평소 편두통, 눈병을 앓은 하이네는 1848년 루브르 박물관에 갔다가 쓰러지고 말았다. 그 후 죽을 때까지 8년간 침대 생활을 한 하이네는 마지막에 가서 어린아이 정도의 몸무게 밖에 안 나가는 지경이 됐다. 그래도 정신적인 생기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자신이 죽은 후 황량한 무덤에 들어가게 되면 그가 사랑한 여자 마틸데를 지켜주고 보호해달라고 신에게 하소연했다. 또한 아내가 경제적인 곤란을 당할까 봐 무척 걱정해 자신의 인세를 아내에게 넘겨줄 것을 부탁하는 유언시를 남기기도 했다.

하이네(왼쪽)와 엘리제 크리니츠.

비서 무슈와의 사랑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도 하이네는 죽기 1년전인 1855년에 ‘무슈’(Mouche)라는 애칭으로 불린 프라하 출신의 수수께끼 같은 여인 엘리제 크리니츠(Elise Krinitz)와 친교를 맺고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누기도 했다. 29살이나 어린 그녀는 그의 간병인 겸 비서였는데, 아픈 하이네는 그녀와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사랑을 나눴었다. 그때 마틸데는 모른 척했다.

그녀는 나중에 교사 및 여류 문필가가 되어 자신을 ‘까미유 셀당’(Camille Selden)이라 불렀다. 하이네의 마지막 감동적인 몇몇 시들은 그녀와의 만남에서 생겨난 것들이었다. 그는 「무슈를 위하여」라는 시에서 ‘진리는 끊임없이 미와 다툴 것이다’라 노래했다.

이처럼 말년의 하이네에게 진리와 미의 조화는 더 이상 불가능해지지만, 누워서 담요 생활을 하는 ‘침대 무덤’ 상태에서도 그는 시대 현실을 외면한 ‘순수한 시의 세계’에 침잠하지는 않았다.

파리 몽마르트에 있는 하이네의 묘지.

마지막 안식처

하이네는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항상 자신의 재정 상황이 불안정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실제보다 더 나쁘게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년에는 주로 아내를 위해 물질적 안정을 제공하는 데에 많은 신경을 썼다. 마틸데는 남편의 임종 직전 신이 그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했다. 이 말을 들은 하이네는 “의심하지 말아요, 여보, 신은 나를 용서할 거요. 그게 신이 하는 일이니까!”라고 답했다.

마틸데는 하이네가 1856년 2월 17일 파리에서 58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에는 오히려 뛰어난 사업 능력을 보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녀는 남편의 작품을 추가로 발굴하는 일에 많은 신경을 썼다. 사망 3일 후 하이네는 파리의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상속인으로 지정된 마틸데는 27년 후 같은 무덤에서 마지막 안식처를 찾았다. 무덤에는 하이네의 시 「어디로?」가 적혀 있다.

“지친 나그네의

마지막 안식처는 어디일까?

남쪽의 야자수 아래일까?

라인강의 보리수 아래일까?”


홍성광은 서울대 독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한 독문학박사로, 독일 문학 및 철학 관련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독일 명작 기행』, 『글 읽기와 길 잃기』, 역서로 루카치의 『영혼과 형식』,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 니체의 『비극의 탄생』,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도덕의 계보학』, 토마스 만의 정치 에세이 『예술과 정치』, 『마의 산』(상·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상·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외』,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젊은 베르터의 고뇌』, 실러의 『도적들』,『간계와 사랑·빌헬름 텔』, 헤세의 『데미안』, 『수레바퀴 밑에』, 『싯다르타』, 카프카의 『성』,『소송』,『변신 외』,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 없다』,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야스퍼스의 『정신병리학총론』(공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