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성량·파리 재현한 무대 ‘흡족’
[리뷰]비올레타에 신예 김희정 소프라노 초고음·연기력, 성공 무대 평가바로크·신고전주의 무대미술 무대의상 따라 비극적 이야기 은유기둥·소품 등 극 분위기 고조시켜 다음달 1~2일 대구서 상연 예정
“la nascita di una stella!(스타의 탄생)”
광주시립오페라단이 지난 25일 광주예술의전당에서 펼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새로운 프리마 돈나의 출현을 목도하는 시간이었다. 주역 비올레타 역을 유명 오페라 싱어가 아니라 신진 소프라노 김희정(코모 베르디 국립음악원)이 맡았다.
공연에 앞서 최철 예술감독은 “김 소프라노는 ‘생에 마지막으로 오페라에 도전하고 싶다’며 돌연 오디션에 지원했다”고 했다.
리릭컬한 가사와 전막에 걸친 초고음을 소화해야 하기에 기대와 염려를 동시에 받았으나 성량, 연기력 양편에서 성공적인 무대였다는 평가다.
1988년 마리 맥로린 등이 주역을 맡은 버전이 정극이었다면, 미니멀한 구성에 미디어아트를 얹은 이번 공연은 현대극에 가까웠다. 타락한 여인(Traviata)의 통속적 연애담과 이탈리아 벨칸토 전통을 동시대성 위에 현현시켰다.
가족 반대로 시련을 겪는다는 전개는 로미오&줄리엣 콤플렉스와 접맥한다. 이와 함께 울려 퍼진 ‘축배의 노래’와 사랑 고백 ‘행복하고 빛나는 어느 날’, 사랑의 진심을 사유하는 ‘아! 그이인가’ 등은 귀를 사로잡은 레퍼토리들이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Ten.)와 감정선에 따라 1막 살롱에서 강렬한 레드 드레스를, 그의 아버지 제르몽(Bar.)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이 무르익은 2막(1장)에서 진녹색 로코코풍 의복을 입는다. 무채색 세트 위에서 옷의 색감은 도드라졌다.
친구 플로라의 저택에서 가면무도회가 펼쳐진 2막(2장)에서 비올레타는 검은 의상으로 비극적 페이소스를 은유한다. 알프레도(갈색·검은색), 플로라·안니나(회색), 제르몽, 합창단(흰색·검은색)이 채도 없는 옷을 입은 것도 ‘색채 알레고리’에 집중시키려는 의도로 읽힌다.
파티 장면은 여러 대사가 뒤섞이며 인물들의 감정선, 극의 현 상황을 한 번에 보여준다. 출연진은 각기 다른 대사와 성부에 집중하면서 무규칙 속 질서를 찾아가듯 앙상블을 이뤘다.
1막 말미에 비올레타는 붉은 꽃다발 하나를 허공에 던진다. 아무도 받지 않는 부케, 흩뿌려진 꽃잎이 사랑의 비극을 암시한 이 장면은 돈다발이 흩날린 대목과 오버랩된다.
이어 광주시립발레단은 가스통 자작의 패거리가 돼 투우사 분장을 하고 ‘마드리드의 투우사’를 췄다. 무용수의 소떼(도약)와 군무, 특정 대형을 이루는 포지셔닝은 플롯의 단조로움을 깨고 연회 분위기를 배가한 디베르티스망이다.
이 작품이 비극적 파토스 속에서 고결한 아가페로 나아간 ‘동력’은 베르디의 자전적 경험에 있다.
베르디는 알렉산드로 뒤마 피스 작 ‘동백 아가씨’를 각색해 ‘라 트라비아타’를 만들었다. 원작자인 뒤마 피스의 부친은 여성 편력이 심해 혼외자를 많이 두었고, 그중 하나가 뒤마라는 점에서 역경을 딛고 이뤄내는 사랑의 숭고함을 주제에 녹였다.
바로크, 신고전주의 양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당대 파리의 양식을 재현한 무대미술 또한 아름다움을 더했다. 기둥이나 소품의 좌우 배치, 전후방 깊이감의 활용은 극의 심리적 뉘앙스를 고조시키는 방법론이다.
중반부에서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사육제도 볼 수 있었다. 형형의 총천연색 물감이 창을 물들인 모습은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토마토를 던지며 노는 ‘라 토마티나’를 연상시킨다. 이 같은 화사한 눈대목이 사랑의 몰락을 모순 형용한다는 점은 내재적 비극과 맞닿아 있다.
비올레타와 그랑빌 의사 등은 풍부한 성량으로 성음을 전했다. 알프레도 음량이 다소 약해 오케스트라 피트를 뚫고 나오지 못한 점은 옥에 티. 대극장 객석 뒤편(최장 거리 32m)에서도 온전한 울림이 전달될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생명력을 잃고 백화(白化)한 꽃처럼 비올레타는 종막에서 순백 드레스를 걸친다. 짧은 생애 끝 낙화를 앞둔 한 떨기 동백꽃잎 같다.
이 대목은 여주인공이 곧 세상을 떠나고 사랑은 실패할 것임을 암시한다. 여주인공의 죽음을 앞두고 무대 절반을 복도로 연출, 시선을 병상으로 응결시킨 과감함도 인상적이다.
다만, 비올레타의 죽음은 극단적 비극이라기보다 ‘승화’에 가깝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역설한 비극 이론 테레서(theresis)와 같이, 비극이 고통을 매개로 주인공의 내면을 고양시켰기 때문,
한편 광주시립오페라단은 이 작품을 오는 11월 1~2일 달빛교류사업 일환으로 대구 오페라하우스에서 상연할 예정이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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